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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일 서울 세종로 미 대사관 앞 도로에 펼쳐진 5만여 시민의 촛불대열. 반미시위에 꾸준히 참여해온 대학생들도 감격했지만 30~40대 시민들은 10년전 기억을 떠올리며 감회가 새로운 듯 했다. 40대의 한 시민은 "15년 전 대학에 다닐 때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미대사관 앞까지 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도 못 했다"고 80년대를 회고했다.

"미국, 민주주의 수호자 아닌 독재정권 수호자"
광주 항쟁이후 대미인식 급격히 전환


▲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모습. 시내 주요 지역마다 공수부대 병력이 투입되어 시민들을 향한 무자비한 진압이 시작되었다
ⓒ 5.18기념재단
한국의 반미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980년 광주항쟁 이후부터다. 81년 <조선일보> 설문에 따르면 "미국은 우리의 '좋은 우방' 또는 '우방'"이라고 답한 대학생과 고등학생은 92%에 이른다.

그러나 82년 같은 조사에서 미국을 우방이라고 생각하는 응답자는 86.4%로, 83년도에는 78.2%로 차츰 감소하는 모습을 보인다.

80년 5월 26일 당시 도청을 지키던 광주시민들은 "부산에는 미 항공모함 2대가 정박 중에 있습니다. 잔인무도한 저들의 살육이 더 이상 계속되는 것을 방지하고 광주시민을 지원하기 위하여 왔습니다. 시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라는 가두방송을 내보냈다. '민주주의의 수호자'인 미국이 독재와의 싸움을 지원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광주시민들의 '순진한' 믿음은 여지없이 깨졌다.

미국이 광주항쟁 진압에 개입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미국에 대한 인식은 '획기적'으로 변화한다. 광주 시민의 반미의식은 최초의 반미투쟁으로 기록되는 '광주 미문화원 방화투쟁'으로 이어졌다. 12월 9일 가톨릭농민회 전남연합회 광주분회장인 정순철(당시 27세)씨와 농민회원 4명이 문화원 지붕에 구멍을 뚫고 휘발유를 뿌린 뒤 불을 지른 것이다. 그러나 당시 언론은 이 사건을 '전기누전에 의한 화재'라며 1단 기사로 처리했고 사건의 진상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광주항쟁은 80년대 민주화운동의 화두가 되었고 광주 미문화원 방화 역시 부산 미문화원 방화, 서울의 미문화원 점거 등의 시위로 이어졌다. 다른 미국 관련 시설에 대한 점거, 진입도 이 때부터 시작됐다. 이 시기의 반미는 '독재를 지지하는 미국에 대한 반대'였으며 반미운동은 민주화운동의 일환이었다.

"소련에게 속지말고 미국을 믿지마라"
"미군범죄, 일부 몰지각 미국인의 만행"
80년대 이전 대미의식

물론 그 전에도 반미운동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해방 직후부터 국민들 사이에서 "소련에 속지 마라. 미국을 믿지 마라. 일본이 일어난다"는 말이 퍼졌다. 한반도에 분단을 가져온 두 강대국에 대한 반감이 자리잡은 것이다.

1948년 단독선거에 항의하는 '2.7 구국투쟁'에서는 "미군은 즉시 철거하라"는 구호도 나왔다. 그러나 이 당시의 반미시위는 미국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닌 '반외세'에 가깝다.'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반공이 국시인 남한 사회에서 반미는 좌경·용공행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1961년 한미경제협정 반대투쟁에서는 '양키 고 홈'이라는 구호가 처음 등장했다. 강간, 폭행, 살인 등의 주한미군 범죄에 대한 피해 유가족, 마을 집단, 대학생들의 항의도 60년대부터 시작됐다.

그러나 당시의 대미인식은 '미국은 북괴로부터 우리를 지켜준 형님'이라는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고려 대학생들은 1962년 발표한 결의문에서 "한미 양국이 주권 국가로서 서로 존중하여 양국의 권리와 의무를 명백히 하고 인간의 기본권을 옹호하는 합리적인 방법"으로 한미행정협정을 요구했지만 주한미군 범죄를 "일부 몰지각한 미국인들에게 의한 한국인에 대한 모욕적인 만행"이라고 규정했다. 주한미군의 주둔 자체가 나쁘다는 인식은 없었던 것이다. / 권박효원 기자
이 중 가장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 것은 '해방 이후 최대의 반미시위'로 평가받는 부산 미문화원 방화투쟁이다. 82년 3월 18일 부산 미문화원에서는 폭음과 함께 불길이 치솟았고, 인근 백화점에서는 '미국은 더 이상 한국을 속국으로 만들지 말고 이 땅에서 물러가라'는 성명서가 뿌려졌다.

