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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마이뉴스 이종호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 비서실장을 역임한 신계륜 민주당 의원은 매년 봄 광주 망월동 묘역에 들러 세 분의 묘소에 참배를 한다. 윤상원, 박관현, 그리고 또다른 한 분. 모두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5·18 광주민주항쟁의 주역들이다. 고 윤상원씨는 80년 5월 전남도청에서 계엄군에 맞서 최후까지 싸우다가 희생됐으며 80년 당시 전남대 총학생장이었던 고 박관현씨는 82년 5·18 진실을 알리기 위해 옥중에서 단식하다가 끝내 숨졌다.


신 의원이 이들의 묘소를 찾는 건 이들과의 남다른 인연 때문이다. 박관현씨와는 중학교, 고등학교 동기동창에다 광주고 재학 당시 학생회장 선거에서 경쟁후보로 맞붙을 뻔 하기도 했던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80년 5월 18일 당시 광주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친구 박관현을 만나기 위해 전화를 걸었으나 결국 연락이 닿지 않아 다시는 그의 얼굴을 만져보지 못했다.

고 윤상원씨에 대해 그는 “그 분 자체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내가 본 사람 중에 가장 신념에 찬 대표적인 분”이라고 기억하고 있었다. 특히 그는 윤씨가 전남도청이 진압되기 하루 전날 고등학생들을 모아놓고 ‘너희는 지금 총을 버리고 집으로 가라. 너희들은 싸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너희들이 봤던 것을 기록하라. 너희들이 성인이 됐을 때 싸우라’고 했던 연설문구를 떠올리면 눈물을 감출 수가 없다고 술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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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민들이 군부의 비상계엄 확대조치에 항의하며 일어났던 그해, 신 의원은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이었다. 비상계엄 확대 선포로 1급 수배자로 '찍혀'있던 신 의원은 항쟁 하루 전날인 5월 17일 밤 쉽게 도망치기 위해 고향인 광주로 내려갔다. 5·18 항쟁이 일어났는지조차 알 수 없던 상황에서 뭣모르고 기차칸에 올라탄 것. 그리고는 공수부대에 의해 진압이 완료된 27일까지 약 열흘간 광주 송정리에서 학살의 참혹한 현장을 그의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해야만 했다. 수배조치로 숨어지내야만 했던 그는 시민군의 대열에 직접 참여하지는 못한 것에 대해 여전히 부채감을 갖고 있다.

그런 그에게 5·18 망월동 묘역은 친구의 묘가 자리한 곳이자, 자신의 분노가 묻어 있는 곳이기도 했다. 84년 출소하자마자 갈 데가 없어 가장 먼저 찾은 곳도 바로 망월동 묘역이다. 신 의원은 그곳에서 소주 한잔을 기울이며 ‘올바른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때문인지 화려한 공원으로 변모한 지금의 공원이 그에게는 여전히 여색한 모양이었다. 그는 특히 묘역을 관리하는 소장을 향해 ‘형편없는 사람’이라고 혹평했다. 윤상원씨, 박관현씨 묘소 앞에 쌓여있는 편지마저도 3개월 후에 버려버리는, 역사적 의미를 외국인에게 설명하지도 못하는 관리인들이 마음에 찰 리 만무했다.

신 의원은 아직도 5·18 학살을 주도했던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한 분노를 삭이지 못하는 듯 했다. 전 전 대통령의 측근이었던 허삼수씨를 92년 14대 국회당시 국회 엘리베이터에서 처음 만났을 때 “정말 어떻게 하고 싶었다"며 솔직하게 털어놓기도 했다. 5.18 23주년을 3일 앞둔 지난 15일 저녁 서울 인사동의 한 음식점에서 신의원을 만나

다음은 신계륜 의원과의 일문일답이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 80년 5·18 광주민중항쟁 때 총학생회장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80년 학생회는 특별한 학생회였다. 6년 만에 부활한 학생회이고, 우리가 저항하기 위해 만든 학생회이다. 그 때문에 정식으로 인정을 받지 못한 학생회였다. 특수한 시대였고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학생회였다. 한번 집회를 하면 7000여명이 모였다. 대운동장에서 모일 정도였다. 그런데 그 학생회는 단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 다음부터는 다시 학도호국단으로 바뀌었다.”

