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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의 사건으로 남아 있던 '이장형 간첩조작사건'이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 이장형씨
ⓒ 오마이뉴스 공희정
지난 31일 오후 2시 인천지방법원 부천지원 453호 법정에서는 4ㆍ13 총선 당시 민주당 배기선 후보 등 6인의 '허위사실 유포'에 대한 1심 재판이 열렸다.

이날 재판은 지난 선거과정에서 배기선 후보측이 한나라당 이사철 상대 후보에 대해 '고문·조작검사'라고 연설한 것이 현행 선거법상 유죄(허위사실 유포)인지 여부를 가리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이날 자리에는 84년 간첩조작사건의 피해 당사자인 이장형(72)씨가 증인으로 채택돼 증인석에서 눈길을 끌었다. '이장형 간첩사건'은 지난 2001년 인권위 출범과 함께 주목을 끌었지만 공소시효가 만료됐다는 이유로 기각돼 세인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던 사건이다.

'이장형 간첩사건'이란 전두환 군사독재가 한창이던 1984년 6월 이장형씨가 북한을 방문한 뒤 간첩행위를 한 혐의로 체포되어 이듬해 9월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은 당시 서울지검 공안부 이사철 검사가 지휘했고, 고문기술자로 악명이 높은 이근안 경감이 수사관으로 참여했다.

일반적인 간첩사건으로 치부되던 이 사건이 재조명을 받게 된 것은 당사자인 이씨가 1988년 "이근안 경감에게 67일간 악독한 고문을 당했다. 처와 아이들을 똑같이 고문하겠다고 협박에 허위 자백한 것이다"는 내용의 양심선언문을 교도소 밖으로 내보내면서부터다.

당시 천주교인권위원회는 이씨를 면회하고 자체 재조사 활동을 벌인 뒤 '권력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조작됐다'는 결론을 내고 구명운동을 벌였다.

93년에는 제주도 지역주민과 천주교 신자 3600여명이 연대서명해 무죄석방탄원서를 법무부에 제출하기도 했다.또 그 해 6월에는 후원모임까지 결성돼 새로 출범한 김영삼 정권에 그의 석방을 호소했으나 소용없는 일이었다.그리고 아직까지도 이씨의 혐의는 벗겨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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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혀지지 않은 진실, '이장형 간첩조작사건'

"대공수사를 마치고 만난 이사철 검사는 내 호소를 들어줄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경찰에서 고문당한 사실을 말하고 살려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 검사는 대공분실에 전화해 '어떻게 된 거야. 방북 및 간첩행위를 부인하는데 다시 조사하라'고…. 겁을 먹은 저는 이 검사에게 다 인정할 테니 대공분실로만 보내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고 서기가 작성한 조서에 서명한 겁니다…."

31일 재판에 나서 당시 상황을 증언하던 이씨는 이사철 전 의원과 관련된 진술을 하던 도중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70살 노인의 두 눈에는 눈물이 고였고 목소리는 이미 메어 있었다.

군 전역 후 몇 차례 일본을 방문해 사업구상을 하고 있던 이씨가 영문도 모른 채 처음 연행된 것은 84년 6월15일.그는 조총련계인 숙부를 일본에서 만났다는 이유로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로 영장도 없이 끌려가 67일 동안 고문기술자 이근안씨에게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이근안은 제가 강제 연행된 날 저녁부터 7일 동안 1500W의 전등을 밝혀 잠을 안 재우고 목각으로 저의 온몸을 폭행했습니다. '너의 목숨은 내 손에 있다'는 식으로 물 고문, 칠성판고문, 전기고문 등 살인적 고문이 이어졌습니다…."

▲ 이장형씨
ⓒ 오마이뉴스 공희정
이씨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차분하게 다음 말을 이어갔다. 특히 자신이 고문을 당한 상황을 생생하게 전달할 때 일부 방청객들은 고개를 숙이기도 했다.

"이근안은 저를 발가벗긴 채 '칠성판'에 묶어 놓고서 수건을 입에 틀어막고 코에 물을 붓고 손과 발바닥을 닥치는 대로 마구 때렸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수단으로 발가락 사이에 전기선을 감고서 전기가 흐르게 하는 전기고문을 가했습니다."

이씨는 혹독한 고문 가운데서도 자신에게 씌워진 간첩행위를 부인했지만 처자식을 자신과 똑같이 고문을 한다는 말에 결국 굴복했다고 말했다.

