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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학생혁명기념탑'과 수호자상
ⓒ 김진석
매년 4월 19일 서울시 강북구 수유 4동 산 9-1번지, 4.19 국립묘지는 활력을 찾는다. 대통령이나 국무총리 등 3부요인을 비롯한 각계 각층의 시민과 학생들이 4.19혁명의 대표적 이미지로 각인된 기념탑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기념사를 읽고 노래를 부른다. 4.19 혁명은 불의나 독재와 타협할 수 없다는 하나의 상징과도 같기 때문이다.

당연히 4.19 혁명은 '친일'과도 공존할 수 없다. 이것은 당시 학생들의 결의문이나 선언서를 보더라도 분명해진다.

"36년을 두고 피 흘려 쟁취한 우리 민주주의가 지금 몽둥이와 총검 앞에서 (고려대), 우리들의 선배는 일제의 사슬에서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피를 바쳤고(동아대), 일제의 철퇴 아래 미칠 듯 자유를 환호한 나의 아버지, 나의 형들과 같이(서울대)"

그런데 왜 우리는 하필 친일조각가가 만든 탑 앞에서 젊은 넋들을 추모해야 하는가. 개인의 출세와 영달을 위해 친일파로, 친독재세력으로 평생을 살아 온 김경승의 작품이 과연 4.19국립묘지에 어울리는가. 왜 우리는 그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때로는 아이들과 역사 공부를 해야 하는가. 이 글은 바로 이러한 문제 의식에서 출발했다.

4.19 국립묘지는 왜 만들어졌는가

1961년 5월 16일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군사정권은 6월 10일 이른바 '재건국민운동에 관한 법률'을 공포하고, 12일 서울운동장에서 국가재건범국민운동촉진대회를 개최한다고 발표한다. 그리고 1962년 3월 23일 재건국민운동본부는 기념탑 건립 위원회를 구성한다. 다음은 '4월학생혁명탑기념탑을 세우며'라는 제목으로 기념탑 좌측 수호자상 뒤편에서 볼 수 있는 글이다.

여기는 1960년 4월 불의와 독재에 항쟁하다가 희생된 185명의 젊은 혼들을 모신 곳이다. 이들의 정신을 길이 받들고자 1962년 3월23일 재건국민운동본부 안에 각계 각층을 망라한 기념탑 건립 위원회를 구성하고, 1962년 11월 21일에 기공하여 전국민의 성금과 국고 보조로 이 공사를 진행하여 오늘로써 제막식을 거행하다. 1963년 9월 20일

재건국민운동본부는 '신생활체제 정착과 국민혁명적 사명 고취'라는 미명 아래, 5.16쿠데타의 불가피성을 국민들에게 주입시킴으로써 박정희 정권의 행동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다.

따라서 재건국민운동본부가 1963년 현재의 위치에 4.19국립묘지를 조성한 이유는 분명하다. 4.19혁명을 떠받드는 모양새를 취함으로써, 정통성 있는 정권처럼 보이기 위한 것. 이는 1973년 11월 11일 세워진 '동학혁명군위령탑' 탑문을 봐도 알 수 있다.

님들이 가신지 80년, 5·16혁명 이래의 신생조국이 새삼 동학혁명군의 순국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면서 빛나는 10월 유신의 한 돌을 보내게 된 만큼 우리 모두가 피 어린 이 언덕에 잠든 그 님들의 넋을 달래기 위해 이 탑을 세우노니 오가는 천만대의 후손들이여! 그 위대한 혁명정신을 영원무궁토록 이어받아 힘차게 선양하라.

한마디로 갑오농민혁명과 4.19혁명 모두 박정희 정권에 의해 능욕 당한 셈이다. 미술평론가 최석태(44.서울민족미술협회 대표)는 '김경승 평론'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재건국민운동본부 본부장 유달영을 비롯한 의원들은 이른바 저명 인사들로서, 보수적인 사람들과 심지어 친일 경력을 가진 사람들도 다수 있었다. 이들은 4.19 관련 사업을 형식적으로나마 치르기 위해 애초 서울 시청 앞에 설치하기로 했던 계획을 데모의 온상이 될 수 있다는 이유로 변두리인 수유리로 설치 장소를 결정했다.

최석태는 오랜동안 일제 시대 작품들을 분석하고, 친일 미술가들의 행적을 추적해왔다. 그는 1993년 '친일미술인백서 발간 소위원회'에 참여했고, 김기창 심형구 윤효중 등의 친일 작품을 발굴하기도 했다. 이제 최석태로부터 김경승이란 인물에 대해 들어볼 차례다.

