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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납토성, 잃어버린 '왕도(王都)'를 찾아서> 특별전에서는 최근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발굴 ·조사한 풍납토성 출토 미공개 유물 2백여 점을 국내 최초로 전시, 서울에 도읍 했던 한성백제의 역사와 문화를 보여준다.
ⓒ 서울역사박물관
게르만 용병 오도 아케르가 서로마제국을 멸망시킬 즈음, 지금의 서울 풍납동 일대에서도 동족간에 벌어진 전쟁의 결과 한 왕조가 사라지고 있었다.

서기 475년 음력 9월, 전열을 정비한 고구려 장수왕 휘하의 3만 대군은 지금의 광진구 워커힐호텔 뒷산에 있던 아차산성을 출발, 한강 바로 맞은편의 백제 위례성(慰禮城)으로 들이닥쳤다.

위례성을 격파한 데 이어 고구려군은 보다 남쪽에 있던 몽촌토성까지도 초토화시키고, 당시 백제의 왕이었던 개로왕과 왕비, 왕자 등 왕족을 몰살하고 군사와 주민 등 8천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부여에 뿌리를 두었지만 각기 다른 왕조를 열었던 고구려와 백제, 동족상잔의 전쟁을 치른 끝에 결국 주몽의 아들 온조가 세운 '한성백제'는 최후를 맞게 된 것이다.

'한성백제'는 백제가 수도를 지금의 공주(공산성)로 옮겼을 때의 '웅진시대'와 부여(부소산성)를 수도로 했을 때의 '사비시대'와 구분하기 위한 것으로, 지금의 서울 풍납동 일대는 기원 전 18년(성벽에서 나온 목탄과 나무에 대한 방사성탄소 연대 측정 결과) 온조왕에 의해 처음 건국된 이후 문주왕이 고구려군에 의해 살해된 아버지 개로왕의 시신을 수습하지도 못한 채 공주로 수도를 옮겨간 기원 후 475년까지의 493년간을 백제가 수도로 이용했던 곳이다.

'풍납토성의 발굴성과와 의의' 시민강좌 안내
12월 6일(金) 오후 2시, 서울역사박물관 강당에서

<풍납토성, 잃어버린 '왕도(王都)'를 찾아서> 특별전시회의 일환으로 오는 12월 6일(金) 오후 2시, '풍납토성의 발굴성과와 의의'를 주제로 시민강좌가 열린다.

1) <경당지구 발굴조사에서 드러난 풍납토성의 풍경>, 권오영(한신대 국사학과 교수)
2) <풍납토성 발굴조사 성과와 의의>, 신희권(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사)

장소는 서울역사박물관 강당이며, 서울역사박물관은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에서 내려 경희궁 방향으로 걸으면 10분 안에 닿을 수 있다.
입장료는 어른이 7백원, 청소년(18세 이하)이 3백원, 어린이나 65세 이상 노인은 무료이다. 입장료를 내면 이번 특별전시회뿐만 아니라 서울역사박물관의 다른 전시품들도 볼 수 있다.

문의: 02-724-0144 (www.museum.seoul.kr)
/ 권기봉
이는 백제가 문주왕이 수도를 공주로 옮긴 475년부터 성왕에 의해 다시 수도를 옮긴 538년까지의 '63년'과, 성왕 때부터 나당(羅唐) 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하는 660년까지의 '122년'보다 훨씬 긴 시간을 한성에 수도를 두었다는 것으로, 오히려 지금의 서울이 백제 역사에 있어 시기적으로 가장 오래 머물렀던 수도 지역임을 알 수 있다.

보통 말하는 백제의 '찬란한 문화'만을 고려 대상으로 놓고 본다면 어쩔 수 없지만, 서울 정도의 범위를 조선이 아니라 삼국시대까지 놓고 본다면 서울 정도의 역사는 근 2천년이나 거슬러 올라가게 되는 셈이다. 지난 1994년 서울시가 멋지게 치른 '서울 정도 600주년 행사'들이 무색해지는 대목이다.

주류에 의해 무시당한 풍납토성, 드디어 빛을 발하다

▲ 서울역사박물관의 이번 특별전시회는 풍납토성의 미공개 유물을 처음으로 공개한다는 점 이외에도 풍납토성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몽촌토성과 이성산성, 석촌동고분군 등 당시 주변 유적들을 함께 조망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풍납토성이 차지하는 위치를 설명하고 있어 이해도를 높이고 있다.
ⓒ 권기봉
이렇게 근 2천 년 동안이나 우리 시야에서 사라졌던 한성백제의 왕성이 마치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사라졌던 폼페이가 드러나듯 1500백여 년이 흐른 지금 우리들 눈앞에 나타나게 된 데는 한 줏대 있는 학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 아닐까 싶다.

