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 모형숙
53년 전 미국의 폭격에 비참히 숨져간 그 현장에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한 몸부림이 있었다. 11일 오후 2시, 익산역 광장 위령비 앞에서는 1950년 미군 이리폭격 희생자 추모제가 네 번째로 치러졌다.

노근리 사건 보도가 나간 이후 2000년 처음 공식적인 위령제를 거행하면서 유족회는 그동안 진상규명과 피해자 보상을 위한 통합특별법 제정을 촉구해 왔다.

1950년 미군 이리폭격 사건은 이리역부터 송학동 주변을 무차별 폭격함으로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낸 사건이었다. 유족회가 자체적으로 조사해 파악한 피해인원은 사망자 78명, 중상자 10여명에 이르고 있으며 당시 피해자들의 증언과 정부와 철도청의 공식문서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사망자는 신원미상을 포함해 약 400여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전준형 천주교 정의구현 전주교구사제단 사무국장의 사회로 진행된 이날 추모제는 미군의 장갑차에 무참히 살해당한 효순이와 미선이의 기일이 한달 전이었다는 의미가 깊어 이날 추모제를 더욱 안타깝게 했다.

ⓒ 모형숙
이날 행사에 참석한 김현 원광대 대학교당 교감은 “유족들의 통한의 세월은 정의와 인권과 평화의 길을 여는 밑거름의 계기가 되었다”며 “1950년 희생자들은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격으로 해방군이었다고 생각한 미군의 폭격은 약소국에 대한 자기 편의주의적인 행동이었다”고 지적했다.

또한 “‘고마운 미국’이라는 생각 속에 묻혀졌던 진실을 다시 밝혀냄으로써 역사는 다시 살아난다”며 “희생자들의 죽음이 진실된 역사를 만들어 가는데 디딤돌이 된다”고 말했다.

평화와 통을을 여는 사람들의 홍근수 공동대표는 “전국의 희생자 유족들과 함께 통합특별법 제정의 위해 투쟁하고 있지만 불행히도 지난 6월 국회에서 통합특별법을 상정조차하지 않음으로 해서 통합특별법이 제정되지 못했다”며 통탄해 했다.

폭격 당시 부모를 잃은 이창근 익산유족회장은 “50여 년이 넘는 세월을 숨죽여 흐느끼며 살아온 유가족들의 고통 어린 삶을 돌아볼 때 가슴이 미어져 오고 앞으로 미군에 의한 익산폭격 사건의 진상이 밝혀지고 희생자들의 명예가 회복할 때까지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폭격 당시 이창근씨의 상황 진술
(1999년 10월 14일자 익산 한겨레리빙 발췌)

이리 초등학교 6학년(35회)에 재학 중이었던 이창근씨와 동생 창규씨에 따르면 11일 1시까지 점심을 먹고 청소를 한 뒤 6학년 전체 학생이 강당에 모인 음악시간(오후 2시40분께)에 ‘꽝’하는 소리와 나서 교실 밖으로 뛰어 나갔다.

두 사람은 학교에서 바라볼 때 이리경찰서에서 연기가 나는 것으로 보여 달려갔으나 이리역 기관차 사무소와 송학동 일대가 형체를 알 수 없거나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모습 뿐이었다.

그들은 부모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역을 통해 송학동으로 가려 했으나 경찰에게 제지당해 결국 배산 방향으로 돌아서 도착했지만 형체도 찾아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아버지 이순옥(기관 조사·당시 40살)씨와 어머니 정옥주(당시 36살)씨를 한꺼번에 잃어버린 두 아들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시체를 찾지 못하다가 결국 3일만에 아버지 이씨를 기관조사들이 일하는 장소인 채탄장에서 찾았다.

이씨는 잔뜩 웅크린 자세에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지만 제복에 달고 있는 기관조사 전용 회종 시계를 보고 신분을 확인했다.

익산폭격 사건의 진상
정부공식문서에 나타난 기록과 희생자들의 증언을 종합한 내용

1950년 7월 11일 당시 미군은 천안을 점령하고 남진하려는 북한군에 맞서 천안부근에서 있는 전의라는 마을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와 같은 시기 한국군은 진천-청주지역에서 북한군의 남하를 저지하면서 뺏고 빼앗기를 거듭하는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접전지역과는 적지 않은 거리를 두고 있었던 익산은 전쟁의 기운을 느낄 수 없을 만큼 평온하였다. 학교, 경찰서를 비롯한 관공서들은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사람들은 일상에 전념하고 있었다.

남성중학교와 이리여중에 다니던 학생들은 모 국회의원의 시국강연을 듣기 위하여 이리극장에 모여 시끌벅적 떠들어댔고, 전주, 김제, 만경, 임피, 오산 등에서 모여든 사람들은 5일만에 열린 우시장에 모여 흥정에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일군의 청년들은 전쟁이 났다는 소식에 군대에 입대하기 위하여 김제쪽으로 난 전라선 철길을 따라 고향을 뒤로한 채 하염없이 걷고 있었다.

