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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허 저놈 봐라 낯짝 하나 더 붙었다
유들유들 숫기도 좋거니와
산 같이 높은 책상 바다 같이 깊은 의자 우뚝나직 걸터 앉아
쥐뿔도 공없는 놈이 하늘같이 높이 앉아
한손은 노땡큐 다른 손은 땡큐땡큐
되는 것도 절대 안 돼 안 될 것도 문제없어
책상 위엔 서류뭉치, 책상 밑엔 돈 뭉치
높은 놈껜 삽살개 낮은 놈엔 사냥개라
공금을 잘라 먹고 뇌물은 청해 먹고…


▲ 1960년 <사상계> 사무실에서의 장준하. 1953년 4월 국민사상연구원 기관지인 <사상>을 인수한 장준하는 <사상계>로 제호를 변경, 본격적인 월간 종합교양지를 선보인다. 장준하와 <사상계>는 이승만과 박정희 등의 독재정권에 맞서 싸우는 양심 세력의 대변자 역할을 맡는다.
ⓒ 장준하기념사업회
김지하가 쓴 <오적(五賊)>의 일부다. 모를 사람이 없을 <오적>은 잡지 <사상계(思想界)> 1970년 5월호를 통해 사회를 좀먹는 ‘공공의 적’으로 재벌과 국회의원, 고급 공무원, 군 장성, 장차관 등을 지목해 비판함으로써 특히 군사 정부에 일격을 가했던 시다. 총칼로 정권을 잡았던 이들답게 군사정권은 이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고, 시를 실은 잡지 <사상계(思想界)>를 폐간 처분하고 김지하와 발행인 부완혁 등을 구속하기에 이른다.

제3공화국 당시의 언론 상황은 실로 암울하기만 했다. 만주군 장교 출신 박정희는 합법적으로 출범한 민주당 정권을 겨우 1천6백여 명의 군인으로 접수, ‘반공’과 ‘경제 건설’‘구악척결’ 등을 기치로 국정을 농단하기 시작한다. 이른바 5·16 군사 쿠데타와 이후 벌어진 10월 유신이다. 이들에게 있어 정통성이란 그저 남의 나라 이야기에 불과했던 것만큼 폭력 정치와 언론 통제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장준하, 박정희와 맞짱 뜨다

▲ 장준하는 1962년 8월 ‘막사이사이상’ 언론문학부문을 수상한다. 상을 받고 필리핀에서 귀국한 직후 찍은 이 사진에서는 그의 웃음만을 볼 수 있지만, 박정희와의 갈등으로 웃음은 쓴 웃음으로 변해간다. 특히 유신을 선포한 박정희는 1974년 1월 긴급조치 제1호를 발동, 첫 대상자로 장준하와 백기완을 구속하는데 비상 군법회의는 그에게 15년 징역형을 선고한다
ⓒ 장준하기념사업회
그런데 이에 굴하지 않고 시쳇말로 ‘맞짱’을 뜨는 인물들도 적지 않았는데 그 중에 한 명 장준하(張俊河)를 보자. 이승만 정권 때부터 자유민주주의를 훼손하려는 시도에 대해 비판을 서슴지 않던 장준하는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자 <사상계> 6월호 권두언을 통해 “5·16 혁명은 우리들이 유성하고 개화시켜야 할 민주주의의 이념에 비추어 볼 때는 불행한 일이요,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며 비판의 칼날을 세운다. 이어 7월호에서는 함석헌의 <5·16을 어떻게 볼까>라는 논설을 통해 더욱 직접적인 비판을 가한다. 끝이 아니다. 이 같은 ‘맞짱’은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군 이동면 도평리 약사봉 계곡에서 57세의 생을 의문사로 마감할 때까지 계속되는데, 특히 1964년과 1965년 <사상계> 긴급 증간호를 두 차례나 발간하면서 한일 ‘굴욕회담’을 저지하는 데에도 앞장선다.