선문대 이형구 교수가 바로 그 사람으로, 그는 이미 1962년경부터 당시까지 대부분의 학자들이 한성백제의 수도인 하남 위례성(河南慰禮城)이 현재의 몽촌토성이나 하남 춘궁동 일대라고 주장할 때 거의 홀로 풍납토성(風納土城)이 백제 초기의 왕성 유적이라고 주장해 왔다. 물론 일제시대 때에도 풍납토성이 하남 위례성이라는 주장이 있긴 했지만 그저 방어용 성(城) 정도로 인식했을 뿐 그리 주목을 받진 못했다.

풍납토성이 하남 위례성이 맞다는 확신을 가진 이 교수는 지난 97년 <서울 풍납토성 백제왕성 실측조사연구>라는 보고서를 내기도 했지만, 당시 삼국사기 백제본기 초기 기록을 불신하던 이병도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던 한국 고고학계에서는 이런 이형구 교수의 주장을 그저 무시하기만 할 뿐 자세히 들여다보려 하지 않았다.

1925년 당시 한강에 났던 큰 홍수로 성벽의 일부가 파괴되기도 했던 풍납토성은, 이형구 교수가 1997년 신정 연휴기간 동안 현대아파트 공사 현장에 몰래 들어가 다량의 백제 토기 등 유물들을 수습하고 공론화시키는 과정에서 비로소 세인들의 주목을 받게 된다.

이어 곧바로 국립문화재연구소를 주축으로 발굴 작업에 들어갔고, 그 결과 풍납토성이 바로 하남 위례성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들이 속속 드러나게 된 것이다. 이전까지는 주류 사학계에서 이 교수의 주장을 그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식으로 무시를 해왔지만 이제 명확한 증거가 나온 이상 유야 무야 넘어갈 수가 없었다.

▲ 선문대 이형구 교수 등에 의해 풍납토성의 중요성이 부각된 이후 국립문화재연구소와 한신대 박물관 등에 의해 송파구 풍납동 일대의 경당연립주택 신축공사부지와 풍납현대연합주택조합부지, 남양연립 재건축조합부지, 삼화연립 재건축사업부지, 외환은행직장조합아파트 신축부지, 미래마을 재건축조합부지 등에서 발굴 조사가 진행되었다.
ⓒ 국립문화재연구소
일단 하남 위례성을 쌓을 당시 평지에 성을 쌓았다는 문헌 기록 등에 의하면 구릉에 들어선 몽촌토성 등은 어울리지 않고, 발굴 조사에 의해 밝혀진 규모 면에서도 훨씬 큰 규모와 큰 건물이나 제사 시설 등이 발견되는 등 풍납토성이 당시 하남 위례성으로 더 유력하기 때문이다.

즉 풍납토성이 한성백제의 수도인 하남 위례성이 맞든 아니든 간에 연인원 수십만 명을 동원해도 수십 년은 걸릴 정도로 큰 규모의 풍납토성을 쌓기 위해서는 대규모의 인력 동원이 필요했을 것이고, 갑작스럽게 대규모 인원을 모을 수는 없을 것이기에 이미 이 시기에 중앙집권적인 절대왕권이 이 지역에 명확하게 자리잡고 있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기원 후 200년 경 축조가 끝났을 것으로 추정되는 풍납토성을 축조할 정도의 실력을 갖춘 집단은 백제였다는 판단에 이르게 된다.

8톤 트럭 20만대 분량의 흙으로 쌓은 동양 최대의 판축토성

잃어버린 백제 5백년을 찾아가는 이번 답사는 뚜벅이처럼 걷는 답사라 생각하고 신발끈 단단히 조여매고 길을 나선다. 대중 교통을 이용하면 편리한데, 새로 뚫린 지 얼마 안 되 깨끗하기만 한 지하철 8호선 천호(풍납토성)역에서 내려 한강 방향으로 걷자. 그러면 100m도 채 가지 않아 왼쪽으로 풍납토성의 거대한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 부분은 전체 풍납토성 중 존재가 남아 있는 동쪽 지역의 일부분으로, 주변에 높은 건물 등이 없어 직접 성벽에 올라설 경우 제법 멀리까지 내다보인다. 그러나 주변 성벽을 넓게 조망할 수 없는 좁은 지역이기에 계속 걷기로 하자.

