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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종로구 평동 166번지. 이른바 ‘서대문 경무대’라고도 불렸던 이기붕의 집이 있던 곳이다. 현재 4·19혁명기념도서관이 들어서 있다.
ⓒ 권기봉
중간고사가 얼마 남지 않은 지금, 대학가는 온통 ‘4·19 마라톤’ 이야기다. 4·19혁명의 의미를 되새긴다는 의미로 하는 것이라는데, 젊음이 좋긴 좋은가 보다.

그러나 만개한 목련이나 라일락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듯 지금으로부터 40여년 전인 지난 1960년 4월 11일, 한국에서는 정말 ‘승만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눈에 최루탄이 박힌 김주열(金朱烈; 마산상고 1년)의 시체가 마산 중앙부두 200m 앞바다에서 떠오른 것. 그냥 시신이 떠오른 것이라면 모르겠지만 어린 학생의, 그것도 눈에 최루탄이 박혀 있었다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 난동의 배후에 공산당이 있다”

1950년대 한국의 풍경은 혼란 그 자체다. 생활 기반이 전혀 없는 5백만 명의 월남인들과 실업자 증가, 농촌 경제 파탄에 따른 도농(都農)간의 격차로 사람들의 불만은 나날이 쌓여만 갔다. 특히 날로 증가하는 정경유착·부정부패와 미국의 경제 원조 감소에 따른 재정 위기, 만성적인 인플레이션 등은 점차 국민들의 원성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선거 구호가 나왔을 정도라 하니 이미 민심은 이승만 정권을 떠나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게다가 제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2백만표를 얻은 진보당 조봉암을 1959년 7월 31일 공산당으로 몰아 사형시키고, 야당을 탄압하기 위해 국가 보안법을 강제로 통과시켜 버리는 등 정권 연장을 위한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한다.

이외에도 1959년에는 반공청년단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시국 강연회 등에 투입, 반정부 인사 및 민주 인사들에 대한 탄압을 일삼았을 뿐만 아니라 경찰을 사(私)기관화해 자신의 권력을 지키는 데 이용하는 등 ‘힘’을 무기로 정치를 펴나가는 양태를 보인다.

▲ 이기붕이 살기 전에는 환국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위한 사무실로도 이용됐다. 이시영 유동열 김상덕 등이 머물렀으며, 근처 경교장에는 김구와 엄항섭, 수행원 안미생, 안우생, 선우진 등이 머물렀고, 충무로2가의 한미호텔에서는 장준하를 포함한 수행원 전원, 조소앙 신익희 조완구 홍진 황학수 최동오 김원봉 성주식 조경환 김성숙 김붕준 등이 지냈다.
ⓒ 권기봉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대박’은 1960년 3월 15일에 있었다. 총투표자수의 100%에 육박하는 지지율을 얻은 나머지 실제 투표 결과보다 지지율을 낮추어 발표하는 등의 해프닝을 빚어낸 제4대 정·부통령 선거는 대통령 후보 이승만의 러닝메이트로 부통령에 입후보한 ‘이기붕(李起鵬)을 위한 잔치’였다.

당시 제1야당이었던 민주당의 정통령 후보였던 조병옥(趙炳玉)이 선거 직전 위암으로 별세하기는 했지만, 정통령을 승계하는 부통령에 이기붕을 앉힐 필요가 있었기에 자유당이 부정 선거를 감수하게 된 것이다. (총 유권자 수 : 11,196,490명, 정통령후보 이승만 지지표 : 9,512,793표(84.96%), 부통령후보 이기붕 지지표 : 8,220,587표(73.42%))

특히 이 선거에서 집권당이었던 자유당은 공무원뿐만 아니라 온갖 관변단체를 동원해 1) 총 유효 투표수의 40%에 해당하는 표를 사전에 투표했고 2) 혼자가 아닌 몇 명씩 집단으로 투표를 진행하는 등 공개투표를 행했고 3) 야당 소속의 선거 참관인은 배제했을 뿐만 아니라 4) 투표장 내에 완장부대를 동원해 요상한(?) 분위기를 조성했고 5) 야당을 찍을 것 같은 유권자에게는 아예 투표권을 주지 않고 대리 투표를 실시한데다가 6) 야당이었던 민주당 지지표를 무효표로 만들기도 했고 7) 사복경찰관 등을 동원해 투표를 감시했다고 한다. 말 그대로 완전무결한 부정 선거를 행한 셈이다.

