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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열단원 김상옥 의사가 1923년 1월 12일 밤 8시 10분 경 폭탄을 던졌을 당시 종로경찰서가 있던 자리다. 즉 지금의 장안빌딩 자리로, 오른쪽 귀퉁이에 높게 보이는 건물이 종로 YMCA다.
ⓒ 권기봉
[풍경1] 친구들과 함께 1966년 9월 22일 '종로 깡패' 김두한이 정일권 총리와 장기영 부총리 등에게 인분을 던지는 희대의 사건이 벌어진 국회의사당을 직접 답사하기 위해 여의도를 찾았다.
[풍경2] 고등학교 국사 교사가 1919년 9월 2일 신임 조선 총독 사이토를 처단하기 위해 폭탄을 던진 강우규 의사에 대한 현장 학습을 위해 학생들과 함께 서울역으로 왔다.


위 두 풍경을 보자. 뭔가 이상한 게 느껴지지 않는가?
먼저 [풍경1]. 김두한과 그의 국회 오물투척사건은 이미 SBS 드라마 〈야인시대〉를 통해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진 상태다. 그 인기를 타고 종로 우미관 터를 직접 찾는 이들도 생겨나고, 또 그곳에 자리잡은 음식점들은 그것을 좋은 홍보 소재로 삼아 손님을 끌어들이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 마찬가지로 국회 오물투척사건이 벌어진 국회의사당을 직접 보고 싶어 국회의사당을 찾는 이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런데 그 장소로 택한 것이 여의도에 있는 국회의사당이라고? 1966년 당시 국회의사당은 서울시청 맞은편의 현 서울시의회 건물이지, 여의도에 있는 거대한 의사당이 아니었다.

▲ 김상옥 의사가 폭탄을 던졌을 당시의 종로경찰서 모습으로 발코니와 시계탑, 돔이 인상적이다. 지금은 없어지고 그 자리에 장안빌딩이 들어섰다.
ⓒ 서울六百年史
이제 후자를 볼 차례다. 앞서 [문화유산답사40] '서울역 - 11.29 노투사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다' 편에서 다룬 바 있는 강우규 의사. 그가 사이토에게 폭탄을 던진 남대문역은 원래 현재의 서울역과 근처에 있는 염천교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다. 즉 현재 표지석이 서있는 서울역 정문 옆이 아니다. 그런데도 버젓이 "남대문역이 곧 서울역이라고 할 수 있으니 이곳이 바로 그의 의거지"라고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전자는 가상 상황이니 그다지 걱정할 바도 아니요, 어린이나 청소년들에게 미치는 영향도 미미하니 넘어가자. 그러나 후자는 "여기가 당연히 남대문역이겠거니"하는 무지와 무관심에서 비롯된 일이라 더욱 부끄럽기만 하다. 문제는 관계자들도 이런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누가 선뜻 나서 고치려 하지 않는다는 데 있고, 그저 하찮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일은 이런 잘못이 비단 이곳 한곳에만 국한된 일이 아니라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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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9, 노투사가 형장의 이슬이 되다

엉뚱한 번지에 서있는 김상옥 의사 의거 표지석

▲ 종로거리 오른쪽으로 1902년 이전에 들어선 것으로 보이는 한성전기회사(漢城電氣會社) 사옥이 보이는데, 1915년부터 1929년 10월까지 종로경찰서로 이용되었다. 결국 김상옥 의사가 폭탄을 던진 곳은 지금의 제일은행 본점 자리가 아니라는 이야기가 된다.
ⓒ 서울六百年史
종각 네거리 제일은행 본점과 높이 솟은 밀레니엄타워 사이로 난 우정국로 초입. 네거리에서 도로가 막 뻗어나가려는 곳에 화강석으로 된 작은 표지석 하나가 서 있다. 한번 유심히 살펴볼 일이다.

"김상옥(金相玉) 의거터(義擧址)- 1923년 의렬단(義烈團)원 김상옥 의사가 일제의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의거한 자리."

곧 1923년 김상옥 의사가 '이곳에 있던'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졌다는 뜻일 것이다. 물론 의금부(義禁府)가 있던 이곳에 종로경찰서가 있기는 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연대에 있다. 표지석에도 쓰여 있지만 김상옥 의사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때는 1923년.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1923년 당시 종로경찰서는 이곳에 없었다.

