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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동인문학상 시상식 현장. 흰 트레이닝복 바람의 사나이. 급기야 카메라 앞에서 딴청이다. 뚱한 표정, 작년 동인문학상 수상자 김훈이다. 이 사진은 11월 6일자 조선일보 사회면에 실렸다.

김훈은 1948년 5월 5일, 서울 종로구 청운동에서 '딸, 아들, 아들, 딸, 딸' 가운데 셋째로 태어났다. 소설가 김광주씨가 그의 아버지다. 김훈의 기억에 따르면 아버지는 매일 억겁의 술을 마셨다. 5년 동안 암을 앓았고 73년 작고했다. 가난했다. 아버지가 누워서 글을 불렀다. “거기서 점 찍어, 줄 바꿔"라고 했다. 김훈은 "그때 받아쓴 것이 문장수업이 좀 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김광주씨는 무협소설로 유명했다. 대표작인 '비호'는 "겨울이었다"라는 5글자로 시작한다.

세월이 거침 없이 흘렀다.
10년이 또 지나갔다.
그것은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었다.
상전벽해.(桑田碧海) (39쪽)

우지끈! 뚝딱!
두 팔로 겨우 껴안을 수 있을 만큼 굵다란 기둥이 당장에 부러졌다.
와르르! 높은 담이 졸지에 허물어져 앉았다. (237쪽)


글에서 쌩쌩 소리가 난다. 68년에 나온 책인데도 한자가 없다. 쉬운 책이다.

"소년인 나는 내 아버지의 쓰라린 위장을 위하여 남비를 들고 시장거리로 가서 해장국을 사 오곤 했다. 어느 겨울 새벽에 나는 해장국집 문지방에 낀 얼음 위에 자빠져서 끊는 국물을 뒤집어쓰고 허벅지에 화상을 입었다. 나는 선지와 콩나물을 바지 위에 뒤집어 쓰고, 빈 남비를 들고 춥고 어두운 새벽거리에서 울었다. 나는 이 세월들과 내 아버지의 생애를 뛰어 넘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하면서 이를 갈면서 울었다 (주여, 망자를 당신 품 안에)." (문학기행, 5쪽)

모든 부자는 피로 얽혔다. 김훈과 그의 아버지는 글로 얽혀있다. 이 '다짐'과 '이 갈음'은 김훈의 30년 글쓰기에서 드러난다. 김훈은 신문사에서 어렵고 난해한 글을 썼다.

'풍경과 상처'(1994), '자전거 여행'(2000), '칼의 노래'(2001). 김훈의 책 가운데 좀 팔리는 책이다. '풍경과 상처'와 '자전거 여행'은 둘 다 기행문이지만 한참 다른 글이다.

말라서 가벼운 바람은 동백숲이나 인간의 겨드랑 밑에서 바스락거리고 바람이 원양(遠洋)으로 몰려가버린 날 바다는 내륙 깊숙이 나포되어 끌려온 물의 포로처럼 사나운 산맥의 발치에 이마를 들이대고 고요하다. 강진만의 바다는, 살아서 떠나고 씻김굿 시나위 자진머리의 끄트머리를 더듬어잡고 눈먼 혼백으로 돌아오는 생산자의 바다가 아니라, 거세된 바다의 추상형이다. (44쪽)

'풍경과 상처'는 이런 글이다. 대학 교재로도 사용되었고 독자들은 사전을 끼고 읽는다. '자전거여행'은 착한 글이다.

지금 영일만의 오징어떼들은 어촌마을 앞바다까지 바싹 몰려와서 바닷물이 끓듯이 우글거린다. 오징어 산지도매가격이 날마다 들쭉날쭉해서 한 마리에 160원 하는 날도 있고 200원 하는 날도 있지만, 오징어떼들이 이처럼 가까이 와 준 것은 신나는 일이다. 작은 포구마을은 밤이고 낮이고 잠들지 않는다.

6년이 걸렸다. 무슨 일일까? '빗살무늬토기의 추억'(1996)이 크게 망한 게 전환점이 된 것 같다. 이 책은 500부 정도 팔렸다. 스스로 실패한 작품이라 평한다.

