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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라는 말은 일제 때의 조어(造語)이며 본디 우리말로 '범'이라고 했던 것을 일제가 범과 늑대 같은 맹수를 잡으면서 총칭하던 '호랑(虎狼; 범과 이리)'이라는 말이 범을 대신하게 되었다는 얘기가 있다. 과히 틀린 말은 아닌 것도 같은데, 하지만 알고 보면 딱히 옳은 설명이라고 하기는 매우 어렵다.

호랑이의 어원(語源)이 그러한 뜻에서 온 것은 분명하나 이미 조선시대 이전의 문헌에서 그것을 '虎狼(호랑)'이라고 표기한 사례가 두루 보이는가 하면, 원래 '범'이라는 말도 '표(豹)' 즉 표범을 가리키는 것으로 엄밀하게 말하면 호랑이와는 구분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지적도 있는 까닭이다. 그러한 만큼 일제가 범을 호랑이로 바꾸어 불렀다고 설명하는 것은 어쨌거나 적절하지는 않아 보인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러한 호칭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식민통치시대를 거치는 동안 이 땅의 호랑이가 완전히 절멸상태로 치닫게 되었다는 사실이 아닌가 싶다. 불과 한두 세대를 거슬러 올라가던 때만 하더라도 이 땅에 쌔고 쌨던 것이 바로 호랑이였거늘 어찌 된 일인지 식민통치의 종식과 더불어 '거의' 자취를 감추었던 것이다.

▲ 카이젤 수염의 서 있는 남자가 이른바 '야마모토정호군(山本征虎軍)'을 조직한 야마모토 타다자부로(山本唯三郞)이고, 그 옆에 앉아있는 이는 조선인 포수 최순원(崔順元)이다.
돌이켜보면 하루가 멀다하고 호환(虎患)에 관한 얘기가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던 시절이 있었으니 그때는 정말이지 호랑이가 한갓 박멸되어야 할 맹수에 불과했던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호피(虎皮)니 호골(虎骨)이니 하여 호랑이 자체가 돈 덩어리였을 테니까 누군가의 치부를 위한 수단이 되어 사라져갔던 것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그렇더라도 어찌 호랑이가 그저 해수(害獸)의 하나에 불과했었겠는가?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조선의 역사와 생활 속에 늘 함께 녹아있던 호랑이가 아니었던가 말이다. 그런데 일제시대를 거치는 동안 호랑이의 수효가 급격히 줄어들고 희생된 데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그 궤적을 따라 죽 올라가다 보면 아주 특이한 존재 하나를 만나게 된다. 이름하여 '야마모토세이코군(山本征虎軍)'이라는 것이 있었다.

호랑이 사냥에 나선 미국원정대도 있었다
결국 호랑이 두 마리 잡는데 성공해


야마모토 정호군이 함경도 일대를 온통 들쑤시고 간 때로부터 정확히 10년의 세월이 흐른 뒤 이번에는 미국원정대가 이 땅에 나타났다. <매일신보>에는 이에 관한 기사가 두어 군데 수록되어 있다.

우선 <매일신보> 1927년 9월 23일자 '호랑이 잡는다, 미국탐험대(米國探險隊) 내선(來鮮), 아세아에 온 길에 온다' 제하의 기사는 이러했다.

"미국 가주(加州) '로스안젤스' 아세아탐험대장 '와드· 에스· 리드' 씨 일행은 8월 31일 상항(桑港)을 출발하여 만주(滿洲) 및 조선방면에 동식물의 채취를 할 터이라는 전보가 총독부 외사과에 들어왔다는데 일행은 내지에 도착하여 조선과 만주를 탐험할 터이나, 특히 조선에서는 범(虎)의 표본을 채취하기 위하여 범 사냥을 할 터이라더라."

그리고 <매일신보> 1927년 12월 19일자 '온성(穩城)서 대호(大虎)를 잡아, 미국탐험대의 호랑이 사냥' 제하의 기사는 이렇게 적고 있다.

"11월 상순에 스물 일곱 마리의 사냥개를 데리고 함경북도로 호랑이 사냥을 오게 된 미국인 아세아탐험대장(亞細亞探險隊長) '리드' 씨의 일행은 눈 깊은 국경의 온성을 중심으로 호랑이 사냥을 시작하여 호랑이 두 마리와 표범 한 마리를 잡았다는 정보가 경성 미국총영사관에 포착되였는데 이 세 마리의 호랑이를 잡기에 사냥개 네 마리를 죽이였으나 그러나 외국인으로 호랑이 사냥에 성공하기는 '리드' 씨가 처음이라더라."