당시 종로경찰서가 있던 곳은 종로 YMCA 왼쪽 건물인 '장안빌딩' 자리다. 지금은 여러 상점들이 입주해 있는 이 자리가 바로 1923년 김상옥 의사가 폭탄을 던졌던 종로경찰서가 있던 자리인데, 1929년 10월 들어 지금의 제일은행 본점 자리로 이전했으니 김상옥 의사 의거 표지석이 제일은행 앞에 서있는 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그른 일이다. 물론 "이곳에도 한때나마 종로경찰서가 있었으니 그냥 넘어갈 수도 있지 않느냐"며 반론을 펼 수도 있겠으나, 그러려면 차라리 현 종로경찰서 앞이 사람들도 더 많이 다니고 낫지 않을까. 이것은 마치 한국을 찾은 중국인 관광객을 상암경기장으로 데려가 88 서울올림픽에 대한 설명을 하는 것과 같고, [풍경1]에서처럼 엉뚱한 국회의사당 앞에 가서 김두한 오물투척사건을 떠올리는 일과 매한가지다.

▲ 의열단원 김상옥. 그는 지난 1923년 1월 12일 33세의 나이로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 진 후 몇 차례에 걸쳐 일제 경찰과 총격전을 벌였다. 그의 집터는 종로 5가 동대문 부근이며, 묘는 국립묘지에 있다.
ⓒ 서울六百年史
조국을 살리기 위해 나선 젊은 청년들

후손들로부터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대접을 받는 김상옥 의사는, 그러나 1923년 1월 12일 오후 8시 10분 경 조선총독부 못지 않게 조선인들을 억압하던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경찰과 기자 수십 명을 사상케 하는 등 결코 간단치 않은 인물이었다.

1890년 1월 5일 서울 어의동(현 효제동)에서 태어난 김 의사는 대한제국 말기 군관을 지낸 김귀현(金貴鉉)의 3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나, 14세 때부터 대장간에서 일하는 등 순탄치만은 않은 청소년기를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려운 형편이었음에도 20세 되던 해인 1909년 직접 동흥야학교를 세워 불우한 청소년들을 교육했고, 1919년 3·1운동이 시작되자 4월 1일에는 비밀결사인 '혁신단(革新團)'을 조직해 '혁신공보(革新公報)'를 발간하는 등 독립의지를 고취시키는 역할을 한다. 특히 같은 해 12월에는 암살단을 조직해 직접 일제 고관과 친일 매국노들에 대한 암살을 시도했다. 특히 이듬해인 1920년 4월 광복단(光復團) 결사대 소속의 한훈과 유장렬 등의 동지들과 함께 전라 지방 친일파들을 총살하고, 헌병대 분소를 습격하기도 했다. 한편 이미 강우규 의사가 1919년 9월 2일 시도한 바 있는 사이토 총독에 대한 암살을 시도한 적도 있으나, 사전에 발각되는 바람에 동지들이 체포되기도 한다.

▲ "김상옥 의사가 피로 쓴 역사, 그 꽃다운 이름이 후세에 길이 전하리라." 백범 김구 선생이 김상옥 의사의 의거에 대해 '遺芳百世(유방백세)'라고 쓰며 칭송하고 있다.
ⓒ 서울六百年史
이후 김 의사는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게 되는데, 자세한 이야기에 앞서 '의열단'이라는 단체에 대해 알아둘 필요가 있다. 1919년 11월 당시 22세의 '아나키스트' 김원봉과 이종암, 윤세주 등 13명은 만주 길림에서 의열단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일제(日帝) 주요 인물 및 친일파 등에 대한 암살 계획과 조선총독부·동양척식주식회사·경찰서 등에 대한 파괴 계획을 세우게 된다. 실제로 의열단은 이듬해인 1920년부터 1929년 해산될 때까지 근 10년 가까이 지속적인 활동을 펼치는데, 부산경찰서 폭탄 투척(1920년 박재혁)과 밀양경찰서 폭탄 투척(1920년 최수봉), 다나카 대장 암살미수(1922년 오성륜),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1923년 김상옥), 도쿄 이중교 폭탄 투척(1924년 김지섭),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 투척(1926년 나석주) 등이 잘 알려져 있다.

