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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수(가명, 43·사업)씨와의 인터뷰는 어렵게 성사됐다. 처음 전화연락을 했을 때 그는 "나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도 아니고 인터뷰할 내용도 없다"며 한사코 고사했다.

20일 오후 3시 기자는 무례를 무릅쓰고 그의 일터로 찾아갔다. 그는 외근 중이었다. 다시 통화해 인터뷰를 부탁하자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알았다. 하지만 일이 있어 빨리는 못들어가니 기다리라"는 답을 했다. 그로부터 2시간 여를 기다린 끝에 김씨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 김한수(가명)씨는 고문 피해자다. 그의 수사를 지휘했던 이는 정형근 현 한나라당 의원. 김씨는 맥주 한잔을 앞에 놓고서야 말문을 열었다.
ⓒ 오마이TV 곽기환
그는 근처 식당으로 취재진을 안내했다. 그리고 맥주 한 병을 앞에 놓고서야 말을 꺼냈다. 나중에서야 한 얘기지만 "술 한잔 안하고서는 얘기할 수 없을 것 같아서"가 이유였다.

김한수씨는 고문 피해자다. 자신의 말대로라면 "그 시절 운동했던 친구들은 다 겪었던 구타"였다고 했으나 지금도 후유증에 시달린다. 2년전에는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보상심의위원회(이하 민주화심의위)에 명예회복 및 보상신청을 했고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을 받았다. 그러니 국가도 인정한 명백한 '고문 피해자'인 셈이다.

그런데 그의 사연은 좀 특별하다. 당시 김씨의 사건을 맡았던 이가 한때 '공안검사'로 이름을 떨쳤던 정형근 현 한나라당 의원이기 때문이다.

김씨는 대학을 졸업한 뒤 야학 교사로 있던 1981년 9월 초 서대문 경찰서로 연행됐다. '전두환 정권 타도 집회'에 참여했고 관련 전단지를 돌렸다는 혐의다.

수사과정에서 그는 순순히 "반정부 시위에 참여했고 전두환 정권 타도를 외쳤으며 전단지도 내가 만들어 뿌렸다고 자백했다"고 말했다. 숨길 것이 없이 없었다. 당연히 했어야할 일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찰은 "공범자를 불라"며 무려 15일간이나 그에게 무차별 가혹행위를 저질렀다.

그는 당시 상황을 떠올리며 "모든 고문은 무릎을 꿇려놓은 상태에서 이뤄졌다. 그렇게 꿇려놓은 상태에서 3명의 수사관이 팔을 비틀어 뒤로 꺾고 무릎을 내려찍고 허리를 발로 차는 등 구타행위를 했다"며 치를 떨었다.

그 후유증으로 무릎연골과 한쪽 고막이 파열됐고 척추에 이상이 생겼다. 한쪽 각막에도 상처가 있었고 그 이후부터 시력이 약화돼 "지금은 짝눈이 됐다"고 했다.

그리고 말했다.

"그 XX(정형근 의원) 참 악질이었어요. 내가 당시 9월 11일에 잡혀 들어가서 모든 사실을 다 인정했음에도 '집회·시위범에 단독범이 있을 수 없다. 재조사하라'고 해서 보름간이나 나를 가둬놓고 구타를 했지요."

그는 보름 간 서대문서와 남대문서를 넘나들며 조사를 받았다.

학벌도 고문 이유… 정형근 의원에 의한 '박노해 고문의혹'서도 불거진 내용

▲ 김씨는 81년 당시 '전두환 정권 타도 집회 참가 및 불법 전단지 배포' 혐의로 서대문서에 연행돼 이후 보름 간 수사를 받았다.
ⓒ 오마이TV 곽기환
"전문대밖에 안다닌 XX가"라는 것도 고문이유였다. 그는 당시 수사관들이 "학벌도 없는 놈이 어떻게 4절지 전단지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적을 수 있느냐"면서 "배후를 밝히라"며 때렸다고 했다. 학벌도 고문 이유였던 셈이다.

이는 사노맹 사건으로 안기부에 연행돼 역시 정 의원의 지휘로 치도곤을 당했던 박노해씨가 99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정형근 의원의 '학벌·엘리트주의적 계급주의 기준"과도 일맥상통하는 내용이다.

당시 박씨는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사노맹의 대표가 나라고 하자 정 국장은 '너는 대학도 못 나왔고 너의 시나 글은 모두 서울대 출신들이 써준 것 아니냐'고 말했다"는 증언을 한 바 있다.

그는 두 개의 경찰서를 넘나들며 15일간 고문을 비롯한 조사를 받고 나서야 검찰로 넘겨졌다.

