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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3.1절을 맞이했다. 해외로 이주한 많은 한인 이민자들 가운데는 한때, 나라를 되찾았다는 이유만으로 너무나 감격스러웠던 숱한 독립유공자와 그 가족들이 있다. 그런 그들이 왜 독립을 맞이한 조국을 떠나 낯선 땅에서 힘겨운 삶을 다시 시작할 결심을 했을까 하는 궁금증이 이는 이유는 곡절 많았던 우리 현대사의 아픈 상처를 아직도 제대로 지우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과거 친일 경력자들의 반성없는 행보에 대한 문제제기를 보며 '착잡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겠다'는 얘기를 하던 LA 광복회의 전(前) 회장 장영원(74세)씨를 찾아봤다. 그는 부모님이 모두 독립운동에 투신, 유공자 훈장을 받은 집안 출신이다.

"어머니가 묵고 계신다는 방문을 두드렸더니 직접 대답을 하시더라구. '누구세요?'하면서. 근데 내가 그냥 '예, 여기 신봉빈 여사님 계십니까?' 하고 물었던 거야. '전데요' 하시더군. 그 말씀을 듣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앞으로 엎드러져 가지곤 통곡을 한 거지. '어머니, 저예요, 영원이에요.' 13년 반만에 만난 거니까. 글쎄, 품에 안겨서 한 시간도 넘게 울기만 했어. 어찌나 서러웠는지..."

이제 돌아가신 지 오 년도 넘은 어머니를 떠올리는 장씨의 얼굴 가득히 잔잔히 서리는 그리움의 한켠에 반세기 전 어린 나이에 느꼈을 서러움의 자취가 언뜻 느껴진 것은 왜였을까.

장씨의 어머니인 신정숙(본명 신봉빈) 여사는 최초의 여성 광복군이자 백범 선생의 비서로 알려진 유명한 독립투사다. <백범일지>는 물론 2000년 봄에 출판된 여성신문의 '이야기 여성사' 제1부에도 등장하는 당차고 씩씩한 여장부 신정숙의 개인사는 그대로 식민시대 우리 민족의 굳센 자존심을 보여주는 독립운동사의 한 장을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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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범 김구 선생과 함께한 신정숙 여사
철저한 항일 독립투사 집안에서 태어난 신정숙은 독립운동을 하던 남편을 찾아 세살바기 아들을 업고 혈혈단신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갔다. 중국군 포로수용소에 수감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다가 백범 김구를 만나 그의 개인 비서로 일하게 된다.

상해에서 임정의 주석으로 독립운동 세력을 결집시키는 일에 바빠 일제 밀정에 의한 총상과 모친의 죽음이라는 개인적인 시련을 돌볼 겨를도 없었던 백범 선생 곁에서 그를 돕다가 조국에 대한 사랑에 눈을 뜨게 됐다. 1939년 광복군이 창설 준비를 시작하던 때부터 신정숙은 광복군 여군 군번 1번으로 참여해 훈련을 받았다.

▲ 신정숙 여사는 해방 전 광복군에 여군 제1호로 참여하기도 했다.
2000년 5월 신문을 통해 '이야기 여성사'를 소개한 <한겨레신문>의 고경석 기자는 신정숙 여사를 언급하며 몇 가지 일화를 인용하기도 했다.

"그녀는 만주에서 전투공작대원으로 유격활동을 하며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고, 중국군 특별간부훈련단에 자원 입대해 1년 6개월동안 군사훈련을 받기도 했다. 그때의 일화가 신정숙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중국군 장교가 '나라를 망쳐먹은 망국노'라고 놀린 데 격분한 그녀는 이 장교를 두들겨패 3일간 '영창' 신세를 졌다. 1963년 처음 독립유공자 연금제도가 생겼을 때 그녀는 연금을 거부했다. 당시 독립유공자 선정을 국사편찬위원회의 특별심사위에서 했는데, 독립운동과 무관한 자들을 유공자로 둔갑시키는 그들의 역사왜곡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 그녀가 연금을 내던진 이유였다. 그녀는 '옳고 그름을 분명하게 따지는' 진정한 독립군 '전사'였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아버지 장현근씨도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폭탄투척 사건 때부터 애국청년단 활동을 하던 열성적인 독립투사였다. 개성 상업고등학교를 다니던 그의 아버지는 일본인 교장의 퇴진 운동을 벌이다가 퇴학을 당하고 쫓기는 몸이 된 상태에서 그의 어머니와 혼인을 맺었다.

그러나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중국으로 떠나버렸다. 가족을 보살펴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에는 아직 젊고 피가 끓어오르던 청춘이었기 때문이리라. 윤의사의 의거 때 도산 안창호 선생등과 함께 체포되어 잠시 국내에 돌아왔다가 도산선생의 배려 덕택에 쉽게 석방되었지만 또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다. 만주와 상해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벌이던 그는 해방 당시 중국에 있던 독립지사들의 귀국을 도우며 끝까지 임무를 다하고 귀국했다.

"내가 말주변이 없어서, 아무튼 개인적으로는 영광스러운 일이지."