김 의사는 상하이에서 만난 의열단 동지들의 영향으로 이 단체에 들게 되고, 1923년 1월 일본에서 열리는 일본제국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떠나는 조선총독을 암살코자 권총 4자루와 실탄 수백 발, 폭탄 등을 갖고 농부로 변장, 압록강철교를 건너 국내에 잠입하지만 총독을 암살하는 데는 실패한다. 그런데 이때 종로 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이 벌어지게 된다. 때는 1923년 1월 12일 오후 8시 10분.

33세의 청년,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먹이다

▲ 광무 3년인 1899년 5월 17일, 서울에 서대문에서 종로를 거쳐 동대문과 청량리를 잇는 최초의 전차가 선보인다. 김상옥 의사가 폭탄을 던진 종로경찰서에는 원래 이 전차를 부설하는 데 앞장선 한성전기회사가 있었다.
ⓒ 서울六百年史
조선총독을 암살하려다 실패했기 때문에 종로경찰서에라도 폭탄을 던지기로 한 것이 직접적인 이유인지 그 명확한 까닭은 알 수 없지만,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종로경찰서 서쪽 경무계 사무실 등 건물 일부가 파손되고 경찰서 안에 있던 사람과 지나가는 사람 등 적지 않은 사람들이 크게 다친 것으로 전해진다.

폭탄을 던진 김 의사는 삼파동(현 후암동)의 매부(고봉근) 집에 몸을 숨겼지만, 사건 발생 닷새만인 17일 새벽 종로경찰서 수사주임 미와 경부를 필두로 20여 명의 무장 일경들이 집을 포위, 총격전을 벌이게 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당시 종로경찰서 형사부장이던 마에무라(前村)가 총에 맞아 죽고, 이마세와 우메다 경부 등 적지 않은 인원이 다치게 된다.

그러나 김 의사는 아직 체포되지 않았다. 이른바 삼류 소설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라고 지레 판단할 필요는 없다. 김 의사는 이 포위망을 뚫고 왕십리 안장사(安藏寺)에서 승려 복장을 하고 짚신을 거꾸로 신는 등 기만술을 쓰며 일경의 경계망을 뚫고 산을 내려와, 무내미(현 수유리) 이모집에 들른 뒤 19일 새벽 혁신단 동지이기도 한 효제동 이혜수(李惠受)의 집으로 숨어들게 된다. 그러나 이곳도 그리 안전하지 못해 결국 22일 새벽 이 은신처 역시 발각된다.

▲ 문제의 그 자리다. 종각 네거리 한편의 제일은행 본점 오른편 귀퉁이 아래에는 김상옥 의사가 폭탄을 던진 자리가 바로 이곳이라고 말하는 표지석이 서있다. 그러나 종로경찰서가 이곳으로 이전된 것은 1929년 10월의 일로, 김상옥 의사의 의거와는 6년하고도 9개월이라는 시차가 발생한다.
ⓒ 권기봉
이제 김 의사의 생이 끝날 시간도 머지 않았다. 이혜수의 집을 겹겹이 포위한 경기도 경찰부장 우마노와 서울 시내 4개 경찰서 소속 기마대와 무장경찰 수백 명. 이번에는 기어이 잡고 말겠다는 태세였으리라. 결사대가 지붕을 타고 집안으로 들이닥치는 것을 시작으로 3시간 이상 진행된 총격전으로 일경 10여 명이 죽고, 김 의사 역시 오른쪽 대퇴부에 총상을 입고 만다. 결국 김 의사는 이웃집 화장실로 피신했지만 단 한 발 남은 총알을 일경이 아닌 자신의 머리를 향해 발사하게 되고, 결국 생을 마감하게 된다. 1923년 1월 22일, 당시 그의 나이 33세.