▲ 최석태 미술평론가는 김경승의 작품에 대해 "작가로서의 절실한 감정이 없으며 굉장히 형식적이다. 우리 정서가 없다"고 비판했다. 사진은 김경승의 수호자상
ⓒ 김진석
김경승은 친일 조각가인가

물론 일본하고 친한 것이 죄는 아니다. 최석태는 우리나라의 경우 인근 나라에 의해 식민지로 전락됐기 때문에, 상황이 특수하고 친일에 대한 규정이 더욱 복잡하고 구별이 어렵다고 한다.

따라서 '친일'이라는 용어가 더욱 섬세하고 다양해야 하며, 우선 순위를 정해 따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김경승은 어떤 스펙트럼에 속하는가.

"잘 사는 집 아들은 친일 안 해도 먹고산다. 생계형인지, 출세형인지 따져 봐야 한다. 김경승은 출세형이다. 중앙일보에 있을 때 1970년대 후반 신문에서 김경승 부부의 인터뷰를 봤다. '왜정 말기 주문 받아 남편은 조각하고 아내는 흙을 다져 주고 그럴 때 너무 보람찼고 기뻤다'는 내용이었다. 최소한의 민족 정체성도 없었던 사람이다. 형 김인승과 함께 형제 친일파다."

김경승(1992년 사망)은 1915년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학교에 다니면서 미술에 소질을 드러낸 김경승 형제는 일본 동경미술학교에 입학한다. 형(김인승)은 유화과, 동생은 조각과. 당시 동경미술학교는 1887년 세워진 관립학교로 일본에서 유일하게 서양 미술을 가르치는 곳이었다.

"동경미술학교는 본과와 선과로 나뉘어 있었다. 교사 자격이 주어지는 본과에는 식민지 민족이 들어갈 수 없었다. 내지(內地)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선과에서는 이론은 하나도 안 가르친다. 실기만 가르친다. 너희들은 기술자다, 혼을 움직이는 사람은 아니다는 것이다. 대신 장학금을 준다. 아주 교묘하다. 김경승도 선과 출신이다."

김경승 형제는 조선총독부가 주최하는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해 본격적인 관록을 쌓기 시작한다. 형제는 각각 네 번을 연속 특선하며 추천작가로 자리 잡는다. 또한 김경승은 회화봉공(繪畵奉公)을 목적으로 탄생한 조선미술가협회에서 간부로 활동한다. 조선미술가협회는 전람회 수익금을 국방헌금으로 바치기도 한 대표적 친일미술단체다.

김경승의 작품에서 시국색이 가장 강하게 드러난 작품이 <제4반>이다. 최석태는 평론을 통해 "젊은 여성이 노동에 맞는 간편한 복장으로 허리에 물통을 차고 한 손에 찍개를 들고 서 있는 모습인데,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애국반원'인 여성이 총후(銃後.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야 한다는 주제)에 나선 모습을 묘사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최석태는 말한다.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저항성이 강한 작품은 입선을 해도 전시되지 않았다. 조선미술전람회는 일본에서 공부하고 오면 입상으로 우대해주고, 친일 작품들을 생산하게 만드는 시스템의 일부분이었다. 김경승은 명백하게 전쟁 동원에 들러리 섰다. 노골적인 친일파다."

김경승은 독재 정권과 유착했는가

▲ 최석태씨는 미술계의 개혁 강성으로 꼽힌다. 그는 1998년 서울대학교 김민수 교수의 재임용 탈락 소식을 접하고 "친일문제를 다룬 사람들이 모두 당사자와 그 제자들의 반발에 부딪치고 미술계에서 따돌림을 받아왔다. 김 교수도 83년 시작된 '친일미술 논쟁'의 연장선에서 희생당한 것 같다"고 주장했다
ⓒ 김진석
현재 4.19국립묘지에서 김경승이 만든 조각은 기념탑, 기념탑 하단 청동 인물상, 기념탑을 감싸고 있는 돋을 새김(부조), 기념탑 전방 양쪽의 수호자상, 중앙 잔디광장 양편 통로를 따라 늘어 서 있는 수호예찬의 비(12개)다. 나머지 조각들은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의 지시로 성역화 공사가 진행하면서 세워진 것이다.

"당시 4월학생혁명기념탑 건립은 대규모 공사였다. 너무 규모가 커서 한 사람이 하기에는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는 거대한 작업이었다. 그런데도 한 사람에게 몰아줬다. 김경승이 독식한 것이다."