부모님의 사진과 훈장 등을 내보이며 자신에 대한 말을 아끼던 장영원씨는 어린시절을 회상하며 도리어 신을 내는 모습이었다.

"제 살던 곳이 못났다고 하는 사람이 어딨겠냐마는 어머니가 나를 맡겨둔 외갓집 평북 산천은 자랑할 게 너무 많은 곳이야. 죽기 전에 가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

그는 그 어렵던 일제 식민시절의 대부분을 집안 형편이 그리 어렵지 않았던 이모님 댁에서 보낸 덕에 부모님과 함께 지내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내가 덩치가 꽤 있었거든. 친구들이나 학교선생님이 나를 좋아했었어. 동네 사람들도 내가 독립운동가 자식이라고 잘 대해주고."

▲ 부모님의 기록이 남아있는 자료를 찾아보이며 설명을 하고 있는 장영원씨
ⓒ 박우성
그러나 중학교를 졸업해서 앞으로의 진로를 놓고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오자 그의 이모부가 그를 불러다 놓고 충고를 했다. 독립운동가의 자식이 공부를 더 해봐야 자신만 다친다는 것이었다. 공고를 가서 스스로 벌어먹을 수 있는 기술을 배우라는 얘기였다.

이모부의 조언을 따라 평북선천공업학교 기계과에 입학한 그는 철공일을 배웠다. 하루에 한 시간 정도 하나마나한 공부를 하고 곧바로 작업장에 투입되는 일과였다.

"우리는 포탄 껍데기를 깎는 일을 맡았거든. 초벌 손질을 해서 포탄공장에 납품하는 일이었지. 그때 철공일을 배운 덕인지 몰라도 손재주가 있어서, 미국에 온 뒤 18년 반 동안 ATM 머신 만드는 일을 책임 맡아 근무했어. 은퇴한 지 벌써 6년짼데 요즘도 거기 책임자는 나한테 회사에 와서 좀 도와달라고 그런 말을 해."

껄껄거리는 그의 호탕한 웃음에는 머나먼 타국 땅에서 자수성가한 이민자로서의 자긍심이 묻어 나오기도 하는 것이었다.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즈음을 그는 이렇게 기억한다.

"방공호에 들어가다가 미군 폭격기를 본 적이 있어. 사람들이 '이제 머지 않았다. 너희 어머니 만날 수 있다'하고 얘기해주더라구. 조금 설레는 마음이었지."

해방은 그에게만 특별히 기쁜 것이 아니었다. 마을 청년들은 마을 입구에 '조선독립'이라는 글을 적어 내걸었다. 임정의 요인들과 함께 어머니가 서울로 돌아올 거라는 얘기를 듣자 그는 한시도 기다릴 수가 없었다. 마을 청년들 몇과 함께 곧장 삼팔선을 넘었다.

"그때는 겁이 없었어. 사리원쯤 와서 잡혔지. 청년들이 몰려다니니까 금방 눈에 띄었나봐. 해방 전에 유명했다는 식당인데 난민수용소지 뭐. 그곳에서 지내라고 하더군. 얻어먹고만 살 수는 없고 무어라도 배워놔야겠다 싶어서 철도경찰학교에 입학했었어."

아직 틀이 제대로 잡히지 않았던 해방 직후의 서울에서 감격적인 상봉을 했던 어머니와 어머니보다 조금 늦게 귀국한 아버지는 그러나 함께 살 수 없는 처지였다. 아직 스물도 되지 않은 그에게 어머니와 아버지는 그를 사이에 앉혀두고 말을 건넸다.

"너도 다 큰 어른이니 이제 네게 결정할 일이다. 어머니와 아버지 중에서 한 쪽을 선택해라."

그는 딱히 원망스러운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고 말한다. 아무래도 외가에서 지낸 덕에 아버지가 조금 멀리 느껴졌을 뿐.

"비밀로 할 만한 일은 아니고 그때 알고 있던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이건 좀 덮어놓고 싶어. 내가 나서서 떠들어댈 일은 아니잖아?"

그는 굳이 그의 입으로 식민시대의 굴곡 많은 가족사를 들춰내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버지가 본 동생이 하나 있어. 장명옥이라고, 꼭 만나고 싶은데 도무지 찾을 수가 없더라구."

인터넷을 통해 한국으로도 보도가 될 거라는 사실을 알려주자 꺼낸 얘기였다.

"걔는 또 무슨 죄가 있겠어. 나하고 피를 나눈 동기간인데 내가 그 마음을 제일 잘 알지."

그는 그다지 망설이지 않고 털어놓았다.

"사실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보다 자식이 더 괴로웠던 거야."

▲ 신정숙 여사가 돌아가시기 직전 남긴 말년의 모습
어머니와 함께 지내게 된 이후 이범석 장군이 조직한 민족청년단 활동에 참여했다. 좌우가 함께 모여 늘 논쟁이 벌어지긴 했어도 청년들의 가슴에는 민족을 살려야 한다는 열정이 솟구쳤다고 한다.