결국 두 마리의 호랑이는 또 그렇게 희생되어 이 땅에서 사라졌다. / 이순우
1917년 11월 12일에 부산항에 당도하여 그해 12월 6일에 이 땅을 떠나가기까지 호랑이를 잡겠다고 보름 가량 주로 함경도 방면의 산악을 두루 들쑤시고 다닌 '호랑이원정대'가 그것이었다. 이들 무리를 이끈 사람은 일본 고베(神戶)가 근거지였던 쇼쇼요코(松昌洋行)의 주인으로 대실업가(大實業家)였던 야마모토 타다자부로(山本唯三郞)라는 인물이었다.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긴 하지만 그가 거금을 들여 원정대를 이끌고 느닷없이 조선 땅에 나타난 데는 한 가지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듣자 하니 "근래에 점점 퇴패하여 가는 우리 제국 청년의 사기(士氣)를 고발(鼓發)하기 위하여 칠, 팔 만원의 큰돈을 들여 이 같이 장쾌한 행동을 하는 것"이란다. 그리고 <매일신보> 1917년 11월 3일자에는 이 즈음의 상황을 이렇게 그려놓고 있었다.

"삼백여 년 전 임진란에 일본군의 선봉장 가토 키요마사(加藤淸正)가 추위를 피하여 북관에 큰 군사를 머무르게 하고 있을 때에 군사의 용기가 저상함을 두려하여 사기를 진흥시키는 한 방책으로 대규모의 범 사냥을 계획하고 자기가 선봉으로 나서서 먼저 송아지 만한 큰 범을 거꾸러쳐서 과연 쇠약하던 군대의 기세를 다시 떨치게 한 이야기는 삼백 년래(年來) 일본 소년의 귀에 젖도록 깊이 배여서 내지(內地)사람은 조선의 범사냥이라면 가토 키요마사의 옛일을 생각하고 비상히 장쾌한 일로 여기며 또한 매우 깊은 흥미를 가지고 있던 터인데..."

때는 1917년이었다. 말하자면 세계대전(世界大戰)의 와중이었다. 암울한 시대상황과 경제침체를 호랑이 사냥에서 그 돌파구를 찾아나가려 했던 것이다. 분명 제 딴에는 기발한 착상이기는 했을 테지만, 조선의 호랑이가 기껏해야 일본 청년들의 사기진작용으로 희생되어야 할 운명이라는 것은 분명 도가 지나쳐도 한참 지나쳤다.

어쨌거나 호랑이 사냥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런데 여기에 또 한 사람의 든든한 후원자가 있었다. 두 번째 조선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가 바로 그였다. 다시 <매일신보> 1917년 11월 14일자 '정호군의 총대장 야마모토씨 입경' 제하에 하세가와 총독의 속내를 읽을 수 있는 기사 하나가 실렸다.

▲ 야마모토정호군이 영흥역에 내려 최초로 포획한 표범이다.

▲ 신창(新昌) 지역에서 사살한 두 마리의 호랑이 앞에 둘러선 야마모토정호군 일행의 모습.

▲ 전라도 쪽으로 진출한 야마모토정호군 '분대(分隊)'가 사냥한 표범이다. 당시 신문기사에는 전남 화순(和順)에서 호랑이 한 마리를 포획했다는 보도가 있었으나 이 사진자료로 미루어보아 희생된 것은 호랑이가 아니라 표범이었던 듯싶다.

"그리고 떠나기 전일 테라우치(寺內) 수상의 소개로 하세가와 총독과 만났지요. 그래서 이번 호랑이 사냥계획을 말하고 각하의 관내를 요란케 할 터인즉 미안하다한즉 총독은 '매우 재미있는 일이오. 실상은 내가 한번 하여보려 하였더니 그대에게 먼저 아이였노라. 아무렇든지 마음대로 소요를 필대로 피고 잡기도 많이 잡아 가지고 오라'고 하더옵디다."

이는 야마모토가 동행기자들에게 자랑삼아 털어놓은 내용이었다.

조선총독의 그러한 언질이 있었던지라, 본대(本隊)는 함경도 방면으로 떠나고 또 전라도 방면에도 분대(分隊)를 꾸려 파견했던 야마모토 일행은 그 후 거침없이 조선의 산하를 누볐고 또 그들이 당도하는 곳마다 성대한 환영행사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 역시 총독의 위세와 전혀 무관하지는 않았을 법하다고 여겨진다.