▲ 풍납토성은 나무 기둥을 세우고 나무판을 댄 뒤 뻘흙과 모래, 나무 껍질 등을 켜켜이 쌓아 만든 판축토성으로, 내벽의 일부 구간에서는 식물유기체를 얇게 깐 것이 10겹 이상 확인되는데 뻘흙을 부은 후 나뭇잎이나 나무껍질 등을 1cm 정도 깔고, 다시 뻘흙을 까는 과정을 10회 이상 반복했다.
ⓒ 서울역사박물관
일단 성 안쪽, 즉 성벽을 기준으로 해 지하철역의 반대쪽인 한강 쪽을 따라 남쪽으로 계속 걷다 보면 작은 시장 골목이 나타나면서 성벽은 끝나게 된다.

여기서부터는 '바람드리('풍납(風納)'의 순 우리말)길'을 따라 주택가 골목을 걸어야 한다. 조금 유심히 주변을 둘러보았다면 답사를 시작한 곳부터 이곳까지 오는 데도 각 골목길의 이름들이 '토성길'로 통일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토성길과 바람드리길을 지나 다시 토성이 시작되는 곳에 서면, 이제 성벽의 모습이 부족한 감은 있지만 그래도 넓게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그에 앞서 토성이 다시 시작되는 풍납1동 154번지 일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곳은 풍납토성 성벽이 있는 자리에서는 다소 벗어난 듯 해 보이지만, 일반적으로 성의 바깥쪽에 적의 침임을 막기 위한 해자(어느 정도의 폭과 수심을 가진 연못)를 파는 것이 일반적이므로 풍납토성의 발굴 및 복원에 있어 무시할 수 없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자리의 중요성을 아는지 모르는지 서울 송파구에서는 대지 5백여 평에 40억 원을 들여 지하 1층 지상 3층, 연면적 930 평 규모의 구민회관을 건립하기로 하고 기공식까지 치른 바 있다.

일단 이런 건축물이 들어서게 되면 다시는 그 땅 밑을 파보기 힘들다는 특성상, 일단 문화유적이 발견되면 진행중인 공사를 모두 중단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관청이 나서서 문화재 파괴를 앞장선다니 아연 실색할 따름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이후 이 사실을 접하게 된 시민들의 여론이 들끓어 송파구의 이런 결정이 취소되고, 주차장으로 이 부지를 활용하기로 했다는 점일 것이다. 실제로 지금도 이 자리는 주차장으로 쓰이고 있다.

▲ 일제 시대 때도 풍납토성이 백제의 왕성인 '하남 위례성'일 수 있다는 말이 있기는 했지만 그냥 방어용 성일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이후 선문대 이형구 교수 등에 의해 풍납토성이 하남 위례성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지만, 삼국사기 백제본기 초기 기록을 불신하던 당시 고고학계에서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 국립문화재연구소
여기서부터 성벽을 따라 남서쪽으로 발길을 옮기다보면 토성의 전체적인 모습이 어느 정도 눈에 들어오게 되는데, 그 규모에 다시 한번 놀라게 된다. 그저 책이나 인터넷 등에서 수치로 접하던 규모와 실제로 눈으로 보는 규모 사이에는 느낌의 차이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풍납토성은 전체 길이가 지금은 홍수 등으로 유실되어 볼 수 없는 서벽을 포함해 자그마치 3.5km(현재 남아 있는 것은 2.2km 정도)에 이르는 총 면적 26만여 평의 국내 최대 규모이자, 아시아 최대 규모의 판축토성(나무 기둥을 세우고 나무판을 댄 뒤 진흙과 모래, 나무껍질 등을 켜켜이 쌓아 만든 성)이다.

또한 성벽의 높이나 폭에서도 일정하지는 않으나 각각 9~15m와 43m에 이르는 등 그 규모가 매우 큰 편인데, 들어간 흙의 양만 해도 대전산업대 김영묵 교수에 의하면 8톤 트럭으로 20만 대 분량에 해당하는 154만 톤에 이른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계산의 편의상 성벽의 모양을 이등변삼각형으로 가정해 나온 최소량인데, 실제의 성벽은 이보다 부피가 큰 2단의 사다리꼴 모양을 하고 있으므로 실제로 성을 쌓는 데 들어간 흙의 양은 상당량 늘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게다가 일반적으로 성 밖에는 해자도 있게 마련이어서 그 규모는 더 커질 것으로 보이는데, 혹자는 성벽 넓이만 100m에, 높이도 아파트 5층 규모에 버금갈 정도라 추정하기도 한다.