- 당시 5월 17일이 마지막 집회였나.
“그날 집회는 없었다. 그것이 비극이다. 14, 15일에 서울역 시위가 있었다. 대다수의 학생회장들이 15일에 철수하자고 해서 그날 밤 이화여대에서 전국학생대표회의가 열렸다. 철수론자들은 단순히 철수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차후에 대책을 논의한다고 설득하려 했다. 그래서 철수했다. 하지만 나는 철수를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시위를 하자고 주장했다. 게다가 전두환씨가 있는 육군본부 앞에서 시위를 해야 한다고까지 했다. 서울에서 과격분자들이 다 모였었다. 17일 오후에 회의장이 급습을 당했다. 군인들이 갑자기 들어왔다. 7시께였다. 반은 도망가고 반은 잡혔다.”

- 당시 어디로 도망갔나.
“이대 학생회관쪽에 2m 높이의 담이 있었다. 넘다 보니까 올라갈 때보다 더 높았다. 그래도 넘었고 그 길을 따라 걸어가다 보니 신촌역이 나왔다. 마침 기차가 하나 있어 그 기차를 타고 도망을 간 것이다. 10여명이 나와 함께 있었는데 아무도 잡히지 않았었다.”

- 그 열차를 타고 광주로 바로 갔다는 건가.
“무조건 도망갔다. 그날 자정에 제주도를 포함해 비상계엄 전국확대가 선포됐다. 그리고는 전국 대학에 군부대가 투입됐고 학교는 전부 군막사가 됐다. 다른 곳에서는 학생들의 저항이 없었는데, 18일 새벽 전남대에서 충돌이 발생했다. 그것이 5·18의 처음이다. 당시 군인들은 진압을 한 것이 아니라 칼로 찔러 버린 것이다. 살육을 저질렀다. 그것도 모른 나는 18일 아침에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광주로 내려갔다. 상황도 접하지 못한 상황에서 광주에 내려보니까 사태가 발생해 있었다.”

- 광주로 내려 간 이유는 집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인가.
“광주로 내려가면 친구도 많으니까 도망가기가 쉬울 거라고 생각했었다. 처음엔 이같은 낭만적 생각을 가지고 갔는데 항쟁을 보고 나서 하루 이틀 동안은 두려움에 떨었다. 사나흘이 지난 후부터는 분노와 격노와 흥분이 생기더라. 아마 시민들도 그랬을 것이다. 너무나 심할 정도였으니까. 진압하는 날(5월 27일) 새벽 1~2시가 되니까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는 방송이 나오기 시작했다. 시민들이 절규하는 소리를 들었던 사람들이라면 그 소리를 듣고 아마도 가슴을 쳤을 것이다. 그들은 비록 밖으로는 나가지 못했찌만 90%는 깨어있었을 것이다. 진압이 종료된 뒤 나를 숨겨준 친구 아버지께서는 ‘큰일났다. 가택수색이 있다고 한다’면서 자신의 차량에 나를 싣고 전남 장성역으로 옮겨주셨다. 그땐 정말 보이는 것이 없었다. 군인들은 학생증과 나를 대조했어야 하는데 수배용 사진과 나를 비교하고 있더라. 당시 나는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알아보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27일 빠져나갈 수 있었다.”

- 그렇다면 광주에 내려간 18일부터 서울로 상경한 27일까지에는 주로 어디에 있었나.
“광주시 광산구 송정리에 있었다.”

- 당시 주변 분위기가 어땠나.
“광주에 도착하니까 사람들이 전혀 없더라. 외출을 하지 말라고 다들 그랬다. 집에 가지도 못하고 나를 숨겨준 친구의 집으로 향했다.”

- 숨겨준 분은 누구였나.
“중학교, 고등학교 친구 박동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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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기서는 시위에 참여하지는 못했나.
“그럴 수가 없었다. 당시 나는 수배 때문에 유명인사가 된 상황이었다. 으슥한 밤에 돌아다니면서 현장을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그런 상황을 목격하고 흥분을 안 하는 사람이 어디 있고, 미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나. 시민들이 맨손으로 계엄군을 때려 죽이는 상황이었으니까. 실제 시민 10여명이 장전하고 있는 계엄군을 손으로 때려 죽이는 상황도 있었다."

- 당시 옥중 단식 중 사망한 고 박관현씨와는 친구라고 들었는데.
"80년 전남대 총학생회장이었던 박관현씨가 동기동창이다. 그 친구가 전남대에 있었는데 만나려고 했지만 19일부터 박관현씨가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하더라. 어디로 가버렸다고. 결국은 죽게 되지만. 그 친구를 만나려고 18일에 연락했었는데 만날 수가 없었다. 친구들에게 연락을 했는데 연락이 닿지 않았다. 내가 박관현씨 책을 썼던 적이 있다. 수배 중이어서 내 이름을 쓰지는 못했다. 임낙현이라는 후배가 있어 그 후배의 이름으로 던 기억이 있다.”