도심으로 진주한 바람의 유격대들은 빌딩 사이의 좁고 깊은 계곡을 휩쓸거나 가각의 모퉁이를 굽이칠 때마다 방향과 속력을 바꾸어 길길이 날뛰었고, 빌딩의 벽에 부딪쳐 깨어져나가는 바람의 대열들은 도심의 계곡 사이로 빠져나가면서 맞은편에서 달려온 바람의 대열과 뒤엉켜 땅바닥으로 깔리거나 하늘로 치솟아 오르며 쓰레기를 날렸다.

읽어주기 싫다. 이 책은 지금도 도서관에서 늘 '대출가능'이다. 짧은 문장의 절정은 ‘칼의 노래’다.

-칼을 다오.
군관이 칼을 나에게 건넸다. 나는 그 칼을 뺐다. 푸른 날 위에서 쇠비린내가 풍겼다. 총수관 김수철이 내 팔을 잡았다.
-나으리, 어찌 손수..
-비켜라. 피 튄다.
김수철은 물러났다. 나는 아베를 베었다. (161쪽.)


11문장, 77자이다. 가장 긴 문장이 14자고 짧은 것은 3자다. 자신도 이 급박한 문체를 자랑스럽게 여긴다.

"칼의 노래를 쓸 때는 그 문장을 다 버리고 그 주제에 맞는, 아주 짧고 그야말로 칼의 모습을 닮은 문장을 만들어낸 거죠. 그러니깐 휘모리나 뭐 자진모리까지는 아마 갔을 거예요."
(인터넷 서점, ‘알라딘’과의 인터뷰 中)


어느새 무협소설을 닮아있다. 누군가는 '김훈이 아버지와 화해를 이루었다'고 말했다.

'칼의 노래' 성공이후, 김훈은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음풍농월'이 꿈이라고 했다. 한 달도 안되어 한겨레신문 사회부기자로 입사한다. 2002년 2월의 일이다.

본래 김훈의 기사는 기사가 아니었다.

공깃돌만한 콩털게와 바늘 끝만한 작은 새우들도 가슴에 갑옷을 입고 있다. 그 애처로운 갑옷은 아무런 적의나 방어의지도 없이, 다만 본능의 머나먼 흔적처럼 보인다. 그래서 바다의 새들이 부리로 갯벌을 쑤셔서 저의 조개를 잡아먹을 때, 그것들의 최후는 죽음이 아니라 보시다. (자전거 여행 중 中 '만경강에서', 62쪽)

겨울에는 찻잎을 주전자 바닥에 먼저 넣고 끓는 물을 붓는다. 여름에는 끓는 물을 먼저 붓고 물 위에 찻잎을 띄운다. 봄, 가을에는 끓는 물을 절반쯤 붓고 찻잎을 넣은 다음 그 위에 다시 물을 붓는다. ('다신전')

왜 그래야 하는지, 그렇게 해서 차 맛이 달라지는지를 물을 수는 없지만, 왠지 그래야 할 것 같다. 낙원은 일상 속에 있든지 아니면 없다. 청학동으로 가는 계곡에서 5월의 차나무 밑은 푸르다. 자전거는 청학동 어귀에서 방향을 돌려 화개골짜기로 되돌아왔다. (자전거 여행 중 中 '찻잔속의 낙원', 108 쪽)


지금 김훈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현장'이다. 문화부 기자 시절, 김훈은 자연에서 놀았고 문학에 취해 있었다. 이제는 "현장에서, 현실을 파악하는 게 신바람 난다"고 말한다. 올해 2월 27일 '철도청 달력엔 빨간 날이 없다'를 시작으로 현재 11월 26일까지 총 108개의 기사를 썼다. 칼럼이 35개, 나머지는 기사다. '김훈의 거리 칼럼'은 이름부터 의미심장하다. '다른 누구처럼 앉아서 쓰는 게 아니다, 현장에서 쓴다'는 자부심이다. 구제역 돼지를 파묻고, 여객기가 떨어지고, 데모를 하는 그 거리에 있다는 뿌듯함이다.

