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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징병제 축하 강연회에 나선 김경진.
ⓒ 전갑생
김경진(金慶鎭·창씨명 金子慶鎭·1893년생)은 경남 김해 진영 영리 출신이며, 북경협화(北京協和)대학을 중퇴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면서기로 재직하였다. 1923∼28년 김해면 면장으로 활약하였다.

그는 1923년 9월 24일 김해 형평분사 사건을 직접 중재, 해결을 보기도 했다. 이 사건의 전모를 살펴보면 1923년 8월 1일 형평사 김해분사가 설립되면서 김해청년회 간부들이 이를 지지한 데 분개한 농민 1만 명이 14일부터 연 3일간 청년회와 교육회 및 교육회가 경영하는 합성학교(合成學校) 건물을 파괴하였다.

이 때 청년회 간부 이원의 집도 파괴되었는데 이 사건은 마치 전시상태를 방불케 했다. 참을 수 없게 된 형평사원은 결사적으로 대항하게 되었고, 농민들은 닥치는 대로 형평사원의 가산을 파괴하였으며, 청년회 간부는 경찰의 방관을 공격하여 온 사회가 벌집을 터뜨려 놓은 것 같았다 한다. 10여 명이 검거되는 등 쌍방간에 적대적 분위기가 계속되다가 9월 24일 김경진의 중재로 소요는 일단 해소되었다.

▲ 관선 경남도의회 의원 김경진.
ⓒ 전갑생
이 사건은 형평운동을 반대하는 세력과 마찰을 빚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김해분사는 지역 토호세력들의 거센 저항을 받아야 했다. 이때 김경진은 자처하여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했다고 했지만 형평운동을 저지하는데 공헌을 한 것이다.

그는 1924~42년 약 14년간 김해, 창원 2곳을 선거구로 경상남도 평의회 의원, 경상남도협의회 의원을 지냈고 관선·민선을 두루 거쳐 경남도회 부의장까지 역임했다. 1937년 전조선 명사 59명 제2회 각도 파견 시국순강(時局巡講) 때 경남 대표로 참여하여 경남 일대를 돌면서 '내선일체'를 역설하였고 '황국신민'임을 자처했다.

또한 1940년 4월 25일 그는 경남도의원들과 함께 상해로 날아가 황군(皇軍)들을 격려하고 몇몇 전쟁터를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 1941년 8월 20일 김경진은 국민총력운동 앙양과 생산 실적을 높이기 위해 김해군내 각 마을마다 회관을 건립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신도실천(臣道實踐)의 도장으로 만들어 고도국방국가 체제의 완성을 위해 꼭 필요하다"하고 역설했다.

1941년 5월 7일 김경진은 경남도의회 선거에 박창선(朴昌善·창씨명 吉原豊治)을 추천하는 신문광고를 내기도 했다. 이미 관선 도의원으로 당선된 김경진은 박창선 당선을 위해 노력했다.

"국방헌금과 황군 위문에 성의를 다해야"

▲ 김해면장 시절 형평사 김해분사 사건에 연루되었던 김경진.
ⓒ 전갑생
김경진은 1938년 조선보국회(朝鮮報國會)에 박희도(朴熙道)· 박춘금(朴春琴) 등과 함께 핵심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조선보국회는 전시체제기의 전쟁협력단체로 발기인 김경진에 따르면 주요 임무는 "보국(報國)정신을 철저히 보급하고, 교육령 개정에 따라 총후(銃後) 생활을 개선"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보국사업"에는 첫째 일반민중의 시국 이해를 강화시키는 것, 둘째 민의(民意)의 사정을 위정자에게 전하는 것 등 두 가지가 있었다.

김경진은 일본 당국이 중일전쟁 이래 전시총동원 체제의 구축을 위해 "조선인의 성의 있는 활동을 인정"하여 교육령의 개정과 지원병 제도를 실시하게 되었다고 하고, 이에 따라 조선인은 주로 "총후의 지성(至誠)으로 국방 헌금과 황군 위문에 성의를 다해야"한다고 했다.

그러한 활동단체로 조선인이 만든 단체는 애국금차회, 총후지성회(銃後至誠會)가 있는데 이를 체계화하려는 목적에서 1938년 "총독부, 군부와 상의한 결과 찬성을 얻어" 조선보국회를 결성했다는 것이다.

▲ 징병제 실시에 감격해 강연회 나선 김경진.
ⓒ 전갑생
중추원 참의에서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로

1940년 7월 1일 중추원 참의(주임·종7)로 임명되면서 "사회교화 시설중 조선 현황에 대해 특히 강조 실시를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사항과 이것을 일반 민중에게 철저히 시키는데 있어 적절 유효한 방책을 강구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중추원의 역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역설했다.