'개발'이냐 '보존'이냐의 문제를 넘어

▲ 풍납토성 뒤로 아파트 단지가 보인다. 기원전 18년 백제 온조왕은 지금의 서울을 도읍으로 삼아 서기 200년 경 풍납토성 축조를 끝낸다. 근 2천 년의 역사가 공존하는 공간이 바로 눈앞에 있다.
ⓒ 권기봉
그러나 이렇게 방대한 규모와 중요성을 자랑하는 풍납토성이건만 좋은 후손을 만날 복은 없었던 모양이다. 앞서 말한 송파구민회관 건립건도 그렇거니와 풍납토성 안쪽에 이미 들어선 지 오래인 대단위 아파트 단지들, 심지어 선문대 박물관 등에 의해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을 때조차 아파트 건설 재개 문제로 서로간에 소송까지 가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한 것을 보면 말이다.

이런 일이 일어난 데에는 이곳이 황무지가 아니라 주택이 밀집한 지역이라는 데 있었고, 나아가 단독주택들이 있는 지역이라기보다는 점차 대단위 아파트들이 들어서는 아파트 재건축 지역에 있었기에 더욱 문제가 불거졌던 것으로 보인다. 즉 문화재를 보존해야 한다는 사람들과 재건축을 통해 들어서게 될 아파트의 입주민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싸움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단순히 '개발'이냐 '보존'이냐의 차원을 넘어, 이곳이 초기의 한성백제를 알 수 있는 유적이라는 것 하나만으로도 상당한 의미를 갖는다는 점이다. 즉 풍납토성이 정말 한성백제의 왕성인 하남 위례성이든 아니든 간에 이미 초기 한성백제를 연구할 수 있는 귀중한 유적으로서 '개발이냐 보존이냐'라는 양자택일의 차원을 넘어선다고 할 수 있다.

▲ 풍납토성은 전체 길이가 지금은 홍수 등으로 유실되어 볼 수 없는 서벽을 포함해 자그마치 3.5km(현재 남아 있는 것은 2.2km 정도)에 이르는 총 면적 26만여 평의 국내 최대 규모이자, 아시아 최대 규모의 판축토성이다.
ⓒ 권기봉
물론 지금이야 시민단체를 비롯한 여론에 의해 보존 방침이 내려진 상황이긴 하지만, 입주자들에게 있어서는 풍납토성 발굴이 무령왕릉 발굴에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중요하든지 말든지 간에 원치 않는 것일 수도 있겠다. 아니 그럴 가능성이 크다. '왜 2천여 년 전의 얼굴도 잘 모르는 조상들 때문에 후손들이 피해를 보아야 한단 말인가'하고 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일선 행정부처의 적극적인 문화재 보존 의지와 시민들의 관심 및 이해이다. 풍납토성만 하더라도 재건축이라는 흔치 않은 행운을 위해 구청은 물론 건축업자, 입주예정자들이 풍납토성 터를 파헤쳐 갔지만, 결국 깨인 시민들의 관심으로 그러한 '몰상식'을 막아낼 수 있었던 게 아니었나.

우리는 이미 일제의 문화말살 정책과 지난 60~70년대를 거쳐오며 개발 논리에 세뇌 당한 채 온갖 문화유적들을 마구 파헤쳤고 광교를 도로 아래에 묻어 버린 바 있다.

이제는 문화유적이 아파트보다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더 가치가 큰 것임을 자각시켜야 할 것이며, 동시에 아주 먼 조상 때문에 후손들이 피해를 보지 않도록 적절한 보상 및 이주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특히 입주자들에게 있어서는 자신들이 재산상의 피해를 보지 않고도 조상의 유산을 보호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해당 관청에서는 더욱 적극적인 방식을 고안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한편 이형구 교수가 문헌과 답사를 통해 주장한 하남 위례성의 풍납토성설과 관련, 학계의 주류가 따르는 '통설'이라는 것이 얼마나 큰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지, 그리고 통설과는 다른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그저 무시당하기나 하는 우리의 학문 풍토를 다시 한번 돌아볼 일이다.