김훈은 "기사는 객관성을 중시하지만 근본적으로 주관적인 것, 보고서가 아닌 장르다. 개별적 인간인 기자가 직감과 감수성이 발휘해야 한다. 건강한 판단에 의해 쓰여진 기사가 좋은 기사다"라고 말했다. 기사는 주관적이므로 자신을 100% 드러내는 것이 정직하다는 고집이다. 그의 글에 '~로 보인다' 혹은 '~로 보였다', 나아가 '~처럼 들렸다' 등은 빠지지 않는다. '~보인다'는 말은 "나는 이렇게 보인다, 너는 다르게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제 그는 추상적인 단어를 피한다. "혁명, 진보, 자유 같은 말은 국어사전에 있어도 내가 못쓰는 말이다. 이제 내가 쓸 수 있는 말이라는 것은 겨우 노랗다, 빨갛다, 춥다, 날이 어두워진다 같은 확실한 것들뿐이다." 그의 국어사전은 날로 얇아지고 있다.

김훈은 인용을 하지 않는다. 다른 칼럼리스트들은 인터넷이나 책을 뒤진다. 한 가지 사안에 대해 최대한의 정보를 제공한다. 김훈은 그런 것이 없다. 자신의 눈과 마음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만 쓴다. 11월 25일자 ‘김훈의 거리칼럼’이다. 기사 제목은 '오만한 미국'이다.

통지서가 발부됐다. 과태료를 내기 싫으면 30일 이내에 이의신청을 할 수 있다. 미군은 이의신청조차 하지 않았다. 납부기한이 지났다. 독촉장이 발부됐다. 미군은 다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같은 칼럼, 제목은 '취주악단의 남북화해 공연'.

북쪽 여가수들의 목소리는 다들 꾀꼬리 같았다. 그들의 노래에서는 노래하는 개인의 음색이나 내면이 들리지 않았다. 그들의 창법은 그들의 감격적 어조와 닮아 있었고, 그들의 미소와 애교는 학습된 정형성을 노출시켰다. 그 꾀꼬리 창법은 그들 사회에 무엇이 결핍되어 있는지를 알게 해주었다. 개별적인 인간의 사랑과 꿈을 노래하는 남쪽 대중음악에 비하면 북쪽 여성의 공연은 그다지 재미없었다. 그리고 남쪽의 이 재미가 그들의 귀에는 퇴폐와 타락과 무기력으로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군중들은 열광적인 박수와 함성으로 이 꾀꼬리같은 음악에 응답했다. 그 함성은 낯설게 느껴질수록 더욱 가까이 가려는 사람들의 열망으로 들렸다. (한겨레, 10월 15일)

김훈은 성격이 있다. 사표를 20번쯤 썼다. '안녕히' 3글자만 쓴 적도 있다. 그는 "모든 게 다 불화 때문"이라고 말한다. "회사에 들고나는 것 모두 나에겐 10분도 안 걸린다"고 말한다. 이 불화는 김훈이 인기를 얻으면서 대상을 달리한다. '선배, 후배와의 불화'에서 '세상과의 불화'로 옮아갔다.

언론인 오효진(59)씨는 김훈의 성격을 "지랄 같다"고 했다. '불화'가 아니라 '성질'이다. 김훈은 한겨레신문으로 들어와 '씨네21'에 '유토피아 디스토피아'칼럼을 썼다. 친일과 여성에 대한 대담한 글이었다. 싫은 소리를 몇 번 들었다. 당장 그만 뒀다. 지금은 다른 작가 3명이 3주에 한번씩 돌아가며 쓰고 있다.

독자들은 황당하다. 싫은 소리 않겠다고 할 수도 없는 일이다. 의견은 다양하다. 다양해야 의견이다. 매체에 글을 실으면서 '동의나 침묵, 양자택일'을 요구하는 것은 독재다. 김훈은 "나의 독자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했다. 사랑만 받겠다는 것인가? 못된 심사고 못난 심사다. 독자들 안에서만 글쟁이 김훈이 존재한다. '빗살무늬 토기의 추억'이 500부 아닌 5만부가 팔렸다면? '자전거여행'이 외면당했다면? 김훈의 글은 달라졌을 것이다.

한겨레신문이 이미 7번째 회사다. 그가 럭키세븐에서 그만 안정을 찾길 바란다.

덧붙이는 글 | 2002년 월간조선 2월호와 인터넷서점 알라딘이 제공하는 인터뷰를 참고 했습니다. 그 밖에 주석을 달지 못한 부분이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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