결국 박정희는 1964년 6월 서울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어 8월 26일 서울일원에 위수령을 내리기에 이른다. 그러나 당시 유약하기만 한 ‘볼펜’은 서슬 퍼런 ‘총칼’을 당해낼 수 없었고 결국 한일회담은 성사된다. 그래도 도대체 겁을 모르는지 장준하는 끝까지 굽히지 않는다. <사상계> 1965년 9월호 권두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 해방 직후 상해에서 조우한 장준하와 박정희의 인연은 길게 이어진다. 장준하는 1966년에 이어 1967년 4월 대통령선거 유세 때 “박정희는 월남전에 한국청년의 피를 파는 매혈자”라며 “국가원수로서 자격이 없다”고 비판한다. 결국 장준하는 ‘국가원수모독죄’로 3개월간 옥고를 치른다. 사진은 1967년 4월 대통령 선거 기간 중 국가원수모독죄로 구속된 모습.
ⓒ 장준하기념사업회
“이제 한일수교라는 미명 아래 집정자의 부정과 그 폭력은 최고에 달하고 있다. 배반자의 무리가 도리어 가상할 만한 군상으로 통용되고, 매국하는 자가 스스로 애국하는 자라고 불러도 아마도 그를 탓하지 못하게 되는 것 같다. 이 강산을 흑암으로 뒤덮은 채 그들은 득의양양하고 이에 발분하는 양심의 소리는 너무나 가냘프다.”

군사정권의 앞잡이였던 일부 개인이나 단체는 물론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박정희 숭배(혹은 이용) 분위기가 팽배한 지금, 자기보다 한살 위의 절대 권력자와 겁도 없이 맞짱을 뜨려 했던 인물 장준하에 대한 궁금증은 더욱 커져만 간다. 박정희와 관련된 서적이나 논문은 풍부하다 못해 다 보지도 못할 만큼 넘쳐나는 반면, 그와 대척점에 섰던 장준하에 대한 기록은 <사상계>를 중심으로 설명되는 일부가 전부다. 그러나 개인의 판단 나아가 인생이란 것이 어느 순간 갑자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과거 경험의 영향을 어느 정도는 받을 수밖에 없다고 보았을 때, 이승만이나 박정희 정권 시절 즉 <사상계> 활동 이전의 삶에 대해서도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자료가 그리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서 그래도 어느 정도 궁금증을 풀어줄만한 책이 한 권 있으니 1971년 장준하가 직접 집필한 <돌베개>가 그것.

나라 잃은 인간이 기록한 한없는 서러움

▲ 1975년 10월 장준하의 49재를 맞아 열린 ‘장준하 추모의 밤’에 참석한 함석헌과 이희호, 김대중(앞줄 왼쪽부터).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자 함석헌은 <사상계> 7월호에 실린 “5·16을 어떻게 볼까”라는 논설을 통해 박정희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을 가한다.
ⓒ 장준하기념사업회
<돌베개>는 목사였던 아버지 장석인(張錫仁)과 어머니 김경문(金京文) 사이의 4남1녀 중 맏아들로 태어난 장준하가 1944년 1월 학도병으로 일본군에 자원입대한 뒤 곧 탈출, 중경(重慶)에서 광복군에 가담한 후 1945년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 및 기타 요인들과 함께 한국에 돌아올 때까지 약 2년간의 행적에 대한 기록이다.

개인의 자서전적 성격을 갖는 만큼 대부분의 내용이 내면의 솔직한 이야기를 담으면서 전개되는 <돌베개>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장준하가 일본군에 자원입대한 후 탈출, 중경까지 가는 과정이 처음이고, 중경에서 광복군에 가담해 활동하는 부분이 두 번째, 해방 후 중경 임시정부와 함께 환국해 각종 활동을 벌이는 부분이 마지막이다.

먼저 장준하는 김준엽이나 김영록 등과 함께 중경까지 가는 ‘6천리 장정’에 오른다. 그 과정에서 적군과 마적 등을 만나기도 하고 중국인들의 도움도 얻게 되는데, 당시 장준하와 그의 동지들이 느꼈을 공포를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현대 한국인들에게 있어 매우 흥미로운 대목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 장개석 휘하의 국민당과 중국공산당간의 밀고 밀리는 각축이나 일본군이 중국 전역을 점령한 것이 아니라 그저 철도를 중심으로 하는 ‘점’과 ‘선’만을 장악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장준하의 증언은, 1940년대 중반 중국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 해방 직전인 1945년 8월 중국 산동성(山東省) 유현(維縣)의 어느 사진관에 노능서와 김준엽, 장준하가 차례로 섰다(왼쪽부터). 이들 셋은 학도병으로 참가한 후 일본군 병영을 탈출, 중경 임시정부까지의 긴 여정에 올랐다.
ⓒ 장준하기념사업회
또한 장준하와 그의 동지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줄 알고 도착한 임천(林泉)에서 겪는 체험 역시 한국인들로서는 뜨끔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장준하의 말에 얼마나 과장이 들어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독립운동단체들 사이에 각자의 몸집을 불리기 위한 권력 암투와 이간질, 상호비방이 난무한 결과, 내부에서는 분열이 일어나고 외부적으로는 대량검거 사태 등이 빈발했다는 점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무력 항쟁을 목적으로 모인 군인들이 정작 들고 싸울 무기가 없어 그저 운동장이나 뛰고 산이나 타는 등 ‘체력 훈련’에만 전념했던 모습을 읽고 있노라면 부끄러웠던 역사가 다시 생각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그것이 당시 임천만의 현실이었을 뿐이라고 자위한다면 별 문제가 없겠지만 결국 광복 이후 암살 등을 이용한 권력층 내부의 투쟁이 계속되었고 결국 남과 북이 남남이 된 것을 보면, 그저 무덤덤하게 받아들일 수만은 없을 듯 하다.