- 밤에만 활동하면서 항쟁의 여파로 시체가 널부러진 참혹한 광경들도 목격한 적이 있나.
“밤이라 제대로 확인하지는 못했다. 기억나는 건 당시 송정리 인근 개울을 건너던 시민군 차량이 있었는데 그날 헬리콥터가 그 시민군 차량을 향해 발포했다는 것이다. 그 때 가장 많은 분들이 돌아가신 것으로 알고 있다. 무기를 싣고 가는 그 차량을 안 되겠다 싶어 쏴버린 것이다. 부서진 차량을 얼핏 확인하고 시민군에 신고했다.”

- 서울로 올라온 뒤에는 주로 어떤 활동을 했나.
“서울에 올라오니까 사람들이 전혀 모르고 있었다. 언론이 너무하다 싶을 정도였다. 진압이 끝난 27일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북한 방송이 오히려 보도를 해 줄 정도였다. 소식을 알아야 하는데 국내 언론은 방송을 해 주지 않았다. 그래서 서울에서 유인물을 만들어 시민들에게 알리는 활동을 주로 했다. 진상을 알리는 작업이었다. 결국 그러다가 체포됐다.

당시 방송에서는 15분 간격으로 수배자 명단이 방영됐다. 내란선동 및 폭력교사라는 혐의였다. 밥도 먹으러 다니지 못했다. 식당에 가서 밥을 먹다 보면 내 얼굴이 TV에 나오는 걸 볼 수 있었다. 이 인사를 숨겨주면 처벌받을 수 있다는 문구도 함께 방영됐다. 처음엔 갈 곳이 없어서 운동권 선배의 집을 찾아다녔다. 그 과정에서 섭섭했던 기억도 있다. 운동권 선배 중의 한 분의 집에 갔었는데 나를 방안에 놓고 부부싸움을 해서 얼른 빠져 나오기도 했다. 매번 그런 식이었다. 그러다가 지금 나남출판사를 하는 조상호씨를 찾아가 나를 좀 도와달라고 했다. 당시 그 분의 부인이 서대문에서 약국을 했는데 나는 그 약국 안쪽에 숨어 지내기도 했다.

- 거기서는 어떻게 생활했나. 밖으로 나다니지도 못했을 것같은데.
“하루는 모 신문사 선배가 나를 만나기 위해 약국으로 왔다. 현재 청와대에 있는 이병완씨이다. 그 선배가 그날 영화를 함께 보자고 하더라. 그래서 그 근처에서 영화를 보러 갔다. 왜 영화를 보러갔는지도 모른채. 하필 그날은 나를 숨겨준 조상호씨 남동생이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귀국하는 날이었는데 그때 약국을 경찰이 습격했다. 나는 영화를 보러가서 잡하지 않았지만 대신 조상호씨 동생이 끌려갔다. 신계륜인 줄 알고. 조상호씨는 나를 누나 집으로 다시 데려갔다. 거기서 한 일주일을 지냈는데 저녁을 먹는 중에 방송에서 내 얼굴이 나왔다. 가정부가 그것을 보고 나를 신고한 것 같아 다시 빠져나와서 고시공부를 하던 친구집으로 은신처를 옮겼다.

그리고는 어느날 이상하게 (잡힐 것 같다는) 느낌이 오더라. 여차하면 창 밖으로 도망가려고 창 밖에 운동화를 내놨었다. 친구의 여동생들이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고 '아차'싶어 창 밖으로 넘어가려는 데 이미 권총이 이마를 겨누고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실탄을 다 장전했더라. 상부의 지시가 '도망가려고 하면 쏘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 체포 당시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혐의가 있었나.
ⓒ 오마이뉴스 이종호
“나는 처음에 수배가 그렇게 돼 있지 않았다. 체포되니까 ‘김대중에게 돈을 받았는가. 서울역 집회에서 철수를 반대했는데 김대중이 시켰다고 말하라’고 했다. 나는 강하게 반대했었다. '김대중이라는 사람을 나는 알지도 못한다'고 말했다. 당시 학생운동 사회에서 김대중과 연계되는 것은 상당히 나쁜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와 관련된 정치인들에 대한 인식도 마찬가지였다. 설훈 등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김대중 내란혐의에 연계된 것은 전체 학생들을 기만하는 행위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나는 죽어도 인정하지 않았었다. 그것이 내가 고문을 버티게 된 동기였다. 그런데 재철이가(현 한나라당 국회의원 심재철) 200만원은 받은 뒤 그 중 50만원을 나에게 건넸다고 고문중에 시인을 했다. 하지만 나를 그사건에 엮지는 못했다. 결국 나는 내란죄에서 빠지게 됐고,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감옥에 들어갔다. 그런데 내란죄를 시인한 사람들은 비교적 짧은 1년만에 가석방돼 나왔다.”