별로 전쟁이란 느낌이 없이 지내고 있었던 것은 기관사와 기관조사, 조사계원등 이리운전사무소 소속 철도공무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어디로 이동할 지 모르는 전시상황이라 비상대기 중이기는 했지만 평상시와 다른 것은 별로 없었다. 그 날도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나른함을 달래고 있었다. 이리역 주변에 버드나무 3그루가 있는데, 7월 중순 정오의 따가운 햇볕을 가리기엔 충분한 휴식처였다. 대다수 사람들이 그늘아래 누워 있었고 장기나 바둑을 두며 한가로이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운명의 시간인 11일 오후 2시를 넘어서 비행기 2대가 이리역을 중심으로 하늘을 2-3바퀴 맴돌았다. 당시는 전시상황이었기 때문에 철도기관사들은 물론 민간인들은 습관적으로 비행기의 국적을 살펴본다.

그날 2대의 비행기는 중아에 별 모양과 그 양옆으로 줄무늬가 그려져 있는 미공군의 마크가 선명한 미군의 중폭격기 B24 2대였다. 그 전에도 미군기가 날아다니는 것을 종종 본적이 있던 철도청 소속직원들은 그날도 그냥 흘려보내려다 아군임을 알리기 위해 태극기를 흔들며 미군기를 환영하였다.

그 순간 익산역 일대를 선회하던 폭격기는 시커먼 무엇인가를 떨어뜨렸다. 그러자 직원들과 민간인들은 낙하산이 떨어진다고 신기해하며 한가로이 담소를 나누었다. 그러나 담소를 나누던 여유로움은 잠시였다. 곧이어 굉음과 함께 엄청난 화염이 이리역 일대를 삼켜버렸다. 말 그대로 불다가 된 이리역 일대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해버렸다.

미군 폭격기는 이리역 일대에 사재하여 작업중이던 기관차는 물론 구내시설에 대해서도 가공할 폭격을 가하였다. 이리역 직원들은 폭격을 받으면서도 적이 아님을 표시하기 위하여 피신할 생각은 하지 않고, 나서서 두손을 저으며 소리소리 외쳤다. 그러나 고도 수천의 상공에 있는 폭격기에 그 소리가 들릴 리 없었다. 생각다 못하여 태극기를 휘두르며 사무소로 뛰어갔던 직원들은 그대로 폭풍과 함께 산산이 흩어졌다.

발악과 함께 어디론가 찢어져가는 육체들은 행방을 찾을 길이 없었다. 지구가 갈라지는 듯한 폭음과 함께 사람들은 어디론지 없어졌다. 미군의 무차별적인 폭격으로 이리역 일대는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었고 당시 이리운전사무소에 근무하던 직원들은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타버리거나 갈기갈기 찢어졌다.

그러나 미군의 폭격으로 인한 피해는 이리역 구내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미군의 폭격은 이리역과 접해있었던 송학동 주변의 50여 채의 민가에도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50여채의 민가에는 일가족, 아니면 자식들을 학교에 보낸 부모들이 일상생활에 전념하고 있었다. 하지만 폭격으로 50여채의 민가는 온데간데 없었고 민간인들은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이리역 일대를 무차별 폭격하여 약 200여명의 사상자를 낸 미군 폭격기는 약 10분 뒤 또 다시 이리역 상공에 나타났다. 그리고 이번에는 변전소와 전라선 철길주변에 집중적인 폭격을 가하였다.

변전소 주변에는 5일만에 우시장이 열려 김제, 군산, 임피 등에서 장을 보러온 수많은 민간인들이 모여있었다. 그리고 전라선 철도옆으로 난 도로를 따라 군에 입대하려는 젊은이들이 김제방면에서 이리역을 향해 변전소 옆을 걷고 있었다. 2번째 폭격으로 장에 모여있던 사람들과 군에 입대하려던 청년들 약 100여명이 그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미군 폭격기에 의한 양민들에 대한 무차별적인 학살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이리역과 변전소 주변에 가공할만한 폭격을 가한 4일 후 익산역 일대의 상공에는 일명 '호주기'라 불리는 미 공군소속의 전투기 4대가 나타났다.

전투기들은 편대비행으로 익산역 상공을 상회하며 일대를 살폈다. 그러던 중 갑자기 또 다시 기수를 아래로 돌려 저공비행을 하면서 폭격으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고 있던 사람들과 무고한 양민들을 향해 로켓포를 쏘고 기총소사를 가하기 시작하였다.

갑자기 시작된 고막을 찢는 듯한 총소리와 폭발소리에 놀란 사람들은 겁에 질려 앞뒤, 장소와 방향을 가리지 않고 사방으로 뛰기 시작하였다. 민간인들을 직접 겨냥한 미군 전투기의 기총소사는 30-40분간이나 계속되었다. 이로인해 또다시 몇 십명의 무고한 양민들이 희생되었다.

익산시가 1999년 12월 현재까지 피해자가 신고접수를 받고 유족회가 자체적으로 조사해 파악한 피해인원은 사망자 78명, 중상자 10여명이다.

향후 정부 등에 의해 광범위한 공식적인 조사가 이루어지다 보면 보다 정확한 피해자의 수가 밝혀지겠지만 당시 피해자들의 증언, 정부와 철도청의 공식문서에 기록된 내용을 종합해 보면 사망자는 신원미상을 포함해 약 400여명에 이르고 부상자는 이보다 훨씬 많은 것임을 예상할 수 있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