이런 난맥상은 중경까지 밀려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던 듯하다. 기나긴 여정을 통해 닿은 중경. 그러나 임시정부 내에서 벌어지는 노쇠한 정치가들의 권력다툼과 실질적인 ‘파워’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미약함, 장준하가 직접 본 임시정부는 실망 그 자체였다. 결국 장준하는 이범석 휘하의 광복군에 가담함으로써 씁쓸한 현실을 돌파해 보려 하지만 광복군이라고 해서 별반 다를 게 없었던 모양이다. 결국 미군의 일본 상륙작전 예비단계로서의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 훈련에 참가하는 것이 그와 동지들이 택할 수 있었던 대안이라면 대안이었다.

▲ 26세의 광복군 청년 장준하. 24세 때인 1944년 1월 학도병에 자원입대해 중국에 배치된 장준하는 채 반년이 지나지 않아 탈영, 임천을 거쳐 중경까지 6천리의 장정에 오른다. 해방 직후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환국한 장준하는 김구의 비서실장과 비상 국민회의 서기 등을 역임하면서 건국사업에 참여한다.
ⓒ 장준하기념사업회
물론 OSS라고 해서 충분한 것은 아니었다. 갑작스런 해방에 OSS를 통한 국내 진공 작전은 시작도 할 수 없었을 뿐더러 해방 직후에도 그저 미군의 결정에 따라 ‘대기 상태’에 머물러 있어야만 했다. 다만 해방 3일 후인 8월 18일 장준하를 비롯한 OSS 단원들이 미군 C-47 수송기를 타고 여의도 비행장에 착륙하지만 아직 무장 해제가 이루어지지 않은 일본군의 방해와 충돌을 원치 않던 미군과 일본군의 타협으로 다시 중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으니, 나라 없는 민중의 설움이 이보다 더할까?

인간 장준하

그러나 아무리 측은한 민족사를 보고 있어도, 아무리 군사정권과 맞짱 뜰 정도로 용감한 사람이 쓴 책이라 할지라도 한계가 있을 수 있다. 자서전이라는 것이 결국은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쓴 것이기에 경우에 따라 자화자찬이나 (이 경우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지만) 자기비하로 흐를 여지가 전혀 없을 수는 없을 것이니 말이다. 일본군 병영에서 탈출해 중경까지 가는 과정이나 광복군으로서 활동하던 때의 용감무쌍한 이야기를 읽고 있노라면 때때로 ‘이게 정녕 사실일까?’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물론 글을 쓰는 과정에서 과장이나 비약이 완전 배제되기 힘들었을 수도 있겠지만 다소 아쉬운 것은 사실이다.

▲ 장준하 / 돌베개 / 세계사 / 2001 / 9,000원
ⓒ 권기봉
한편 해방 뒤 환국한 이후의 이야기 부분에서는 지나치게 자신과 그가 속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유리한 발언들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해방 직후 당시 민중들의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던 여운형을 두고 “여운형이 박헌영에게 이용되고 있다”는 식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그 판단 근거는 찾아볼 수는 없었다. 친미반공주의와 이후 민족주의 성향을 보였던 장준하. 그의 사상적 편향성을 두고 목사 집안의 자식이고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자랐기에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설명하는 이들도 있지만, 명확한 인과관계는 발견하기 힘든 것 같다.

지엽적인 의문 하나 - 그는 왜 자원입대 후 바로 탈영했을까?

