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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이 의자를 비워드리지요.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이 의자를 비워드리겠어요

먼 옛날 어느 분이
내게 물려주듯이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이 의자를 비워드리겠습니다.

<의자> 조병화


의자와 뿌리

의자! 시에서 역사적 존재를 상징하는 소재이나, 생활에 요긴한 가구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의자는 서양 쪽 그네들이다. 우리는 예부터 온돌문화이다 보니 방석이다. 반드시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문화의 특수성을 고려한 유추이다. 특히 시인의 <의자>는 어쩔 수 없이 그네들이 즐겨하는 그 흔들이 의자가 자꾸만 연상되는 것을 지울 도리가 없다.

A·P 헤일리의 세미다큐멘터리 소설 <뿌리>에는 `흔들의자`가 자주 등장한다. 단순한 소도구에서만 그치지 않고 메시지의 전달이다. 현관 마루에 놓인 묵은 흔들이 의자. 그것은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잡혀온 쿤타킨테 이래 6대에 걸친 모계측 내력을 10년간의 현지답사 끝에 마침내 조상의 뿌리 아프리카의 감비아에서 찾게 된다는 서사시 같은 이야기의 발원지였다.

할머니는 틈만 나면 묵은 흔들이 의자에 앉아 뜨개질하면서 소년에게 먼 옛적 이야기를 들려주곤 한다. 아프리카를 떠나 아메리카까지 노예로 팔려온 쿤타킨테 할아버지로부터 지금에 이른 내력을. 아마 소년의 할머니 역시 어릴 적 그 할머니가 지금처럼 이 묵은 흔들이 의자에 앉아서 들려주었던 그 이야기를 들었다.

조병화 시인의 <의자>또한 이 <뿌리>와 다름없는 구도이다. 즉 의자를 매개로 한 존재의 역사적 릴레이이다. 시의 모티브이기도 한 선의식(先意識) 3연 `먼 옛날 어느 분이 / 내게 물려주듯이`를 머리로 하고보면 나머지 연은 모두가 하나다.

단지 구성상 반복에 따른 어조의 변화. 그리고 그에 따른 경건심의 심화, 그 점층적 차이일 뿐이다. - `비워드리지요` < `비워드리겠어요` < `비워드리겠습니다`

비록 <뿌리>와 <의자>가 역사적 배경을 달리하는 두 종족간의 선의식 - 먼 옛날 어느 분이 내게 물려 주듯이 - 은 틀리지만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라는 명제에서는 소년의 그 할머니나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여하튼 이는 새 역사를 창조해야 하는 인류의 공통된 의식을 바탕으로 하는 사회적 이동, 그 `세대교체의 당위성`이다.

먼 옛날 어느 분이
내게 물려주듯이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이 의자를 비워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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