여하튼 이들의 행적에 대해서는 <정호기(征虎記)>(1918)라는 사진첩이 남아 있고 또 당시의 신문지상에 대서특필 된 바 있었으니 굳이 마음만 먹자면 세밀한 내역을 파악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 <매일신보> 1917년 11월 4일자에 수록된 사진자료. 안타깝게도 야마모토정호군의 선봉에는 조선인 포수들이 있었다. 사진 속의 호랑이는 강용근(姜龍根)과 이윤회(李允會) 포수가 그해 봄에 사냥한 것이라는 설명문이 보인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사실만은 짚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다. 비록 야마모토정호군이라는 이름이 나붙긴 했지만, 정작 호랑이 사냥의 선두에 나섰던 사람들은 실상 거개가 조선인 포수(砲手)였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그 시절에 이름 깨나 날렸다는 강용근(姜龍根)이나 이윤회(李允會) 같은 포수들이 본대를 이끌었고, 실제로 야마모토정호군에게 호랑이사냥의 개가를 올려준 포수 역시 최순원(崔順元)이라는 조선인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원했건 원하지 않았건 간에 조선인 스스로 그네들의 사기진작에 단단히 한몫을 한 꼴이 되었지 않나 싶다. 그들의 협조가 있었던 탓인지 야마모토 정호군은 두 마리의 호랑이를 포함하여 다수의 표범과 곰과 멧돼지와 노루 등 사냥감을 잔뜩 기차에 싣고 그해 12월 3일에 경성으로 귀환했다. 겨우 두 마리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짧은 기간 내에 이룬 성과치고는 대단한 것이었다. 어쨌거나 그들의 거침없는 행태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야마모토정호군이 해산식을 겸하여 조선호텔에서 만찬식을 개최한 것은 12월 5일이었다. 출정환송회 때와 마찬가지로 야마가타 이사부로(山縣伊三郞) 정무총감 이하 행세 깨나 하는 작자들이 두루 참석한 이 자리에서 사냥감들은 당연히 이들의 맛보기로 제공되었다. 거기에는 호랑이 고기도 포함되어 있었다. 제 아무리 시절이 그러한 때라고 할지라도 호랑이 고기를 시식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엽기적(獵奇的)인 일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 야마모토정호군을 수행한 기자단의 기념서명첩이 <정호기(征虎記)>(1918)의 말미에 하나 붙어 있다. 오른쪽 상단부에 야마모토가 서명한 글씨가 보이고, 나머지에는 호랑이원정대를 따라다닌 신문사들의 이름이 빼곡이 들어있다. 말하자면 그만큼 이들의 행적은 흥미거리가 되어 세상에 널리 보도되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 '냄새나는' 고기를 먹기 위해 새로운 요리방법을 만들어내야 했을 정도로 꽤나 고심했다는 조선호텔 지배인의 얘기가 있고 보면, 호랑이고기를 만들어내는 것이나 먹는 것이나 다들 처음이기는 마찬가지였던 모양이었다. 이들의 엽기적인 호육시식회(虎肉試食會)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이로부터 보름 뒤 일본 동경의 제국호텔에서 그대로 재현되었다.

이 자리에 참석한 고관대작을 비롯한 권세가들은 식민지 조선의 호랑이 고기를 씹으면서 어떠한 감흥을 느꼈을까? 이런 것이 식민통치의 달콤한 맛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아니면 위대했던 선조 가토 키요마사의 용맹을 기릴 수 있는 별미 중의 별미라고 생각했을까?

조선의 호랑이는 그렇게 하나씩 사라져갔던 것이다. 단지 사람을 해치는 맹수여서가 아니라 이른바 '제국청년'의 기상을 한껏 드높일 수 있는 전리품의 하나였기에...

"호육요리(虎肉料理)를 상(嘗)하면서 주객이 즐겁게 놀았다"
<매일신보> 1917년 12월 8일자 보도 기사

정호군개선연회(征虎軍凱旋宴會)는 이미 기재한 바와 같이 (1917년 12월) 5일 오후 다섯 시 반부터 조선호텔에 개최하였더라. 내빈으로는 야마가타 정무총감 이하 각부장관, 귀족, 각 은행 회사 중역, 신문기자 등 유수한 관민 백여 명과 주인 측으로는 이번 정호군 일행이 전부 참가하여 담화실에서 잠깐 휴게한 후 오후 여섯 시에 청아한 피아노 소리와 한가지 식당으로 들어가 이번 사냥에 얻은 호, 표, 산도야지, 노루 등속으로 특별히 만든 요리로 주객이 입맛을 다시며 호랑이 고기는 생각한 바 보다 맛이 참 훌륭하다고 모두 맛있게 먹는 모양이오. (중략)

이번 호랑이 고기로 요리를 만들기에 매우 고심하였다는 조선호텔 지배인의 이야기를 들은즉 항용 호랑이 고기는 '냄새가 나서' 먹지 못한다 하나 무슨 고기든지 잡아서 곧 먹으려면 다소간 냄새가 나는 것이라. 그런데 이번 호육(虎肉)을 요리하기는 먼저 그 냄새를 없이 하기 위하여 더운 방에 하루 동안을 두었다가 후추와 향료를 더하고 백포도주에 담갔다가 버터로 삶은 것이라 맛은 산적보다 담백하고 노루보다 질기며 빛은 도홍색이고 기름기가 산적보다 많다.

여하간 호육요리는 만들어 보기도 처음이오 먹어보기 처음이라. 만들기에는 매우 힘을 들였으나 이번 손님들의 흥미는 모두 이 호육에 집중된 것은 실로 다행이며 또 천하일품의 진기한 요리라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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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년전부터 문화유산답사와 문화재관련 자료의 발굴에 심취하여 왔던 바 이제는 이를 단순히 취미생활로만 삼아 머물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린 것 같습니다. 알리고 싶은 얘기, 알려야 할 자료들이 자꾸자꾸 생겨납니다. 이미 오랜 세월이 흘러버린 얘기이고 그것들을 기억하는 이들도 이 세상에 거의 남아 있지는 않지만, 이에 관한 얘기들을 찾아내고 다듬고 엮어 독자들을 만나뵙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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