"일년도 넘게 동네마다 돌아다니면서 청년들을 조직했어. 조직이 아주 튼튼했거든. 이러니까 이승만이 이용을 하게 된 거지."

그러나 여전히 마음을 가누지 못하던 그는 어머니의 강권에 못이겨 헌병학교에 1기로 입대한다. 철도경찰학교를 졸업한 경력을 인정받은 것이었다.

"팔자도 기구한게, 하하하, 내가 제대를 50년 5월에 했어. 집에 와서 해외로 유학을 가겠다고 결심하고 열심히 준비를 했거든. 금방 떠날 생각으로 바쁜데 전쟁이 딱 터진 거야. 속이 무지하게 상하더라구."

그는 세상을 살기가 싫어졌다고 한다.

"그냥 콱 죽어야겠다 싶더라구."

원대복귀를 해야하는데 그는 일부러 학도병에 지원을 했다. 이름도 바꿨다. 아무도 모르게 전투에서 전사를 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치열했던 낙동강 전선에서 그는 살아남았다.

"그 산등성이에서 미군 한 명, 학도병 한 명, 이렇게 두 명씩 참호를 파 앉아 있었지. 총을 쏘는데 누가 어깻죽지를 몽둥이로 후려 갈기는 듯이 쾅하고 통증이 와서 뒤를 휙 돌아봤어. 근데 아무도 없는 거야. 다시 앞을 보고 총을 쏘다가 허리 아래가 뜨뜻축축해져서 옷을 들춰봤지. 고여 있던 피가 주르륵하고 흐르는데 그걸 보니까 그제서야 몸이 딱 굳어버리데."

총상을 입은 그는 후방으로 실려나갔고 결국 그대로 종전을 맞이했다.

전쟁 후에 '고려산업사'라는 회사를 차리고 군납 일을 맡아서 일을 해나가던 그는 월남전 때 사업실패라는 쓰디쓴 경험을 하게 된다. '국고채무부담행위'라는 군사정권의 밀어붙이기식 주문을 감당하느라 지게 된 빚을 갚지 못하고 만 것이다. 남에게 피해를 입히고 말 수가 없었던 그는 모든 것을 처분해서 빚을 갚고 서울로 올라왔다.

일본으로 석등을 수출하는 등 이러저러한 사업에 손을 대다가 그는 처형의 권유로 미국으로 건너왔다.

"식구가 여섯인데 돈을 버는 사람이 나 혼자잖아. 힘들었지. 그런데 내가 어떻게 운이 좋았나봐. 오자마자 취직을 했는데 같이 일하던 동료가 회사를 옮기면서 나를 새 회사에 잘 소개한 거야. 아까 말한 것처럼 손재주가 있었던지 인정을 받아서 은퇴할 때까지 그 회사에서 일을 했어."

▲ 74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정정한 장영원씨
ⓒ 박우성
TRW라는 ATM 회사의 제작 책임자로 인수, 합병을 거듭한 회사와 함께 성장해온 자신의 이민사를 보여주던 그는 은퇴 후 무엇을 하며 지내느냐는 질문에 당당하게 대답했다.

"내가 제대로 공부를 못한 게 좀 한이 맺혔었나봐. 은퇴를 하고 나서는 LACC를 다니면서 중국어, 일어, 영어, 컴퓨터, 이렇게 네 과목을 들었어."

그는 학장으로부터 받았다는 우수학생 상장을 가져와 보여주기도 했다.

"요즘에도 한인타운의 어덜트 스쿨을 다녀요, 내가, 하하하. 학교 다니면서 재미를 가지는 거지. 아침 7시 반이면 집을 나서는데 하루도 빼먹은 적이 없어."

그는 70을 훌쩍 넘긴 황혼이다. 네 자녀들 가운데 어느 하나 속을 썩인 적 없는 것이 감사하고 요즘에는 가끔 만나는 손주들이 예뻐서 용돈을 쥐어주면서도 "이 돈은 너희 증조 할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신 공으로 나라에서 주는 돈"이라는 말을 꼭 잊지 않는 평범한 여느 할아버지이다.

성실하고 어여쁘게 살아가고 있는 자손들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에 아직도 맺혀 있는 게 있다고 하면 아직도 무슨 욕심이 그리 많냐고 핀잔을 들을 게 걱정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리다가 문득 속내를 드러냈다.

"우리 어머니한테 하루는 선생님이 이러더래. 부모님이 모두 독립운동을 하는 너 때문에 학교가 곤란을 겪으면 어떡하겠느냐고. 학교에 오지 말아달라고 그러더래. 그것 때문에 어머니의 할아버님께서 손녀 손을 잡고 고향을 떠나서 방방곡곡을 떠돌아다니셨다더군. 독립운동을 한 덕에 자손들 교육은 2대, 3대가 묵사발 된 거지."

그의 뒤늦은 향학열은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니었다.

"이젠 원망도 아쉬움도 없어. 나라에 어려움이 생기면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과 가족을 희생해가면서 나서겠나. 그 후손들이 나같은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지금 똑바로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게 내 바람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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