- 체포된 이후에는 어땠나. 이겨내지 못할 정도의 고문을 받았을텐데.
“처음에는 얼마나 맞았는지를 검열까지 하더라. 청와대로 들어가는 헌병대가 있었는데 그들이 검열을 했다. 얼마나 맞았겠는가. 하루는 계엄사의 높은 사람이 검열을 온다고 하더라. 그 때문에 또 얼마나 맞았는지 모른다. 그 분이 누구냐하면 허화평이다. 당시에는 몰랐다. 내가 허화평인지 어떻게 알겠나. 그때 허화평이 나를 보더니 ‘이 젊은 미남 친구를 누가 이렇게 때렸냐’고 했다. 그때 나는 눈물이 날 정도로 고마워했다.

하지만 내가 ‘김대중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라고 했더니 그 인자한 인상이 갑자기 표독스럽게 바뀌면서 ‘저 새끼 죽여버려’라고 했다. 그때 헌병들이 집단구타를 하고 나는 정신없이 맞았다. 나는 그 때 나를 죽이는 줄 알았다. 당시 거기서 죽으면 시신이 38선 인근에 버려졌다. 나도 그렇게 될까봐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었다. 총을 들고 들어올 때마다 소총은 장전은 돼 있는지 옆방에서 숨죽여 그 소리를 듣기도 했다.”

- 결국 김대중의 지시를 받았다고 인정했나.
“끝낸 조서를 쓰지 않았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나는 내란죄에서 빠졌다. 후일 김대중 총재를 만났을 때, 내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지나가는 말로 ‘김대중 내란 음모 훈장 받은 사람 별 것도 아니던데요, 그 사람들이 뭘 잘했습니까, 부인을 했었어야죠, 고문이건 아니건 잘 한 것은 아니던데요’라고 한 적이 있다. 김대중 총재가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겠다. 김대중 총재 야권 통합 운동을 하던 91년 말이었던 것 같은데 그때 처음 김대중 총재를 뵀다.”

- 일부 대학 복학생들은 그때(80년 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자택을 지키려고 하지 않았나.
“설훈 의원은 내 친구지만, 반(半) 정치인이었다. 그 분들은 굉장히 강경파였다. 나에게 압력을 넣으려고도 했다. 당시 학생운동에는 그런 흐름과 그렇지 않은 흐름이 있었다. 당시 나의 시각으로 그것은 불순해 보였다.”

- 5·18 묘역에 가면 세분의 묘역은 꼭 들른다고 알고 있다.
“그렇다. 선배인 윤상원씨와 친구인 박관현, 그리고 알려줄 수 없는 사람이다. 윤상원씨는 나중에 영혼 결혼식을 올렸다. 관현이는 친구니까 가고."

- 망월동 묘역은 지금 신 의원에게 어떤 의미인가.
ⓒ 오마이뉴스 이종호
“84년 1월 출소하던 날 정말 눈이 많이 왔다. 혼자 출소를 했다. 새벽에 나왔는데 갈 데가 없었다. 바로 찾아간 곳이 망월동 묘역이었다. 사실은 지금의 망월동 묘역보다 그때가 훨씬 사실적이었다. 소주 한 잔 먹으면서 올바르게 살아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리곤 매년 그곳을 찾았다. 인천에서 노동운동을 할 때도 갔고, 결혼할 때도 갔다. 마음이 방만해 지거나 하면 그곳을 찾는다.”