검찰로 넘겨지고 나선 정형근 의원도 대면할 기회가 있었다. 심문과정에서 총 15여번정도를 봤는데 그중 2∼3번은 정 의원에게 직접 맞기도 했다.

김씨는 "'안 불어 이 XX야'라며 팔을 높이 쳐들어 뺨을 쳐 내리는 건 정형근 심문의 특징이자 기본"이라고 했다. 이밖에도 정 의원으로부터 팔이며 등을 구타당했다. 하지만 이는 자신의 친구에 비하면 약과였다.

"정형근이 진짜 심하게 때릴 때는 지하 조사실로 끌고 가요. 내가 아는 친구가 바로 지하까지 끌려갔죠. 사실 그 친구는 나한테 타자기 빌려준 죄밖에 없는 친구였어요. 운동을 한 것도 아니고. 그런데 정형근의 목적은 무조건 '엮는 것(조작)'이니까요."

그가 말한 "그 친구"는 바로 그의 자백에 의해 끌려온 친구였다. 그는 "재판 후 1년 6개월 징역을 살고 나와서도 그 친구얼굴을 볼 낯이 없었다"며 고개를 떨구었다. 강한 고문에 의해 의지가 꺾이고 말았다는 굴욕감을 느껴야 하는 것, 그것은 고문의 또다른 후유증이었다.

"자유롭게 살고 싶지만 정형근 고문 진상규명 활동 펼쳐지면 나설 것"

외형적으로 그는 꽤 안정돼보였다. 자그마한 사업체 하나를 부부가 같이 꾸려나가고 있었고 활발히 외부활동도 펼치고 있었다.

그가 인터뷰 요청을 거절한 건 "뭘 두려워해서도 걱정해서도 아니라 그저 내 얘기가 정치적으로 악용될까봐"라고 했다. 그리고 "내일은 그저 같이 운동했던 사람들이면 으레 당했던 일이지 특별한 일이 아니"라는 말도 몇번이나 했다.

하지만 "정형근같은 XX는 다시는 있어서는 안될 인물"이라며 몸을 떨었다. "나중에라도 정형근 관련 사건에 대한 진상을 규명하는 노력이 펼쳐진다면 언제라도 증언할 용의가 있다"는 것이다.

▲ 김한수씨.
ⓒ 오마이TV 곽기환
인터뷰가 어느정도 정리되자 김씨는 "민주화보상심의위에 보상신청을 한 건 돈을 받기 위해서도 무엇도 아닌 내 잃어버린 10년을 찾기 위해서"라고 했다. '왜 우리 아빠는 이렇게 힘들게 살까'라고 혹시나 원망의 마음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자식들에게 "아빠의 과거는 이러했다"고 일말의 변명을 하고 싶어서였다. 그것은 '역사의 기록'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한가지 이유를 더 들었다.

"후대에라도 정형근의 이런 행적이 알려지길 바라는 마음에서죠."

또다시 그는 힘주어 말했다.

"정형근에게 당한 자는 나 아니라도 많을 거예요. 당시 나와 같이 운동했던 사람들만해도 그렇죠. 그자는 '공안시국사범 전문'이었어요. 누구도 풀 수 없는 난제를 도맡아 했던 '공명심 넘치는 공안 검사'였단 말이죠. 조직 조작사건, 간첩 조작사건 등 그가 만들어낸 사건이 수도 없잖아요. 어떻게 하든 처벌받아야 해요. 정형근이란 인물이 가진 상징성 자체가 없어져야 합니다."

그는 요즘도 텔레비전 뉴스를 보면 답답하다고 했다. 그가 그렇게 존경했던 '운동권의 선배 이재오'와 그토록 치를 떨었던 '악질검사 정형근'이 서로 손을 맞잡고 거대 보수 야당의 '실세'로 군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는 "예전 운동했던 때처럼 곧 좋은 세상이 올 것"이라는 희망은 버리지 않고 있다. 민주화심의위에 보상신청을 해 기록을 남긴 것도, 인터뷰에 응한 것도 이 희망을 조금이라도 키워보기 위해서다.

두시간여의 인터뷰를 마치고 그는 다시 자신의 터로 돌아갔다. 그의 말처럼 민주화운동 관련자들에 의해 정형근 의원의 고문 의혹사건이 들춰진 것은 비단 이번뿐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진실이 감춰지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의혹규명의 노력은 더욱 활발히 이뤄져야 한다.

"알 사람은 다 아는" 사건이 수없이 일어나고 관련 의혹이 수없이 제기되는 동안 국가는 정형근 전 공안 검사에게 3개의 표창과 훈장(검찰총장표창·보국훈장천수장·보국훈장국선장)을 주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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