언론에서는 이 사건을 간첩이나 불순분자의 소행으로 보도했다. 범인에 대해 2000만원의 현상금이 붙었다. 이 사건의 주역이었던 당시 고신대 신학생이었던 문부식씨를 비롯한 16명이 구속되었고 문씨는 사형을 언도받았다.

애초 일제의 한반도 착취도구였던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으로 사용되다가 미국에게 넘어간 부산 미문화원 건물은 이후 99년 4월 한국에 반환된다.

같은 해 대학가에서는 레이건 방한 반대하는 시위가 확산됐다. 이 과정에서 서울대학교 난간에 올라 시위를 주도하던 황정하씨가 경찰에게 쫓겨 추락해 사망했다. 황씨는 "반민족적, 반민중적인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은 이 땅에서 사라져야만 하며, 그를 지지하는 레이건의 방한은 철회되어야 한다"는 전단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그의 유서가 된 셈이다.

미국 수입개방압력에 대한 항의도 이 시기부터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특히 농축산물 수입개방 압력은 농민들에게 큰 분노를 샀다. 85년 4월 농민 100여명이 미 대사관에 진입해 '소값 피해 보상하라' 등을 외쳤다. 이에 앞서 대학생들도 84년 11월 주한 미상공회의소 사무실을 점거농성하고 "미국자본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

"미국은 남한 사회 모순의 근원"
'반미=좌경용공' 공식 깨어져


▲ 1985년 미문화원 점거농성 모습.
ⓒ 민주화운동자료관
80년대 중반에도 반미운동은 여전히 '일부 급진세력'의 전유물로 평가받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에 대한 국민들의 호감도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87년 <한국일보>의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경제면에서 대외적으로 예속되어 있다"는 응답자는 81%, "미국은 우리나라 정치발전보다는 자기나라 이익에 더 관심을 갖고있다"는 응답자는 90%로 각각 나타났다.

86년도부터 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 노선이 학생운동의 주도권을 쥐게 된다. 흔히 'NL'이라고 불리는 이 노선은 한국을 식민지 조국으로 규정하고 남한 사회의 모순을 미국으로부터 찾았다. 이전까지만 해도 '반미=좌경'이라는 레드 컴플렉스가 주효했다. 지난 해 서울 미문화원을 점거했던 학생들조차 "우리는 반미가 아니다"라며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곤 했다.

86년 4월 결성된 '반미자주화 반파쇼민주화 투쟁위원회(자민투)'는 반미운동의 과제로 반전반핵평화운동, 조국통일촉진투쟁, 미국 경제침략 저지투쟁 등을 전개했다.

특히 반전반핵운동은 전방입소거부운동, 대학 교련교육 반대운동, 팀스프리트 반대운동 등으로 전개됐다. 이재호(반전반핵평화옹호투쟁위원회 위원장, 정치학과 4년), 김세진(서울대 자연대 학생회장, 미생물학과 4년)은 86년 4월 '미제의 용병교육 전방입소 결사 반대' '반전반핵 양키 고 홈' 등의 구호를 외치며 자신의 몸에 신나를 부어 분신했다.

88년 5월 15일 조성만(24세, 서울대 화학과 2년)씨가 "민족통일을 위해 미국이 물러가야 한다"며 명동성당에서 할복 투신했다. 조씨는 죽기 전 옥상에서 "한반도의 통일을 막아서는 안 된다. 한반도에서 미국은 축출되어야만 한다"는 내용의 유서 10장을 뿌렸다.

▲ 80년대 반미시위 중 유명을 달리한 대학생들. 좌로부터 황정하, 김세진, 이재호, 조성만 열사.
ⓒ 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같은 해 만들어진 '구국결사대'는 미국 관련 시설에 대한 직접공격을 감행했다. 그 해에는 광주 미문화원 내 사제시한폭탄 설치(2월 26일), 서울 미대사관 사제폭탄 투척(5월 20일), 광주 미문화원 화염병 투척(5월 23일), 한남동 미군거주단지 화염병 투척(11월 17일) 등이 숨가쁘게 이어졌다.

