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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찍으러 미국 가지 않겠다"

지난 여름쯤 민주당 국민경선이 한창일 때 노무현 후보가 한 자리에서 했던 말이다. 평소 노 후보의 정치성향, 세계관 등으로 미루어볼 때 그의 입에서 나옴직도 한 말이었지만 막상 듣고 보니 다소 생경했다. 그간 이런 말은 우리 정치권에서 금언(禁言)으로 여겨져 왔기 때문일터다.

이에 대해 요즘 신세대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박수가 쏟아진 것은 '당근'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한번도 우리나라 정치인들로부터 그런 말을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인은 물론 심지어 대학교수, 기업인들까지 철이 바뀔 때마다 의원외교다, 심포지엄 참가다, 무슨 동문모임이다 해서 이런 저런 명분을 붙여 미국에 가서 '문안'드리고 '눈도장'찍고 오던 것이 소위 '구주류'들의 오랜 관행이었다. 그들에게 미국은 가히 절대적 존재였다.

그런데 도지사 후보도, 국회의원 후보도 아닌, 명색이 대통령후보가 미국을 이처럼 한방에 날려버릴 듯한 '시원한 발언'을 했으니 한국 사회가 반쯤 뒤집어질만도 했다. 미국을 대국으로 떠받들며 늘상 숭미(崇美)에 젖어 살아온 구정치인들에게 노무현은 뭘 모르는, 다시 말해 '철없는 정치인' 정도로 비쳐졌을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젊고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신세대 유권자들에게 노무현은 '자주의 상징'으로 비쳐졌음직도 하다. 미국에 대해 할 말을 하고 나아가 미국에 대해 'NO!'라고 할 수 있는 정치인이 한 사람 정도는 이제 나와야 한다는 것이 아니었을까. 그런 시대의 상황 속에서 노무현이라는 정치인은 등장했고, 또 그런 신세대들의 표로 그는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바로 그런 노무현의 대미관에 요즘 '작은 변화'가 일고 있다는 지적이 서서히 입소문으로 번져가고 있다. 비단 당선자 이후의 행보만이 아니라 선거 중반기 이후부터 벌써 그런 '조짐'을 보였다는 것이다. 그에게 걸었던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인지 일각에서는 이제 기대를 하나 둘씩 접어야할 때가 아니냐는 다소 성급한 얘기도 나오고 있다.

▲ 미군 장갑차에 희생당한 두 여중생 아버지를 위로하고 있는 노 당선자(가운데)
ⓒ 주간사진공동취재단
28일(토) 오전 노 당선자는 지난 여름 미군장갑차에 깔려 사망한 두 여중생의 부모님과 이들의 억울한 죽음에 맞서 근 6개월째 미국의 응당한 해결책을 요구해온 범대위 관계자들과 면담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노 당선자는 유족들을 위로하고 범대위측의 그간 활동에 대해서도 긍정적 평가를 내린 바 있다.

그러나 이날 면담 과정에서 노 당선자가 범대위측 인사들에게 "촛불시위를 자제해 달라"고 호소한 것이나 '친미적 자주' 운운한 것을 두고 말들이 많다. 범대위 상임공동대표 가운데 한 사람인 홍근수 목사는 노 당선자의 발언을 두고 "실망스럽다"고까지 표현했다.

노 당선자가 '촛불시위 자제'를 호소한 배경에는 북한핵 문제가 심각한 국면으로 치닫고 있는 상황에서 반미기류가 더 이상 확산될 경우 한미간 공조에 결정적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둔 것으로 분석된다. 특히 미국 언론이 주한미군 철수론을 공공연히 보도하는가 하면 부시행정부의 강경론자들이 날로 대북 강경책을 펴고 있어, 채 취임도 하기 전에 미국 조야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당선자의 입장은 이해가 가는 측면도 있다.

그러나 노 당선자가 촛불시위의 성격을 언급하면서 '친미적 자주'를 언급, 설명한 것은 의외이자 선뜻 납득하기 어렵다. 노 당선자는 "자주에도 친미적 자주가 있고, 반미적 자주가 있을 수 있을 것"이라며 "그간 역사적으로 반미적 자주가 이야기되었으나, 미래적 의미에서 본다면 친미적 자주가 되어야 한다고 본다"고 말했다.