여기서 잠깐, 책을 읽으며 별로 대수롭지 않은 문제가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일본 동양(東洋)대학 예과를 거쳐 일본신학교를 졸업한 장준하는 24세가 되던 1944년 1월 학도병으로 자원입대한다. 그런데 장준하는 왜 아무도 가기 싫어하던 학도병에 자원입대했을까? 그는 말한다. 자신이 학도병으로 자원입대한 이유는 단지 “나의 집안에 닥칠 불행을 예감했기 때문에 그 방파제로서 나를 스스로 설득시킨 결과”라고. 태평양 전쟁 말기 악랄해질 대로 악랄해진 일본이었기에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이유로 보인다.

그런데 시원치가 않다. 장준하는 일본군에 자원입대 지 반년만인 1944년 7월 7일 병영을 탈출, 6천리 먼 길을 걸어 중경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까지 갔다. 아예 입대를 하지 않았다면 몰라도 일단 입대했다가 몰래 탈출하면 가족들에게 오히려 더 큰 피해가 미칠 것이 분명할 텐데, 그는 애초의 학도병 자원입대 이유를 버리고 탈출을 결행한 것이다.

이는 막상 일본군에 가담하고 보니 생각이 변한 결과일까? 아니면 막상 일본군에 가담하기는 했지만 갑자기 더 중요한 대의(大義)를 깨달은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애초부터 일본군에 가담해 중국으로 간 다음 탈출을 하기로 작정했던 것일까? 전후 상황을 보건대 마지막 상상은 적절치 않은 것 같으나, 장준하 역시 이에 대해 별 말이 없으니 속내를 명확히 알 길은 없다.

사라진 <사상계>, 이제는 인터넷으로 만난다
<사상계> 발간에서 폐간, 그리고 환생까지

▲ 1953년 4월 <사상계> 창간호.
ⓒ장준하기념사업회
월간 종합교양지 <사상계>는 원래 문교부 산하의 국민사상연구원 기관지 <사상>에서 시작된 것이다. <사상>은 대한민국 정부의 서기관에 임명된 장준하가 국민사상연구원의 기획 업무를 관장하면서 1952년 9월 창간한 월간지인데, 장준하는 이듬해 4월 이를 인수해 <사상계>로 제호를 바꾸고 명실상부한 월간 종합교양지를 만들어 낸다.

이미 장준하는 1944년 중국 중앙군관학교 임천분교에 머무를 때부터 1945년 광복군으로 잡지 <등불>과 <제단>을 발행하기까지 수차례 잡지를 만들어낸 바 있기에 <사상계> 창간은 어쩌면 예견된 것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초판으로 3천부가 발간된 <사상계>는 창간호부터 매진되는 등 특히 학생과 지식인들에게 인기가 많았는데, 초기에는 1백면이던 것이 차차 4백면 내외로 증면되었다. 주로 민족통일문제와 민주사상 함양, 경제발전, 민족적 자존심 제고 등을 다뤘던 <사상계>는 특히 문예면에 비중을 두어 ‘신인문학상’과 ‘동인문학상’ 등을 제정, 신인 문인을 발굴하는 데 공헌을 했다.

그런데 제3공화국이 들어서면서부터 특히 정권과의 대척점에 서게 되었고, 이후 발행인 장준하가 국회의원이 되면서 부완혁이 발행을 맡는다. 그러나 군사 정권의 탄압과 재정난 등으로 고전하다가 결국 1970년 5월호에 김지하의 <오적>을 실으면서 폐간 처분을 받기에 이른다. 그러나 발행인 부완혁은 법정투쟁을 통해 폐간 2년 뒤인 1972년 4월 대법원으로부터 “사상계 등록취소처분을 취소하라”는 판결을 얻어냈다.

그러나 <사상계>는 더 이상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다. 재정난과 필자난, 정권과의 마찰을 원치 않는 인쇄소들의 인쇄 거부로 더 이상 잡지를 찍어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랬던 것이 폐간 28년만인 1998년 6월에 통권 206호를 발간했고, 이어 지난 2000년 6월호(통권 207호)도 냈다. 이처럼 월간지가 달마다 발간되지 않다가 근 2년이나 지난 2000년 6월에나 나온 이유는, 1996년 7월 발효된 새 정기간행물등록법이 ‘2년 이상 발행이 중단된 경우 등록이 취소된다’고 규정했기 때문에 등록 취소라도 막기 위해 발행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지금은 인터넷으로 <사상계>(www.sasangge.com)를 만날 수 있으며, 인터넷 ‘장준하기념사업회(www.peacewave.or.kr)’를 방문하면 장준하에 대한 보다 자세한 정보를 접할 수 있다.
/ 권기봉

덧붙이는 글 | 권기봉 기자의 홈페이지는 www.freechal.com/finlandia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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