▲ 역시 자동차와 도로가 우선시되는 서울 답게 풍납토성도 곳곳이 도로로 인해 잘려 있다. 이렇게 잘린 부분에 성문이 있었을 것이라 추정하는 사람도 있지만 아직 확인된 바 없다.
ⓒ 권기봉

▲ 조상들 때문에 후손들이 피해를 당하는 것은 아닐까? 풍납토성의 중요성이 알려지기 시작한 계기는 아파트 건설 공사였다. 물론 지금이야 시민단체를 비롯한 여론에 의해 보존 방침이 내려져 더 이상의 고층 건물이 들어서진 않지만, 이미 많은 아파트들이 들어섰다.
ⓒ 권기봉

▲ 문화재 파괴는 비단 돈을 바라보는 기업가나 몰상식한 일부 사람들에 의한 것만은 아니다. 송파구에서도 풍납토성 내 대지 5백여 평에 구민회관을 건립하기로 하고 기공식까지 치렀지만, 여론에 의해 이런 결정을 취소하고 이 부지를 주차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 권기봉

▲ 풍납토성에 서면 2천년 전 백제인과 현대인이 함께 살아가는 공간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기도 한다. 처음 발굴·조사할 당시에는 시간에 쫓겨 구렁이 담 넘듯 서두른 감이 없지 않지만, 그나마 국가지정문화재(사적 제11호)로 선정되어 평화로워 보이기만 하다.
ⓒ 권기봉

▲ 때로 후손들의 관심은 지나치기도 한 모양이다. 지하철 8호선 천호역 부근 풍납토성을 따라 둘러쳐진 담장에는 공주 무령왕릉의 왕비 관모 장식품 문양이 '백제금관'이라는 이름으로 그려져 있다. 풍납토성은 기원 전 18년부터 서기 475년까지의 초기 한성백제 시대라는 점에서 다소 어긋난 문양이 아닐까 싶다.
ⓒ 권기봉

▲ 풍납토성이 아파트를 짓지 못하게 해 후손들에게 피해(?)를 끼치기도 한 반면 도움도 주는 모양이다. 풍납토성 주변 상점의 간판들 중에 유독 '토성'이라는 말이 자주 눈에 띤다.
ⓒ 권기봉

▲ 후손들의 '토성' 이용은 비단 상점에만 그치지 않는다. 길 이름 등에서도 '토성길'이나 '토성북길' 하는 것을 보면, 풍납토성이 이곳 서울 송파구 풍납동의 트레이드 마크가 아닌가 싶다.
ⓒ 권기봉

▲ <풍납토성, 잃어버린 '왕도(王都)'를 찾아서> 특별전에 전시되어 있는 토기들로, 수많은 토기들이 안정적이고 연속적인 층위를 가진 문화층에서 출토되어 토기 제작기술의 특징과 변천상을 밝히는 데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발굴된 토기들로 볼 때 풍납토성은 군사적 용도 못지 않게 주민들의 주거지 역할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 권기봉

▲ 상하수도관이나 배수관 등에 쓰였을 것으로 보이는 토관(土管)으로, 레고(LEGO) 블록과 비슷한 형식이다. 즉 양쪽이 '凸'과 '凹' 모양이어서 서로의 홈에 끼울 수 있게 되어 있다. 길이는 16~17cm이며 구멍의 직경 2cm 내외로 규격화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풍납토성 내에 로마와 같은 규격화된 상·하수 시설이 있었을 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해본다.
ⓒ 권기봉

▲ 불에 탄 후 땅에 묻혀 탄화된 돗자리로, 주거지로 추정되는 곳에서 발견되었다. 현재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소장.
ⓒ 권기봉

▲ 풍납토성이 한강변에 가까이 위치해 있던 만큼 주민들의 어로 활동도 활발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는데 실제로 다양한 모양과 크기의 어망추(漁網錘)들이 발견되었다. 이외에도 한 집에서 사용하던 일체의 생활용기들, 즉 시루나 완, 뚜껑 등의 토기와 U자형 삽날, 도자(刀子) 등의 철기 등이 그대로 출토되어 당시의 생활상을 복원하는데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다
ⓒ 권기봉

▲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청동초두
ⓒ 권기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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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찾아 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저서로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알마, 2008), <다시, 서울을 걷다>(알마, 2012), <권기봉의 도시산책>(알마, 2015) 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