범대위 관계자들은 이 발언에 대해 '어리둥절하다"는 입장이지만 필자는 노 당선자의 역사관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간의 우리 현대사에서 친일, 친미는 곧 일본과 미국에 대한 종속과 굴종을 의미해온 것으로, 그 단어 뒤에 '자주'를 붙인 것은 수사에 불과하다고 본다.(요즘 학계에서는 이같은 표현을 두고 '형용모순'이라고 부른다)특히 미국과의 관계가 해방 50년이 넘도록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 상황에서 더욱 그렇다고 본다.

최근 국내외에서 가장 핫이슈로 떠오른 북한핵 문제와 SOFA개정 문제를 둘러싼 한미간의 갈등을 바라보는 노 당선자의 시선도 반듯해 보이지 않는다. 노 당선자는 "북핵은 민족 생존의 문제이고, SOFA는 민족 자존심의 문제"라며 "나는 '선(先)북핵, 후(後)SOFA'의 수순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민노당 이상현 대변인은 29일 성명을 통해 "북핵문제와 SOFA 문제는 경중을 따져 선후를 매길 문제가 아니라 동시에 풀어야 하며, 문제의 해법은 한미공조가 아니라 민족공조와 국가주권에 있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진보진영의 많은 이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노 당선자의 28일 면담내용 전문이 공개되지 않아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체면론'도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본다. 노 당선자는 "미국에도 국가적 체면이 있는 만큼, 당장 굴복하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라며 이 말 끝에 "촛불시위를 자제해 달라"고 발언했다.

'미국에도 체면이 있다'는 노 당선자의 말은 맞다. 문제는 그런 체면이 대한민국에도 있다는 사실이다. 두 여중생을 죽인 미군 병사에게 무죄평결을 내린 미군재판부가 한국의 체면을 세워줬다고 볼 수 없다. 사정이 이런데도 노 당선자가 미선-효순이 부모님 앞에서 '미국의 체면을 세워주자'고 했다면 우리가 민주당 경선시절에 만난 노무현과는 거리가 있다.

이번 발언으로 그간 노 당선자에게 상징지워졌던, 그리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호평받았던 '자주적 이미지'는 상당히 상처를 입게 됐다.

'촛불시위 자제' 호소 발언에 대해서는 심정적으로 이해하는 네티즌도 있었으나 비판하는 네티즌들도 만만찮았다. 평소 노 당선자에 대해 상대적으로 우호적이었던 네티즌들이 대놓고 비판을 쏟아낸 것은 이례적이다.

'촛불'이라는 ID를 가진 한 네티즌은 "추운날 고생한 유족들과 범대위 관계자들을 불러다 그런 말을 해 사기를 꺾은 것은 적잖이 실망스럽다"며 "촛불시위는 반미시위가 아니라 불합리한 소파 개정과 정당한 사과를 요구한 것인데 그 동안 정부당국자들은 헛소리만 해대다가 외국여론에 반미로 비쳐지니까 말도 못하고 알아서 기는 행동"이라고 질타했다. '알아서 기는 행동', 정권 중반기에나 터져나옴직한 비판이 이미 쏟아져나온 것이다.

굳이 분류하자면 '노무현 지지자'랄 수 있는 재미 김민웅 목사는 29일 필자와의 전화통화에서 "노 당선자의 '촛불시위 자제' 발언은 촛불진영의 분열을 초래해, 결과적으로 미국의 '분할통치(devide and rule)정책'에 기여하게 될 것"이라며 "부시행정부는 지금의 노 당선자의 엉거주춤한 대미 태도를 보고 기선제압(길들이기)과 함께 가속도를 붙이고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혹자는 노 당선자의 이같은 대미관 변화가 어제오늘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이미 선거 종반전 무렵, 즉 단일화를 전제로 당선 가능성이 점쳐지면서 조짐을 보였다고 말한다.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 촛불시위 준비자들이 몰려들던 지난 12월 7일, 당시 대구 서문시장에서 유세를 벌이던 노 후보는 "오늘 저녁에 열리는 (광화문) 촛불시위에는 참가하지 않으려 한다"며 그 이유를 두고 "자칫 선거용으로 비쳐질 수도 있고, 대통령후보로서의 무거운 책임감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곱씹어보면 당시 노 후보의 이 말은 어폐가 있다. 즉 노 후보는 선거용으로 비쳐질 것을 우려해 촛불시위에 참가하지 않았다고 하나 사실은 참가하지 않은 자체가 선거용인 셈이다. 당시 노 후보는 급진, 반미 이미지를 탈색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고, 이회창 후보는 그와 정반대 입장이었다. 즉 이 후보는 자신의 친미 이미지를 탈색시키려고 보수진영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당초 촛불시위에 참석하려 했다가 참가자들의 반발로 도중에 계획을 포기했다.