- 현재의 망월동 묘역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을 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문제인가.
“알아보니 공원을 광주광역시에서 관리하하는데 소장이라는 분이 형편 없다. 당시 소장에게 일본인이 얼마나 오느냐고 하니까 10만명이 온다고 했다가 1만명이 온다고 했다가 1천명이 온다는 것이었다. 개념이 없는 것이다. 관리하는 사람도 전혀 개념이 없다. 외국사람들은 관리하는 사람이 애정이 있는지 없는지를 처음 느낌으로 알 수 있다고 한다. 관리할 사람을 모집해, 정말 애정이 있는 사람을 뽑는다면 정말 열심히 할 것 아닌가. 그런데 너무 할 정도더라.

그곳에 오는 일본, 태국, 미얀마 사람들이 무척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계조차 되지 않는 것이다. 열성을 가진 분, 그중 외국어에 능통한 통역관을 배치해야 한다. 지금은 거대한 공원이 되어서 특장도 못 살리고 있다. 우리 당원들은 옛날에는 묘역에 가면 펑펑 울었다. 하지만 지금 내려가면 우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 신 의원이 미리 지적을 했다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내 잘못도 있다. 나같은 사람이 찾아가서 문제제기를 했어야 했다. 공원 시설의 이점이 있다. 옛날 시절의 장점을 살리면서 공원과 결합시켰어야 했다. 지금 가보니까 초등학교 학생들이 쉴 나무 한 그루도 없이 땡볕에서 사생대회를 하고 있더라. 공원의 묘를 살렸어야 하는데… 내가 그 생각을 못한 것이 정말 죄송했다.”

- 구체적으로 공원 운영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예를 들어 설명해 달라.
“가보신 분은 알겠지만 묘소 앞에 소녀들의 편지가 가장 많이 쌓이는 곳이 윤상원 선배와 박관현의 묘이다. 전에는 그런 것이 없었다. 공원에서는 그런 편지를 잘 보관해서 좋은 사연이 적힌 글이 있다면 외국사람들도 볼 수 있도록 번역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원 관계자에게 ‘이 편지를 어떻게 하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3개월만 보관하고 버린다고 한다. 그런 좋은 소재를 공원측은 사장시키고 있다.”

- 故 윤상원씨에 대한 생각이 남다를 것 같다. 어떤 기억이 있나.
“나는 윤상원 선배를 한 두 번 봤다. 처음봤을 때 첫사랑을 만난 것 같은 눈빛이 와 닿더라. 사실 이태복씨 보다 100배쯤은 더 훌륭한 사람이었다. 이야기만 들었다. 친구인 박관현의 책을 쓰면서 그분의 행적을 추적했다. 그 분 자체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내가 본 사람 중에 가장 신념에 찬 대표적인 분이었다. 80년 5월 26일 저녁, 윤상원씨가 도청 내에 있던 고등학생들을 불러 놓고 연설을 한 것 있다. ‘너희는 지금 총을 버리고 집으로 가라. 너희들은 싸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너희들이 봤던 것을 기록하라. 너희들이 성인이 됐을 때 싸우라.’너희들은 고등학생이니 죽으면 안 된다면서 우는 아이들은 발로 차서 집으로 보냈다. 그리고는 자신은 사살을 당했다."

- 최근 전두환씨 재산환수 문제 등이 사회적 이슈로 대두되고 있다. 지금의 전두환씨를 보면 어떤 느낌이 드는가.
ⓒ 오마이뉴스 이종호
“전두환씨를 만난 기억이 있다. 백담사 갔다 온 뒤였다. 내가 국회의원이 되고 나서 한 행사에 왔더라. 내가 조금 늦게 도착했는데 전두환씨가 앉아있었다. 그 분이 나를 알아보더라. 그러더니 순간 놀라는 표정이었다. ‘어휴, 이걸 어떻게 하나’해서 그 분과 악수를 했다. 그리고 그 뒤에 앉았다. 이게 처음 만남이었다.

허화평, 허삼수씨는 14대 국회에서 만났다. 걱정했던 것이 내가 이 분들을 엘리베이터 안에서 만나면 어떻게 할 것인가였다. 그 생각을 혼자만 했다. 별로 안 만나지더라. 그런데 한번은 허삼수씨를 엘리베이터에서 만났는데, 아무도 안보니까 정말 어떻게 해 볼까하는 생각도 했다. 그러자 허삼수씨가 언제 점심이나 하자고 하면서 내리더다. 당시 내 나이가 37살이었다. 그때 참고 나왔는데 맥이 딱 풀리더라. 허삼수와 점심을 먹었는데 무슨 말을 했는지, 왜 점심 먹으러 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단지 기억이 나는 것은 내가 ‘아무리 목적이 정당해도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고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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