이렇게 파란만장한 생을 살아온 김상옥 의사지만, 후세의 평가는 말 그대로 무관심 그 이상이하도 아니다. 일단 아는 이가 많지 않다는 것은 부차적인 문제다. 아나키스트로 분류되는 의열단에 대한 평가가 아무리 부정적이라고 해도 사실을 왜곡하면 안될 터인데 김상옥 의사의 흔적과 관련해서는 그 시작부터가 오류요, 그 오류를 알면서도 고치려 하지 않으니 말이다.

서럽도록 시린 찬바람을 맞으며 서있구나!

▲ 세기가 바뀐 지 언제인데 아직도 무조건 거대하고 휘황찬란해야 대접받는 시대. 이런 하찮아 보이는 표지석은 우리들 뇌리에서 잊혀진 지 이미 오래다. 그러나 이런 작은 것 하나에도 신경을 쓸 때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게 아닐까. 사진은 엉뚱한 위치에 서있는 김상옥 의사 의거 표지석.
ⓒ 권기봉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흘러간 역사를 '소중히' 다루려는 시도가 아예 없진 않다는 점이다. 천안 삼거리에 독립기념관이 새워진 지 이미 오래고, 용산 미군기지 옆에는 새로운 국립중앙박물관이 거대한 몸집을 자랑하며 들어서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무너진 역사 유적 경희궁 터에는 서울역사박물관이 들어서 관람객들을 불러들이기 시작했고, 또 바로 옆에는 주상복합 아파트들이 들어서 궁궐의 기운을 느끼며 잠에 들고 날 수 있게 된 세상이니 말이다. 말이 좋아 다행이지, 안타까운 대목이다.

지난해 말 서울시와 서울시의회, 시민단체 등이 중구 정동에 위치한 중명전(重明殿)의 보존 여부를 둘러싸고 벌인 논의 과정에서 드러난 서울시의 태도를 보건대, 김상옥 의사 의거 표지석(또한 강우규 의사 의거 표지석 역시)이 이른 시일 내에 제 위치로 옮겨질 것이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나마 중명전 보존 문제는 시민단체들을 중심으로 각종 언론 매체에서 지적함으로써 잠시나마 세상의 이목이라도 끌었지만, 이 초라한 의거 표지석 정도는 그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는 영역 저편에 존재할 뿐이다.

세기가 바뀐 지 언제인데 아직도 무조건 거대하고 휘황찬란해야 대접받는 시대. 아무리 하찮다 한들 제일은행 본점 오른쪽 귀퉁이, 서럽도록 시린 찬바람을 맞으며 꿋꿋이 서있는 김상옥 의사 의거 표지석을, 그러나 기억할 일이다.

▲ "김상옥(金相玉) 의거터(義擧址)- 1923년 의렬단(義烈團)원 김상옥 의사가 일제의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의거한 자리." 표지석 자체에는 별 문제가 없다. 다만 이런 표지석을 엉뚱한 자리에 세운 우리들의 잘못이 크다.
ⓒ 권기봉

'김상옥 의사 의거 표지석'과 '당시의 종로경찰서' 찾아가기
-지하철 타고 가면 편해요!


현재 김상옥 의사의 의거 표지석이 있는 곳은 종각 네거리의 제일은행 본점 오른쪽 귀퉁이다. 지하철 1호선 종각역에서 하차한 후 조계사 방향인 2번 출구로 나오면 바로 보인다.

그리고 원래 김상옥 의사가 폭탄을 던졌던 종로경찰서 자리는 지하철 1호선 종각역과 종로3가역 사이에 위치한 장안빌딩 자리로, 종각역에서 내리면 찾기가 쉽다. 3번 출구로 나와 조금만 걷다 보면 왼쪽으로 YMCA를 가리키는 큰 표식이 보이는데, 바로 그 전에 있는 하늘색 건물이 장안빌딩이다.

한편 그가 살았던 집터는 종로 5가 동대문 부근으로 알려져 있고, 묘는 국립묘지에 있다.
/ 권기봉

덧붙이는 글 | 오는 1월 12일은 김상옥 의사의 순국 80주기 되는 날입니다. 이에 종로경찰서 터를 찾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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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찾아 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저서로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알마, 2008), <다시, 서울을 걷다>(알마, 2012), <권기봉의 도시산책>(알마, 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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