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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갑용(李甲用, 창씨명 大田一夫, 1894년생)은 경남 고성군(固城郡) 고성읍 출신으로 청년시절부터 막강한 자본력을 지닌 자본가였다. 그는 지역내 무역곡물비료상(貿易穀物肥料)을 경영하였고, 또한 조선주류제조, 해산물위탁판매상, 1940년대 고성산업주식회사 사장으로 성장가도를 달렸다.

이처럼 지역내의 자본가로 성장함에 따라 정계, 재계 등으로 진출하여 친일행각을 벌였다. 그 당시에는 고성군내의 최고의 실력자이며 유력자라고 알려졌으며, 어느 누구에게 물어봐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매판자본가에서 중추원 참의까지

이갑용은 조선총독부의 자문기관인 중추원 참의를 지내면서 본격적인 친일파로 변모하게 된다. 중추원은 총독의 자문에 응하는 기관으로, 조선총독부 관제 및 동 중추원 관제에 의해서 1910년 10월 1일에 개설되었다. 설립 당시에 그 구성은 의장, 부의장, 고문, 참의, 부참의 등이었다.

설립 당시에 중추원은 총독의 자문에만 응했으나, 훗날의 관제 개정으로 기능 하나가 추가되어서, 총독의 위촉사항으로 한국의 옛 관습 및 제도를 겸하여 조사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근본이 친일귀족, 친일유지들의 무마·회유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실권없는 허수아비직에 불과하였다.

하지만 중추원 참의는 한국인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영광스러운 자리로 친일유지·귀족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그는 참의직(參議職)을 1910년 10월 1일부터 1944년까지 지냈는데 그가 그렇게 오랜 동안을 그 자리에 머물 수 있었던 것은 막강한 자본력과 정치적 유명세 때문이었다고 하겠다.

1948년 9월 22일 법률 제3호로 공포된 '반민족행위처벌법'의 제1장 제4조를 보면, "다음 각호에 해당하는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거나 15년 이하의 공민권을 정지하고 그 재산의 전부 혹은 일부를 몰수할 있다"라고 적시하고 있다. 세부조항에는 습작한 자, 중추원 부의장 고문 또는 참의 되었던 자, 도·부의 자문 또는 결의기관의 의원이 되었던 자로서 일제에 아부하여 그 반민족 죄적이 현저한 자..." 등 12개 사례를 적고 있다.

이갑용은 두 개 항목, 중추원 참의와 경남도의원 등에 해당되었지만 반민특위에 검거되어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다.

그는 고성면협의(固城面協議會) 의원에서 출발하여 고성읍의원(1941년), 경남도회의원(1930∼1941)을 지냈다. 도의회의원은 자문과 의결 이외에 관과 민의 가교 역할을 하면서 관의 방침인 총력전 수행의 첨병이 되었다. 그는 지방의 제1급 유지이자 행정력의 앞잡이로 그 명성을 떨쳤다. 또한 지역내 자본가들의 집단인 고성금융조합이사(37∼38년), 고성수리조합평의원, 고성학무위원 등을 지냈고, 지역내의 농민수탈기관인 고성농촌지도위원, 고성소작위원, 고성군미곡통제조합 부조합장(1942), 고성농회부회장(1938∼1942), 고성산업조합장(1938∼1942), 고성주조조합장 등을 거쳐 고성군이나 경남도의 유명한 친일파로 이름을 떨쳤다.

▲ 부산일보 1941년 8월 15일자 신문기사. 이갑용은 '전시경제, 전시생활 강화'를 주장하며 대동아전쟁을 적극 지지했다.
특히 농산촌 생산보국 지도방침에 따라 실시된 농촌수탈정책으로 농회, 소작회, 농촌지위원회, 미곡통제조합 등의 단체를 만들게 되었다. 고성지역은 광활한 평야를 끼고 있었고, 대부분의 지주들이 밀집된 곳이었다.