"1개월 가량 되었을 즈음에 어느 날 안가에서 여자의 비명과 울음소리가 들렸는데 이근안은 자기 말을 듣지 않을 경우 저의 처와 딸을 데려와서 제가 보는 앞에서 똑같이 고문하겠다고 협박했습니다. 결국 그가 바라는 대로 허위자백을 하여 조서를 만들게 된 겁니다."

간첩사건, 85년 26건 최고

70년대 이전까지 간첩사건들은 남파간첩사건이 대부분이었으나, 70년대 이후에는 총련(재일조선인총연합회) 관련 간첩사건이 주를 이룬다. 사건의 성격도 남북어부사건, 구미유학생사건 등 다양해진다.

이는 7·4남북공동성명 등으로 남파되는 경우가 드물게 되자, 정권유지 차원에서 총련계 재일동포와 친인척 관계나 교류가 있는 사람들을 간첩으로 내 몬 것이 대부분이다. 이장형 씨도 일본에 총련 활동을 하는 숙부가 있었다.

간첩사건은 3선 개헌으로 온 나라가 들끓었던 69년에 15건, 박정희와 김대중이 맞붙은 대선이 있었던 71년에 11건, 유신이 선포된 74년에 10건, 12대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던 85년에는 26건이 일어났다.
결국 고문에 못 이긴 그는 숙부의 지령을 받아 73년부터 82년까지 20여 건의 군사기밀을 탐지해 보고하고 82년 북한을 방문했다는 혐의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그의 '화려한' 군 경력은 오히려 고스란히 간첩혐의를 뒤집어쓰는 데 이용됐다.

이씨는 6·25 때 해병대 장교로 참가해 금성무공훈장을 받았으며 73년 말 고산지역 예비군 중대장이 된 뒤에도 대통령과 국방부장관, 해병대 사령관 표창 등 각종 표창을 받았다.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그가 어느 날 간첩으로 둔갑한 것이다.

이씨는 간첩혐의로 구속기소 됐고, 1심 법원에서 방북이나 간첩행위 등이 사실이 아님을 주장했지만 무기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항소심이 열렸지만 기각됐다.

15년간의 억울한 수형생활을 하던 이씨는 1998년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 실시된 8·15 특사 때, 간첩혐의와 형은 그대로인 채 가석방이라는 형태로 겨우 감옥에서 풀려났다. 그러나 당시 이근안으로부터 받은 살인적 고문으로 인해 20년이 지난 지금도 정맥류 파열 후유증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법원은 논리에 사로잡혀 진실을 외면하고 있다."

70·80년대에는 의혹투성이인 '간첩사건'이 줄을 이었다. 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당시 증거로 제시되는 것들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적게는 수십 일, 길게는 1백여 일이 넘는 장기 불법구금과 가혹한 고문 끝에 받아낸 '자백'이 바로 그것이다.

김대중 정권 출범 이후 '70·80년대 조작간첩 사건'의 연루자들은 모두 감옥에서 풀려났지만, 의혹까지 풀린 것은 아니다. 진실을 규명하고자 하는 관련자들의 노력도 끊이지 않고 있지만 이러한 진실 찾기는 많은 어려움에 봉착해 있다.

공소시효가 지난 사건에서 확정판결로 고문을 증명한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다. 법원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형식논리만을 앞세워 간첩조작 사건과 관련한 재판을 기각하고 있다.

이장형씨는 지난 2000년 7월 고문기술자 이근안 씨를 독직가혹행위 등의 혐의로 검찰에 고소했지만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공소권 없음' 처분을 받았다. 또 1980년 '가족 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15년을 복역한 신귀영씨 사건도 1·2심 재판부는 모두 재심을 받아들였으나, 대법원에서 기각한 바 있다.

당시에는 피의자로서 최소한 보장받아야할 인권조차 보장받지 못한 상태에서 간첩으로 낙인찍혔고, 현재는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책임자 처벌은 물론 명예회복까지 가로막혀 있는 것이다.

이씨는 지난 31일 재판의 마지막 증언을 통해 이렇게 목소리 높였다.

"진실은 영원히 감추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희망을 버리지 않는 한 진실은 언젠가 밝혀질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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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같은 남자. 산소같은 미소가 아름답다. 공희정기자는 오마이뉴스 대학기자단 단장을 맡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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