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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죽어도 머리 안 자를 거야."
"학생이 학교 규칙을 따라야지 어찌 네 맘대로 안 자른다고 그러니. 죽어도 못 자른다고? 규정이 싫으면 학교를 관둬야지."

방학 때 기른 딸의 머리가 어깨에 닿았다. 중2인 아이는 그 긴 머리를 몹시도 소중히 여겼다.

"내가 이 머리를 기르려고 얼마나 애썼는데..."

저절로 자라는 머리에 대해 제가 애쓴 게 뭐 있겠냐마는 딸아이가 머리에 대해 공을 들인 건 사실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빗고 또 빗고, 책상 위엔 브러시가 거울과 함께 놓여 있고, 제 방에서 나올 때 보면 종종 손에 빗이 들려 있고. 그런 공들인 흔적으로 우리 집 방바닥엔 늘 딸의 머리카락이 어지럽게 널려 있기 일쑤였다.

다른 애들은 개학을 앞두고 머리를 단정하게 자르고 염색했던 머리도 원상 복귀시키고 파마한 머리도 풀고, 대개는 조신하게 머리를 다듬던데 잘난(?) 딸은 공들인 긴 머리를 찰랑거리며 그대로 학교에 갔다.

개학 첫날, 생활 지도 선생님께서 머리에 대해 언급을 하셨단다. 여학생들은 귀밑 5cm로 자르고 남학생들은 머리에 손을 얹어 위로 삐치는 머리가 없게 단정하게 잘라야 한다고.

단발령이 발효되었던 백여 년 전의 을미사변 때도 아닌데 머리를 짧게 잘라야 한다고 딸은 불만스럽게 입을 댓자나 내민다. 머리를 묶고 다니면 안 되느냐고 했더니 머리 검사를 할 땐 묶은 머리도 풀게 해서 귀 밑 5cm가 넘으면 안 된다고 했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그깟 머리 길이 가지고 애들을 잡고(?) 미주알고주알 따지는가 싶어 솔직히 마음엔 안 들었다. 하지만 아이 앞에서 학교 방침에 대해 뭐라 불평하는 건 안 될 것 같아 학교 편을 들며 한 마디 했다.

'그럼, 머리 잘라야겠네'

사실 '죽어도 머리를 안 자르겠다'는 딸의 배짱, 혹은 용감함(?)에 대해 나는 내심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소심한 학생으로 아무런 저항(?) 없이 학창시절을 범생이(모범생)로 보낸 나는 초·중·고 12년을 개근했다. 그 기간 동안 어쩌면 학생들이 부당하게 느낄 교칙이 있었을 법도 한데 내 기억 속의 나는 선생님이나 학교에 대해 입을 내밀어 본 적이 없이 그 시절을 밋밋하게 보냈다.

그러니 딸의 반항적인, 아니 비판적인 사고와 태도는 솔직히 내 맘에 들었다. 하지만 어찌 세상을 제 뜻대로만 살 수 있겠는가. 나는 딸에게 가벼운 충고를 해주는 것으로 끝을 내고 물러서기로 했다. 그리고 조용히 이번 경기(?)를 지켜보기로 했다. 제가 알아서 꼬리 내리고 머리를 자르든가 아니면 끝까지 가보든가. 물론 파워에서 확실히 밀리는 딸의 완패는 너무나 분명했지만 말이다.

개학을 하고서 첫 주는 무사히 넘기는 모양이었다. 의기양양하게 긴 머리를 찰랑거리고 다녔으니까. 물론 복도나 교실에서 선생님으로부터 '머리를 잘라야겠다'는 가벼운 경고는 들었다고 했다.

그런데 어느 날이었나. 둘째 주인 지난 월요일, 교무실에 가서 꾸중을 듣고 온 모양이었다. 물론 자세히 말은 안 하는데 눈치를 보니 그런 것 같다.

풀이 죽어 집에 온 딸은 선생님이 머리를 자르라고 했다며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나는 아무 소리도 안 했다. 물론 내 속마음은 그랬다.

'왜, 좀더 견뎌보지. 머리를 기르는 것하고 학교 생활을 반듯하게 하고 열심히 공부하는 것하고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좀 시원스럽게 따져 묻지 그랬어. 금세 그렇게 힘없이 백기 들고 나가 떨어질 거냐?'

지금의 모습을 사진으로라도 찍어 두어야겠다고 딸은 두런거린다. 미용실에 갈 생각도 안 한다. 제가 나서서 자르러 간다고 할 때까지 한번 기다려 보는 수밖에.

날이 어두워지자 그때서야 딸은 미용실엘 간다고 한다.

"갈 것 같으면 서둘렀어야지 왜 지금 간다고 그러니. 미용실 문 안 닫았는지 모르겠네."

심란한 표정의 딸을 데리고 함께 집을 나섰는데 늘 가던 미용실은 문이 닫혀 있었다. 옆 상가에도 가보니 역시 불이 꺼져 있고. 아홉시가 조금 안 된 시간이었다. 그렇게 몇 군데를 다니다가 길에서 우연히 딸의 친구들을 만났다.

"야, 어디 가니?"
"머리 자르러."
"아, 나도 그런데."

머리를 자르는 게 아쉬워서인지 동네를 배회하는 사춘기 소녀들의 모습이 마치 레지스탕스같다. 어차피 자를 머리 뭘 그렇게 보물처럼 끌어안는지. 그렇게 찍히고(?) 나서야 행동에 옮기는 심보는 뭔지. 자기들이 무슨 최익현이라도 되는 듯 '머리는 자를 수 있을지언정 머리털은 자를 수 없다'는 비장한 각오를 보이는지. 정말 알 수가 없다.

9시 뉴스도 못 본 채 미용실을 찾아 다녀야 했던지라 나중엔 짜증이 났지만 무서운 사춘기 소녀인지라 그냥 참았다.

"지금 문 닫을 시간인데요. 다음부턴 일찍 오세요. 9시까지만 하거든요."

미용실 원장으로부터 한 소리 듣고 자리에 앉은 딸 곁으로 꽃미남같이 생긴 남자미용사가 다가온다.

딸, "칼라에 안 닿게만 잘라 주세요."
나, "귀 밑 5cm래요. 그렇게 잘라주세요."
딸, "아니요. 교복 칼라만 안 닿을 정도로 잘라줘요."

인상 좋은 미용사는 짧게 안 자르면 다시 와야 한다고 겁(?)을 주지만 딸은 막무가내다. 하여간 조금 길게 머리를 잘랐다. 미용사는 자기가 자른 머리 중에서 제일 길다고 말했다. 딸은 그래도 영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다음 날 학교에 갔다 온 딸의 표정이 또 심상찮다.

"왜 또?"
"선생님이 또 머리를 자르라고 하잖아. 길게 잘랐다고 뭐라 하면서... 나, 안 자를 거야."

아, 머리가 아프다. 이제 중학생인 딸도 머리가 커서 누구 말 잘 안 들으려고 하는데... 교복을 입으니 머리만이 유일한 자기 표현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웬만하면 눈 좀 감아 주시지.

정말 모르겠다. 아이들은 왜 그리 머리에 목숨걸려고 하고 학교에선 또 왜 그리 머리 단속을 하려고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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