그는 여러 농촌수탈기관의 중책을 맡으면서 농촌 노무동원계획, 출입 경작지의 정리계획, 경지 적정배분계획, 자작농지 창정(創定)계획, 개척민 송출계획, 농촌부채 정리계획 등 농촌이 당면한 중요문제를 차례로 설정하여 그 위에 농촌경영의 계획을 세우는데 동조했다고 볼 수 있다.

전시체제하에서 광란적 친일행각 벌여

이처럼 일제의 농촌정책은 전시체제와 전쟁동원물자를 생산하기 위한 방법이었고, 농촌지역의 열악한 환경을 무시하면서도 농민을 이용하여 전쟁물자 생산만을 고집하였다.

이런 일제의 농촌정책을 수행하고 집행했던 기관이 군·읍·면·리 단위이며, 그 책임을 맡고 있었던 이갑용은 충실하게 그 업무를 수행했던 것이다.

1940년 일제말기 전시체제하에서 그는 비행협회 고성지방위원장, 고성국방의회고문 등을 거치면서 전쟁을 옹호하거나 징병 등을 후원하기도 하였다. 또한 1944년 1월 12일 고성경방단(固城警防團) 시무식에서 이갑용은 경방단을 열심히 도와주고 노력한 점이 인정되어 '일반조력자(一般助力者)'로 선정하여 표창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당시 그는 축사에서 "황국신민의 도를 다해 열심히 노력하겠다"라고 말했다.

1939년 7월 3일, 경방단은 조선총독부령 제 104호로 경방단 규칙을 제정 공포하고 경방단과 수방단을 해체 통합하여 경방단으로 하였다.

경방단을 설치하면서 총독부 경무국장은 "지난 사변의 진전에 따라 사단의 국제정세는 긴박화되고 그 후에 있어 신공항건설의 대사업은 전도가 다난할 것으로 생각되며 본인은 그 최악의 사태에서 반조반공의 완벽을 기하여 치안을 확보하는 것이 국방상 또는 치안상 최근요소이며 급무로 확신한다. … 경제의 계통에 속해 있던 소방조 및 수방단과 부면계통의 방호단을 해체 통합하여 새로이 도지사 감독 하에 경찰서장이 지휘하는 경방단을 설치한다"라고 하여 경방단 설치의 취지를 밝히고 있다.

경방단 소방부의 임무는 경찰서장 또는 소방서장의 지휘를 받아 평시에 있어서는 수화재, 전시에 있어서는 공습에 의한 화재를 경계, 방어하여 이로 인한 화재를 방지하는 데 있다.

▲ 1941년 4월 경남도의원 후보로 출마한 그는 같은 고성출신에 의해 패배했다. 사진은 부산일보(1941. 7)에 게재된 후보유세 신문광고.
1939년 9월 27일 이후에는 경방단과 동시에 방호단(防護團)을 결성하여 전쟁준비를 위해 직접적인 활동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때마다 일제는 지역마다 호국영령제(전쟁중 사망한 일본인 병사들을 추모하는 행사)를 개최하여 전쟁의식을 심어 넣기에 바빴다.
또한 경방단과 동시에 지역별 애국반(愛國班)을 조직하여 국방헌금 모금과 비행기 등을 헌납하는 운동을 끊임없이 벌였다.

1940년 4월 19일 고성산업조합(조합장 천두상)의 정기총회에서 개회식과 더불어 참가자들은 '궁성요배', '황국신민의 도' 등을 시작으로 회의를 시작하였다. 이날 총회에서 이갑용은 평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41년 4월 14일 이갑용은 경남도의원 후보로 입후보하기 위해 부산일보를 방문하여 "공식출마를 선언한다"라고 말하고 본격적인 운동을 벌였다. 당시 그는 현역 도의원으로 1930년부터 만 10년 동안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같은 고성출신인 박상요(朴相堯, 창씨명 竹城武雄)에게 패해 도의원으로 당선되지 못했다.