김경승은 승승장구했다. 안중근 상, 김구 상, 이순신 상, 맥아더 상등 수많은 인물상과 기념비를 제작했고, 1948년 서울시 문화위원, 1954년부터 10년 동안 홍익대학교 미술학부 조각과 교수로 재직한다. 국전의 심사위원과 예술원 회원으로 조각계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고, 3.1문화상, 문화훈장, 예술원공로상등을 받는다. 다시 최석태의 얘기를 들어보자.

"3.1문화상은 독재정권을 비호하던 친일파들이 많이 받았던 상이다. 김경승은 왜정 때는 일본에게 빌붙었고, 해방된 조국에서는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독재 정권에 붙었다. 전두환 시절에는 동학 성역화에도 참여했다. 10년 동안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에서 일하지 않았는가."

최석태의 표현처럼 '처참한 이야기'다. 박정희 정권에 이어 전두환 정권도 갑오농민혁명을 주목했다. 1983년 전두환 정권은 황토재 전적지 일대 4만5천평 부지에 '황토현 기념관'을 세웠다. 여기에서도 김경승이란 이름을 볼 수 있다. 맨 상투에 두루마기 복장으로 논란을 일으켰던 전봉준 장군 동상(1987)이 그것이다. 평생을 출세와 영달을 위해 달려 온 김경승에게 애초부터 전봉준은 너무나 이해하기 어려운 상대였을 것이다.

▲ (좌)1986년 3월 25일자 중앙일보 기사 (우) 김경승의 전봉준 장군 동상
ⓒ Joins.com
이어 최석태는 특이한 사실 한 가지를 얘기했다. 작품집에서는 볼 수 없지만, 김경승이 이승만 흉상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얼마 전까지 호암미술관 뒤뜰에 있다가 사라졌다고 덧붙였다. 과연 사실일까. 현재 어디에 동상이 있는 지 확인할 수 없지만, 적어도 1986년 3월 25일자 중앙일보는 이와 같은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이승만 박사의 망명 전 저택 이화장에 생전의 모습을 재현한 흉상이 건립, 설치된다. 이 흉상은 원로조각가 김경승씨가 제작한 것으로 이박사의 111회 탄신일인 26일 하오 3시 이화장에 기증된다. 김경승씨가 운남의 흉상을 제작하기 시작한 것은 4.19가 일어나기 전해인 1959년. 그동안 완성을 미루다가 85년 하와이 한인교회에 전신상을 세울 때 얼굴 모습을 참고로 제작됐다. 이박사와 김씨는 퍽 가까왔던 사이다.

두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4.19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이승만 흉상을 만들었던 사람이 '4.19학생혁명기념탑'을 세웠고, 이후 두 차례 '이승만 박사'의 동상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1985년 8월 5일자 중앙일보는 "오는 8월 15일 광복절에 하와이 호놀룰루의 한인교회에 이승만 전 대통령의 동상이 세워진다"며 "원로조각가 김경승씨가 제작한 동상은 몸체 높이가 2m40cm로 왼손에 성경을 펴들고 오른손을 쳐든 한복 두루마기차림의 모습으로 조각됐다"고 전하고 있다.

최석태는 강하게 주장한다.

"4.19탑을 독립기념관으로 보내라"

"5.16 세력이 4.19를 짓밟지 않았나. 그것을 가리려고 성역화 작업 한 것 아닌가. 4.19탑에는 정신이 송두리째 빠져 있다. 4.19혁명을 대표하는 형상이라 전혀 볼 수 없다. 그런데도 교과서에도 실려 있고, 4.19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아닌가. 그것 만든 사람부터 잘못됐는데, 정말 바로잡아야 한다. 창피스럽다."

작년 4.19 기념식에서 이한동 국무총리는 "4.19혁명은 이 나라의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불의와 부정, 독재 정권의 횡포에 맞서 싸웠던 민주시민혁명이자 민권수호운동"이라고 규정했다.

아마 올해도 이와 비슷한 기념사가 되풀이되고, TV와 신문은 '4.19학생혁명기념탑'앞에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그리고 내년에 우리 아이들은 거만한 탑을 4.19와 함께 떠올릴 것이다. 언제쯤 우리는 친일과 독재의 최면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최석태는 주장한다.

"식민지 경험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했고, 정신적으로 독립 국가 아니다. 이제는 청산해야 한다. 4.19 탑은 철거돼야 한다. 아니, 아니. 독립기념관으로 보내야 한다. 친일 작가들이 이렇게 동상을 만들었다는 증거로, 친일 유물로 놔둬서 우리 아이들이 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 김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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