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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많은 국민들과 만나 사연과 고통과 의견을 들었다. 우리는 그 과정이 단지 표를 얻기 위한 과정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이후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고 난 후 기자회견장의 뒷 배경에 큼지막하게 써 놓은 문구가 있었다.

'국민이 대통령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만나야 할 대통령' 시리즈는 바로 그 문구의 의미에 맞게, 국민 한 명 한 명이 대통령인 시대에 우리 사회 각계의 사람들의 삶과 고통과 희망을 듣고자 한다. 이 시리즈는 총 8회에 걸쳐 진행되며, 줌마네 자유기고가들이 참여했다. <필자 주>


강남의 명문고로 꼽히는 S고. 그곳에서 전교 십수등에 들면 대학진학이 걱정이 될 정도는 아니다. 남달리 수학 과학과목에 재능을 보였던 박군(19)이 그런 경우이다. 그는 훗날 과학자가 되겠다는 꿈을 꾸며 자랐다. 이왕이면 국가발전에도 기여할 수 있는 생명공학 쪽이면 더 좋겠다는 게 부모님과 박군의 뜻이었다.

그런 박군은 막상 대학 입시가 다가오면서 깊은 갈등에 빠지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끝내 박군은 2002학년도 수능 이후 진학을 포기하고 재수를 선택했다. 수능 1등급이라 웬만한 중상위권 대학은 갈 수 있었지만, 그는 진학 대신 재수를 택한 것이다.

"저와 비슷한 점수로도 서울대에 지원하는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취업난은 갈수록 심각해지고 공학도에 대한 신뢰가 갈수록 떨어지는 현실에서 취업이 쉽지 않은데 공대를 갈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어려서부터의 꿈인 공학도의 길을 포기하게 된 겁니다."

박군이 공대진학의 꿈을 접게 된 데는 서울대 공대를 나와 연구원으로 있는 친척 형이 반면교사가 되었다.

"형은 나를 볼 때마다 공학도의 길은 이미 희망이 없는 사양길이라며 나더러는 그 길을 안 갔으면 좋겠다고 말렸지요. 그래도 그 형은 잘 풀린 셈이었는데 공부하는 데 투자한 시간이나 노력에 비해 앞날에 대한 보장이 너무 적다는 이유였어요."

박군의 형이 대학에 입학하던 10여년 전엔 공대에 대한 선호도가 높았다. 당시엔 의대보다는 공대가 훨씬 인기가 있었다. 그런데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 과정을 거치는 동안 사회는 변해갔다. 기초공학 분야에 대한 열기가 식어갔다. 여기에 대학이 취직 준비를 위한 도서관 정도로 인식돼 갔다.

더욱이 공대생들이 긴 시간 동안 연구에 몰두한 만큼의 사회적 지위나 취업할 수 있는 직장 등은 비슷한 수재들이 진학하는 의대생들에 비해 턱없이 빈약했다. 결국 박군의 형은 자신은 이미 선택한 길이지만, 후배들에게만은 될 수 있다면 자신과 같은 길을 걷게 하고 싶지 않은 것이 솔직한 마음이라고 했다. 개인적으로는 최선을 다해온 길이라 크게 후회하지는 않지만, 만약 10년 전 그때 상황이 다시 주어진다면 그때와 같은 결정은 하지 않겠다고 했다.

박군처럼 공학도로의 꿈을 접은 학생들이 택하는 학과는 대부분 의대라고 한다. 의대는 졸업을 하면 나름대로 신분 보장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특히 2001년 수능을 계기로 많은 지방대 의대가 서울대 공대보다 인기가 있었다는 게 박군과 같은 학생들의 증언이다. 급기야 2002년 수능 때에는 서울대 이공계에 등록자 미달이라는 현상까지 초래되었다.

이에 비해 의대 정시 경쟁률은 거의 대부분이 5대1, 높은 경우에는 20대1이 되었다. 수시모집 경쟁률은 50대1 정도였고, 심한 대학은 70대 1에 이른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의대의 인기는 곧 공대 기피의 역작용이다.

이러한 의대에 대한 인기는 재수학원을 둘러보면 곧바로 확인할 수 있다. 박군이 재수를 했던 2002년, 대입명문이라 불리는 몇몇 학원들에게는 1등급(상위권 4%의 학생들)을 받고도 오직 의대를 가기 위해 몰려든 학생이 10명 중 9명꼴이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학생들 사이에서도 공대는 이미 몰락했다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라고 한다.

공학도의 꿈을 접은 우수한 학생들이 그 대안으로 의대를 택하게 된 데는 의대 출신들의 경제적 안정과 사회적 지위의 보장, 공학계열과 이학계열 출신들의 열악한 사회적 진출, 계속되는 공학계열의 취업난과, 전문직으로서의 의사의 취업 용이 등을 꼽을 수 있다.

실제로 80년대 후반에 서울대 공대에 입학, 연구원으로 5년간 근무했던 이모씨의 경우는 이공계 졸업생들의 열악한 사회적 기반을 깨닫게 해 준다. 이씨는 서울 공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석사과정을 거치면서 국내의 우수한 민간기업의 연구원으로 발탁되었을 때만 해도 당시 유망분야였던 '세라믹' 분야 연구에 의욕이 차 있었다. 민간연구소들도 확실한 프로젝트에는 과감한 투자를 했으며 연구소에 대한 사회의 인식도 무척 고무적이었다.

그러나 애정은 짧았다. 투자한 만큼의 가시적인 결과가 나오지 않자 단기간에 이윤을 창출하려 드는 기업의 속성을 드러냈다. 연구 분야가 가지는 특질과 기업의 생태간에 마찰이 계속되자 자연히 연구소 분위기는 침체되었다. 연구원들의 사기 저하는 당연히 뒤따라왔다. 설상가상으로 IMF가 터지면서 그나마 기술 투자도 중단되었고 연구비 지원까지 사라지다보니 연구원들은 설 곳이 없어지고 말았다.

이씨 역시 5년간이나 몸담았던 연구원을 떠난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그러나 자의반 타의반으로 연구원으로서의 포부와 사명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이씨처럼 연구소를 나온 사람들은 외국으로 나가거나, 개인적으로 벤처창업 등을 하곤 했다. 이씨 역시 조그만 개인사업을 하게 되었다. 이상과 현실의 틈새에서 더 이상 연구원들은 국가의 장래를 짊어진 기둥이 될 수 없는 상황을 맞이한 것이다. 그런 상황은 이제 전 사회적으로 확산되고 있고, 그 확산의 기운 안에 박군 역시 포함된 것이다.

"어차피 재수를 해서 의대를 갈 수 있다면 1년이라는 기간은 나중을 위한 투자라고 생각하기로 했어요. 의사로서의 직업이 갖는 여러 장점이 있으니까요"

공학도의 길을 포기하고 재수를 했던 박군은 이제 3월이면 03학번의 의대생이 된다.

덧붙이는 글 | '국가의 장래보다 소중한 자신의 장래' 그들이 선택한 대안에 '생명공학의 선진국'에의 꿈은 이렇게 또 한걸음 멀어지는 것은 아닌지 안타깝기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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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깍이로 시작한 글쓰기에 첫발을 내딛으며 여러 매체에서 글쓰기를 통해 세상을 배우고 싶어 등록합니다 살아가는 이야기를 쓰고 싶습니다. 인터넷 조선일보'줌마칼럼을 썼었고 국민일보 독자기자를 커쳐 지금은 일산내일신문 리포터를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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