이 시기의 반미운동은 학생단체 뿐의 과제가 아니었다.

86년 5월 3일 신민당 개헌추진위원회의 경기, 인천지부 결성대회에서는 재야단체 인천지역 노동자단체, 학생단체들이 함께 "노동자 농민 피땀 짜는 미국놈들 몰아내자" 등의 구호를 외쳤다. 87년 12월 대선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미국은 농축산물 뿐 아니라 서비스, 금융, 영화 등 다양한 산업의 수입개방을 요구했다. 수입개방 반대운동 역시 농민만이 아닌 보험노조, 영화인의 운동으로 그 범위를 확대했다.

미군범죄 공론화, 반미 대중화
윤금이부터 효순이·미선이까지


90년대 들어서 학생운동은 그 힘을 많이 잃었다. '소련 몰락'으로 대표되는 냉전체제 해체, '문민정부'의 등장, 남북 화해분위기 조성 등 국내외 환경이 급격히 변화하면서 '사회주의 혁명, 군부독재 타도'를 내세운 학생운동의 호소력이 상당부분 쇠퇴한 것이다. 학생운동 조직이 축소되고 '운동권'에 대한 '일반 학우'의 관심도 줄어들었다. 90년대 초반까지 미문화원 방화 등 반미투쟁이 전개됐지만 학생운동의 반미열기도 축소됐다.

▲ 고 윤금이씨의 영정사진
ⓒ 주한미군범죄근절본부
반면, 미군범죄에 대한 저항이 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미군범죄근절운동의 도화선이 된 것은 92년 고 윤금이씨 살해사건이었다.

시골에서 상경해 봉제공장에 취직했다가 매매춘 시장에 유입된, 전형적인 '생계형 매매춘' 여성이었던 윤금이(당시 26세)씨는 동두천 자신의 방에서 처참한 시체로 발견됐다. 가해자인 케네스 마클 이병은 콜라병으로 윤씨를 때린 후 저항이 멈추자 항문에 우산을 찔러넣었고 자궁에는 맥주병과 콜라병을 쑤셔넣은 뒤 온 몸에 세제가루를 뿌렸다.

사건이 알려지면서 동두천지역대책위원회와 여성단체들이 공동대책위원회를 구성했고, 이 공대위는 주한미군 문제를 전담하는 최초의 상설조직 '주한미군범죄근절을위한 운동본부'로 전환된다. 이후 주한미군 범죄가 꾸준히 공론화되면서 사회문제로 인식되었지만 주한미군 사령부는 "한국에는 미군이 관련된 모든 사소한 사건을 부정적으로 확대시키는 집단이 존재한다(95년 5월 23일 성명)"고 주장했다.

반미운동은 2000년도부터 대중화되었다. 이태원 외국인 전용클럽 여종업원 김모(32)씨 살해사건의 가해자인 미군 매카시 상병이 공판을 앞두고 탈주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뒤이어 5월달에는 매향리 폭탄 투하사고가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7월에는 시민단체가 주한미군의 한강 독극물(포름알데히드) 방류 사실을 폭로했다.

▲ 지난 12월 7일 광화문 네거리를 가득메운 촛불시위대. 일민미술관 옥상에서 바라본 전경
ⓒ 오마이뉴스 남소연
사실 이전에도 주한미군 범죄나 미군기지 인근 주민들의 피해가 발생했지만 언론의 주목을 거의 받지 못했다. 달라진 것은 주한미군의 범죄가 아니라 대중들의 대미의식이었다. 결국 그 해 8월 한미 양국은 여론에 밀려 SOFA를 재개정했다.

그리고 2년 뒤인 2002년 '반미'는 더 이상 시민단체나 학생운동의 전유물이 아니다. 네티즌들과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촛불을 들고 광화문에 모였고 불가능해 보였던 미대사관 앞 시위도 치렀다. 시민들이 내건 '순수한 추모'와 '주권 확립'이라는 지금의 구호는 80년대의 반미와는 다른 새로운 흐름이다. 지금 한국사회에서 '반미운동'은 일대 전환기를 맞고 잇다고 하겠다.

덧붙이는 글 | * 참고자료

<한미관계의 재인식 1, 2>, 공병훈 외, 두리, 1990
<노근리에서 매향리까지>, 노근리에서매향리까지 발간위원회 편, 깊은자유, 2001
<미국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강치원, 백의,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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