그러나 노 후보는 끝내 촛불시위 현장은 물론 광화문 근처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권영길 후보가 촛불시위대와 한덩어리가 돼 몇 시간 동안 차가운 밤거리를 헤맨 것은 그렇다고 치자. 그러나 이회창 후보가 방문을 원치 않는다고 해도 굳이 광화문 열린시민광장에서 있은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소속 신부들의 효순이, 미선이 추모 단식기도회장을 찾았다가 수모를 겪은 사실과 빗대보면 당시 노 후보의 '몸사리기'는 이해하기 어려운 구석이 여전히 남는다.

또 아무리 선거 막판에 사정이 다급해 앞뒤를 안 가렸다고 쳐도 권영길, 이회창 두 후보가 서명한 '소파개정'에 유독 노 후보만 서명하지 않은 것도 납득하기 어렵다. 백만명 넘게 서명한 사안에 대해 노 후보 한 사람이 더 서명한다고 해서 당장 크게 달라질 것도, 또 문제될 것도 없는 사안이었음에도 그는 끝까지 서명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때나 지금이나 "맡겨달라"는 식이다. 그런데 노 당선자는 28일 범대위측과의 면담자리에서 '소파 개정'이 아닌, '소파운영 개선'을 주장했다가 한상렬 목사로부터 반박을 당하기도 했다.

노 당선자는 선거 전날 정몽준의 '지지철회' 폭탄을 맞고도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선거에서 승리했다. 그런데 그를 죽음의 문턱에서 살린 주역이 서울 강남의 50~60대나 영남의 보수적 유권자였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도리어 그의 튀는 행동과 자주적 성향을 좋아했던, 이른바 신주류 유권자들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는 민노당 후보 지지자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이번 선거 결과 그들이 신주류로 부상하고 있는 현 시점에서 노 후보가 빚을 졌다면 그들은 일부 측근이나 민주당 당직자들이 아니라 바로 이들이다. 이들이 노 당선자에게 바라는 것은 반미투쟁가가 아니라 후보 초창기 시절 "사진 찍으러 미국가지는 않겠다"고 한 그 파격성, 자주성 정도였다고 본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하의 전통적 한미관계는 이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거듭나야할 시대적 소명으로 떠오르고 있다. 한국인 다수가 그걸 원하고 있고, 또 미국도 이제는 이같은 요구에 화답할 수밖에 없으리라고 본다. 노 후보가 당선된 직후 부시 미국 대통령이 이례적으로 직접 전화를 걸어온 것도 그런 '화답'의 하나라고 본다.

취임도 하기 전에 노 당선자는 미국과도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골치아픈 사건' 하나를 앞에 놓고 있다. 바로 북한핵 문제다. 이 문제 논의를 위해 취임 직후 그의 미국행이 이미 예정돼 있다. 이처럼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서 향후 '사진찍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이 있어서'라면 당연히 미국을 가야 하고 또 협상도 해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자세'고 또 '초심'이다.

노무현 당선자는 대선 유세과정에서 수차례에 걸쳐 금강산 관광을 포함한 기본적인 남북관계 유지를 천명했다. 그러나 미국통신사 AP는 "부시행정부 일각에서는 현재의 상황이 호전되지 않을 경우 한국정부에 북한과의 모든 관계를 끊으라고 요구하는 방안까지 검토하고 있다"(<한겨레>12월30일자 1면)고 전하고 있다.

▲ 정운현 편집국장
만약 그러한 미국의 요구가 현실화될 때, 그것은 우리의 자주권을 송두리째 짓밟는 것이고 한반도는 전쟁전야의 먹구름으로 뒤덮히게 된다. 이런 좋지 않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기에 촛불시위는 자제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반전평화시위로 발전되어야 한다.

노무현 당선자는 부시 미국 대통령이 AP의 보도대로 "북한과의 모든 관계를 끊으라"고 요구하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인가?

우리도 이제는 대미관계에서 지조있고 초심을 지켜내는 대통령을 보고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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