▲ 『부산일보』 1944년 1월 23일자 신문광고. 그는 '대동아전쟁'을 지지하는 전쟁선동자였다.
1941년 8월 15일 '고성군 총력운동전망(固城郡總力運動展望)'이란 부산일보 특집판에 이갑용은 "교양과 훈련으로 당국의 긴급문제(敎養と訓練とが 當局の緊急問題)"라는 주제로 글을 게재했다. 이 글에서 그는 "긴급하게 국내 정세는 총력연맹 시국임을 재인식하여 의식앙양을 높이는 동시에 전시경제 협력강화, 전시생활 강화...모든 것을 일상생활에 온 힘을 다해 황국민으로써 실천해야 하며, 연맹의 지도아래 책임을 다해 따라야 하며 당국의 산증(産增, 생산증산운동) 지시사항에 충실하게 국민총력을 기울여야 할 때이다"며, "현재 국제정세, 국내 정세를 보아서 온 국민들은 진심으로 전시생활에 협력하여 국민정신앙양에도 노력해야 한다"라고 역설했다.

▲ 고성경방단에서 표창받은 이갑용의 신문기사.
또한 1942년 9월 11일자 <부산일보>가 이갑용이 경남 각지에서 '징병제 실시와 취지'라는 제목으로 강연회를 마치고 돌아왔다고 보도했다. 당시 보도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국민총력도연맹 이사, 중추원참의, 고성읍 동외리 거주하는 大田一夫씨는 지난 8월 20일부터 사천군을 시작으로 하동, 남해, 통영, 창원, 함안, 김해, 동래 각군에서 '징병제의 취지'라는 강연을 마치고 돌아왔다…. 금회 도총력연맹의 여정에서 '징병제실시에 임하는 각오' 및 국어보급 문제 등을 각 군마다 다니면서 설명하고…각 군마다 평균 600여명이 참여하여 좋은 성과를 얻었다 라고 말했다…."

이갑용이 경남 각지를 돌면서 일제의 징병제 정책을 선전하는 나팔수로 활동한 사실을 명백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하겠다. 특히 그는 국민총력연맹 경남도 이사직을 맡으면서 적극적으로 강연활동을 펼친 것으로 보아 매우 열성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42년 9월 10일 그는 고성읍 체육진흥회 부회장으로 선출되어 '국민체육운동의 통제강화를 기본으로 내세우며' 적극 참여하였다.

▲ 1937년 경남도의원에 당선된 이갑용. 그는 1930년~1941년까지 만 10년동안 충실한 친일 도의원이 되었다.
전쟁선동과 물자공출에 앞장서다

1944년 1월 23일 이갑용은 부산일보(釜山日報, 일문)에 '대동아전쟁'을 지지하는 광고를 자랑스럽게(?) 냈다. 이때 그는 고성공립국민학교장회장, 고성문국회 회원 등을 맡고 있었다. 또한 같은 해, 3월 9, 10일 양일간 고성 농산물 생산책임부락당회(生産責任部落當會)를 조직하여 제1반에 고성읍장, 제2반에 이갑용, 제3반 도의원 등이 맡아 18개 마을을 돌면서 쌀, 보리 등 각종 곡식 등을 공출하는데 앞장섰다. 특히 그는 각 마을 지주들에게 쌀 등을 빨리 납부하도록 독려하기도 했다. 이 곡식들은 일본의 '대동아전쟁물자'로 보내졌다.

▲ 그는 고성산업조합장으로 선출되어 매판자본가로 급성장하게 된다. 매일신보 1935년 8월 1일자.
한편으로, 고성군내 보통학교 극빈자 아동을 위하여 수업료를 대납하였지만, 결국에는 경찰서에 물품을 구입하여 기증함으로써 친일상을 보이기도 하였다. 또한 농촌진흥자력경생(農村振興自力更生)이 선결문제라고 인식하여 인물양성에 주력한다고 고성학원을 설립운영하기도 하였다.

해방 이후, 1949년 8월 23일 이갑용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검거되어 특별검사부로 송치되었다. 그러나 그는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나 단죄되지 못하고 지역유력자로, 매판 자본가로 거듭 성장하여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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