▲ 1960년 4월 11일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인양된 김주열의 시체로 눈에 최루탄이 박혀 있는 등 처참함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 사건으로 마산 등 전국 각지에서 반(反)이승만 시위가 더욱 격화된다.
ⓒ 4·19혁명기념도서관
구조적인 문제로 인해 증폭되어 가던 사람들의 불만은 3·15 부정선거를 통해 점화, 서울을 비롯한 대전과 대구, 부산, 마산 등 전국 각지로 번져 시위의 불길이 높이 타올랐다. 4·19혁명의 서막인 셈이다. 특히 마산 앞바다에서 떠오른 김주열의 시신으로 더욱 격화되기 시작한 시위는, 북마산 파출소 부근에서 김용실과 김삼웅, 김이구, 유경옥 등 여러 명이 경찰이 쏜 총에 죽거나 다치는 등 유혈 사태를 몰고 왔다.

4·19혁명 과정에서 2백명 가까이 사망하고 6천명 이상이 중경상을 입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그러나 경찰의 과잉 진압에도 불구하고 시위는 전혀 사그라질 줄 몰랐고, 대통령 이승만은 “이 난동의 배후에 공산당이 있다는 혐의가 있다”는 담화를 발표하는 웃지 못할 촌극을 빚어내기도 한다.

‘몸통’은 하와이로, ‘깃털’은 저 세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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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4월 19일, 분노한 서울 시민들은 이승만이 머물던 경무대(景武臺; 현 ‘청와대’를 가리키는 것으로 ‘경무대’는 그 이전의 이름)로 몰려가지만 역시 경찰의 발포로 수많은 이들이 다쳤다.

그러나 제 아무리 위세가 대단한 이승만이라고 해도 시대의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결국 일주일 후인 27일 이승만은 국회에 사퇴서를 제출, 11년 9개월간 장악해온 정권을 외무장관 허정(許政)에게 넘기고 서울 대학로에 있는 이화장(梨花莊)으로 28일 하야(下野)한다.

▲ 국가보안법 파동에 따른 통행금지 조치가 내려진다.
ⓒ 4·19혁명기념도서관
‘몸통’이 하야 후 5월 29일 하와이로 망명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인데 반해, ‘깃털’의 행방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깃털’ 이기붕과 그의 일가는 4월 25일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는 교수들의 시위로 재개된 학생 시위로 겁을 먹고 6군단 영내로 피신해 있었다.

이 같은 사실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아 “이기붕이 해외로 망명했다”는 등의 설이 떠돌기도 했지만, 결국 경무대 별관에서 이기붕 일가의 변사체가 발견된다. 이 사건을 자결로 간주한 계엄사령부는 “금일(4월 28일) 아침 5시 40분 이기붕씨, 박마리아 여사, 장남 이강석, 차남 이강욱 군은 시내 세종로 1번지 소재 경무대 제36호 관사에서 자결했다.

이들의 유해는 자결 현장에서 검사와 의사의 검시를 마치고 수도육군병원에 안치중이며, 그 진상은 조사 중”이라고 발표한다. 총을 쏜 이는 당시 육군 장교였던 이기붕의 장남이자 이승만의 양자였던 이강석(李康石)으로 알려져 있다.

영욕의 현장에 들어선 도서관

이번에 찾아간 곳이 바로 이기붕이 살던 서울 종로구 평동(平洞) 166번지의 이른바 ‘서대문 경무대’로, 서대문 적십자병원과 강북삼성병원 사이에 위치한 이곳에는 현재 ‘4·19혁명기념도서관’이 들어서 있다.

▲ 1960년 4월 6일, 야당 국회의원들이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 4·19혁명기념도서관
4·19혁명 직후인 1960년 5월 27일부터 ‘4·19 혁명 희생자유족회’가 사무실로 사용하다가 1963년 3월 8일 들어 이기붕이 가지고 있던 재산을 국가가 환수, 4·19혁명 관련 단체에 무상으로 대여함으로써 1964년 9월 1일 4·19혁명기념도서관을 개관하게 되었다. 4·19혁명이 일어난 지 근 4년만의 일이다.