"중추원은 조선총독부의 회의에 제출한 사항을 심의하야 그 결의한 것을 총독에 아뢰울 뿐이요 중추원자신이 의안을 제출할 권리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 결의는 단지 의견을 개진하야 총독의 참고재료 밖에는 되지 않음으로...그러나 중추원은 총독의 최고자문기관인 만큼 그 결의는 정치상 중요한 한 개의 요소가 될 것이다"

▲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와 경남도 부의장이 된 김경진.
ⓒ 전갑생
김경진은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이사를 맡으면서 친일운동에 적극성을 보였다. 임전보국단은 '전쟁에 대한 임전태세를 확립하여 보국하자'는 뜻으로 조직되어 일본의 황민화 정책에 앞장선 친일단체다.

임전보국단 이사를 맡으면서 그는 "황도정신(皇道精神)의 선양, 국민생활 쇄신, 근로보국, 저축 및 생산 확충, 국방사상 함양" 등을 주장하였으며, "2400만 전 민중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적성(赤誠)의 헌금을 다하여 대헌납운동을 추진해야 한다"라고 역설했다. 임전보국단은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조직·개편 때 합류하여 발족된 지 1년만에 해산되었다.

또한 김경진은 1941년 6월∼1943년 1월 24일 국민총력조선연맹 경상남도회 부의장, 경남발기인, 본부 이사 등을 거치며 친일 최전선에 설 수 있었다.

국민총력조선연맹은 일제가 1938년에 설립한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을 해산하고 이른바 고도국방체제의 건설을 목표로 1940년 10월에 출발시킨 단체다. 이 단체는 일본제국주의 정책협력을 가장 큰 업무로 삼고 내선일체를 내세워 증산운동·공출·학도병 지원·폐품수집·
일본어강습 등을 강요함으로써 한국인에게 대륙침략정책을 선전·선동하고 민중 생활 전반을 통제하는 등 반민족적인 행위를 일삼았다. 그 중심에 선 김경진(당시 현직 경남도협의회 의원)은 경남출신 중 유일하게 이사직을 맡아 열성적으로 일하다가 경남도협의회 부의장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징병제 감격해 지방 강연회에 나서다"

1942년 5월 6일 경남 황민훈련연성도장(皇民訓練練成道場)에서 농촌진흥운동을 선전하는 주제로 특별강연을 했다. 1942년 5월 징병제 실시 축하 강연회에 나선 김경진은 제1반에 소속되어 부산(21일)·울산(23일)·밀양(24일) 등지와 고향인 김해·동래·창원 등지를 돌면서 '징병제 감격'을 선전하고 다녔다. 또 당시 그와 함께 나선 사람들은 김영수(金榮洙·金村吉祐·거제출신 경남도협의회 의원), 탁동조(卓同朝·光山卓一·통영출신 경남도의원) 등이다.

▲ 경남지주봉공회 회장으로 애국기 헌납운동을 벌인 김경진
ⓒ 전갑생
그는 1941년 9월 16일 경남지부봉공회(慶南地主奉公會) 창립대회에서 화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0월 20일 애국기 헌납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그는 애국헌납 운동을 주도하면서 "많은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기를 바란다"하고 말했다.

▲ 황국신민 도장을 만들려고 한 김경진.
ⓒ 전갑생
1942년 5월 23일 김경진은 울산 대화국민학교 교정에서 경남지주봉공회, 경남유림연합회, 조선임전보국단 경남지부 공동주최로 열린 '징병제 축가 강연회' 연사로 나섰다. 당시 경남지주 봉공회 위원장이었던 김경진은 "징병제 실시하는 것은 큰 기쁨이요. 감격할 일이다"며, "총후 황국신민이 직접 나서서 동참해야 할 중대한 임무이다"라고 강조했다.

1944년 2월 11일 김경진은 '총후 전선의 충성스럽게' 일한 공로로 제2회 근로공(勤勞功)을 영광스럽게(?) 받았다. 이 표창은 조선총독부에서 '대동아전쟁을 위해 열심히 일한 것을 치하하고 더욱 열심히 노력하라'는 의미로 하사했다고 한다.

해방 이후 김경진은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어 특별검찰부로 송치되었다. 1949년 8월 30일 반민특위에서는 30일 불구속 피의자 김경진 등 43명을 특검부로 송치했으며, 도피자에 대해 공소중지한다고 밝혔다. 이때 불구속 송치된 사람들 중 최연국(崔演國), 노준영(盧俊永) 등 경남출신 친일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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