현재의 건물은 1994년 2월 13일 들어 신축한 것으로, 4·19혁명기념도서관을 세운 이유에 대해 ‘4·19혁명 희생자 유족회’ 사무국장 나복순씨는 “4·19혁명으로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희생된 영령을 위로하고, 그 유자녀와 일반 학생들에게 공부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짧았던 행복, 긴 슬픔의 시작

그런데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볼 일이다. 과연 2003년 화사한 봄을 만끽하고 있는 우리에게 4·19혁명이 던져주는 화두는 무엇인지. 정국이 이승만 정권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큰 형’ 미국도 이승만의 퇴진을 권유하기에 이른다. 즉 미국의 한반도 정책이 종전의 직접적인 원조 방식에서 일본과의 협력을 통한 지역 우선 전략으로 바뀜에 따라 이승만 정권은 이전과는 달리 미국의 동북아시아 정책 수행에 걸림돌로 여겨지기 시작한 것이다.

▲ 4·19혁명에 의해 장면 정부가 들어서지만 결국 5·16쿠데타에 의해 민주화 열망은 분쇄된다.
ⓒ 4·19혁명기념도서관
결국 정권을 물려받은 허정이 내각제와 양원제로 개헌한 뒤 7월 29일 실시한 총선에서 민의원과 참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이 승리하고 민주당 출신 윤보선이 대통령으로, 장면이 국무총리에 오르게 된다다.

그러나 미국식 민주주의를 표방했던 새 정부는 지리멸렬한 모습을 보이게 되고, 결국 뒤를 이은 것은 만주군 장교 출신 박정희에 의한 5·16 군사쿠데타였다. 이로써 4·19의 행복했던 꿈은 처절하게 파괴되기에 이른다. 1961년 박정희의 집권 이후 한국은 기나긴 세월 동안 암흑기를 보내게 되고, 물론 4·19의 과실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기붕 집터' 찾아가는 방법
현재 <4·19혁명기념도서관>이 들어서 있어

지하철을 이용한다면 찾아가는 길이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에서 하차한 후 강북삼성병원 쪽으로 걷는다. 지하철역과 강북삼성병원의 중간쯤에 4·19혁명기념도서관이 왼쪽으로 보일 것이다.

한편 <인터넷 ‘4·19혁명기념도서관’ http://library.419revolution.org>에 찾아가면 각종 동영상과 사진 등의 자료를 볼 수 있다.
너무나 화사해 쳐다보기만 해도 황홀하던 벚꽃이 하나둘 꽃잎을 떨구기 시작하는 지금, 1960년 4월 중순에도 새하얀 벚꽃은 전국을 하얗게 수놓았을 것이다. 물론 당시 4·19혁명의 대열에 함께 했던 이들에게 있어 벚꽃과 목련의 화려함, 라일락과 청매화의 향기는 사치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교내가 4·19 마라톤 이야기로 시끌벅적한 요즘, 만개한 봄꽃들을 보며 40여 년 전을 상상해 본다.

▲ 4월 28일 아침 5시 40분 이기붕과 박마리아 여사, 장남 이강석, 차남 이강욱이 경무대 제36호 관사에서 자결한다.
ⓒ 4·19혁명기념도서관
▲ 이화여대생들이 이기붕의 집에서 미국 대사와 미군 장성 앞에 서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 4·19혁명기념도서관
▲ 1960년 7월 23일, 정부는 남산에 있던 이승만 동상을 철거하기로 결정한다.
ⓒ 4·19혁명기념도서관
▲ "고문경찰 처벌하고 연행 학생 석방하라"고 외치는 마산의 여고생들
ⓒ 4·19혁명기념도서관
▲ 매표 공작의 증거들
ⓒ 4·19혁명기념도서관
▲ 버려진 권리행사
ⓒ 4·19혁명기념도서관
▲ 여기가 투표함인가?
ⓒ 4·19혁명기념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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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찾아 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저서로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알마, 2008), <다시, 서울을 걷다>(알마, 2012), <권기봉의 도시산책>(알마, 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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