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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두 번째 기사에서 이홍규, 이회창, 오제도, 선우종원씨 등의 증언에서 나온 주장들 사이의 사실관계를 냉정하게 따져보았다. 이번에는 이 미스터리 사건의 핵심적인 쟁점을 점검해 보기로 한다. 이 발굴작업의 와중에서 우리는 현대사의 어두운 그늘 속에 묻혀 있던 고통스런 진실의 파편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필자주>

의혹1: 이홍규는 왜 '구속 검사'의 이름을 못 밝히나?

▲ 대법관 시절의 이회창 후보(위 오른쪽)와 <월간조선> 1997년2월호 기사(위).
이홍규씨를 구속한 "동료 검사"가 과연 누구인지를 알아볼 차례가 됐다. 이 의문과 관련, 논쟁에 불을 붙인 것은 <월간조선> 1990년 10월호에 실린 '새 대법원장 누가 되나'라는 기사이다. 이 기사가 나오게 된 데에는 까닭이 있었는데, 약간의 배경 설명이 필요할 듯하다.

당시 제10대 대법원장 이일규씨가 정년퇴임을 하면서 그 자리를 이어받을 차기 사법부 수장의 후보로 10여 명이 떠올랐다. 이 기사는 그들의 신상을 소개하고 분석하기 위해 기획된 것이었다. 마침 대법원장 후보군 중에는 이회창씨(당시 대법관)도 포함돼 있었다.

그런데 이회창씨를 소개하는 와중에 아버지 이홍규씨의 '좌익혐의 구속사건'이 거론됐다. 물론 <월간조선> 기자는 그 사건을 이홍규-이회창 부자의 "소신과 강직함의 뿌리"를 드러내기 위한 소재로 다뤘다. 그는 예의 충북도지사 독직사건과 관련한 사연을 소개한 뒤 이렇게 기사를 이어갔다.

"집권층에 난리가 났다. 이 때문에 이홍규옹은 이듬해인 1949년 국회프락치사건 등 매카시 선풍이 휩쓸 때 당시 오제도 검사에 의해 '좌익검사'로 지목돼 구속, 갖은 고문을 받는 등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우익 성향의 잡지인 <월간조선>이 국회프락치사건(우익세력은 대표적인 '좌익사건'으로 규정하고 있음)을 '매카시 선풍'의 하나로 규정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이홍규씨의 "수난"을 강조하려다 보니 그런 표현이 나온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그건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뒤에서 소개할 법조프락치사건도 사실 국회프락치사건의 연장선 위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혀 예기치 않은 곳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이 기사에서 "구속·고문검사"로 이름이 거명된 오제도씨(당시 변호사)가 강력하게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결국 <월간조선>은 다음호인 11월호에 오씨의 반론기사를 게재해야 했다. 당시 오씨가 주장한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이홍규씨에 대한 구속영장에 사인을 한 적도 없을뿐더러 그 사건 전후에 걸쳐 이씨 사건에 관여한 적조차 없다. 검사 구속은 법무장관과 검찰총장의 결재 없이는 할 수 없으며 이씨 구속의 경우 명백히 내가 담당하지도 않았으며 따라서 고문수사도 전혀 사실이 아니다.

이번 기사를 보고 당시 서울지검장이었던 이태희 선배에게도 전화를 걸어 이씨를 구속한 이가 누구냐고 물어보았더니 이 선배도 처음에는 '너무 오래된 일이라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한 후 나중에 다시 나에게 전화를 해 '이홍규씨에게 물어보았더니 오제도씨가 아니라 다른 검사였는데 이름은 밝히지 않더라'고 전했다."


당시 <월간조선>은 오제도씨의 이 반론을 소개한 뒤 다음과 같이 해명했다.

"이번 기사에 대해 오제도씨가 항의함에 따라 당시 구속됐던 이홍규씨에게 확인한 결과 이씨는 '당시 나에 대한 구속과 조사는 다른 검사가 했으며 오씨와는 무관하다'고 답변했다. 법조계의 한 인사는 '건국 후 혼란 상황에 좌익사건 수사를 오씨가 앞장서 처리하다 보니까 좌익 관련 사건 수사는 곧 오씨가 모두 한 것으로 알려져 사실이 와전된 것 같다'고 말했다."

논란은 여기서 끝나는 듯했다. 그러나 7년이 흐른 뒤 이 문제는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번에도 <월간조선>이 전면에 나섰다. 이 잡지의 우종창 기자가 1997년 2월호에 게재한 '철저검증-대쪽·소신의 대명사 이회창'이라는 기사에서 이 문제를 다시 들춰낸 것이다. 더욱이 당시 그는 오제도씨를 직접 만나기까지 했다. 인터뷰 도중 나온 오제도씨의 발언 중에서 특별히 눈길을 끈 것은 다음과 같은 대목이었다.

"이홍규씨 본인이 자신을 구속시킨 수사검사를 잘 알고 있을 텐데 왜 지금까지 이름을 밝히지 않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진상을 밝히기 위해 이홍규씨가 빨리 수사검사의 이름을 공개하라."

아울러 우종창 기자는 이 기사에서 "선우종원 변호사도 이홍규 검사를 구속한 검사의 이름을 모른다고 말했다"고 썼다.(그러나 선우씨는 1년 후 회고록을 내면서부터는 "오제도 검사가 이홍규 검사를 구속했다"고 말을 바꿨다. 그가 왜 오락가락 했는지를 시사해주는 기이한 사연은 다음 기사에서 소개한다)

이로써 이 사건은 더욱 난마처럼 얽히게 됐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홍규-이회창씨 부자의 이해할 수 없는 태도에 있었다. 진실을 밝히라는 오제도씨의 촉구에 불투명한 태도로 일관한 것이다. 우선 1997년 2월 당시 우종창 기자가 이회창 후보(당시 신한국당 고문)와 나눴던 일문일답을 보자.

- 검사로 있던 선친을 구속시킨 검사는 누구였습니까.
"나도 구체적으로 몰라요."

- 선친께서 언급한 적도 없습니까.
"사건을 직접 취급한 검사가 누구인지는 모르고, 누가 배후에서 조종했다는 얘기는 듣고 있어요."

- 당시 공안검사였던 오제도, 선우종원씨는 자신들과 관련이 없다고 합니다.
"잘 모르겠어요."

자신에게 불리한 질문이 나오면 "모른다"는 말로 일관했던 5공·광주청문회 당시의 어떤 증인들을 연상케 하는 답변이다. 결정적 대목에서 끝내 답변을 듣지 못하고 '미완성 기사'를 쓸 수밖에 없었던 우종창 기자는 결국 이런 고백을 해야 했다.

"이홍규검사 구속 사건에 대해 이회창 고문측에서는 '모략을 당했다. 배후인물도 알고 있다'는 입장이지만, '배후인물'로 알려진 사람의 주장은 다르다. 이 고문의 성장 과정에서 가장 영향을 준 사람이 그의 부친이라는 점에서 이 사건은 재조명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추적기사'의 대가(大家)인 우 기자조차 사실 확인의 숙제를 남긴 채 기사를 끝낸 것이다. 그러나 이후 <월간조선>이나 <조선일보>는 이 숙제를 풀어보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더욱이 "배후인물로 알려진 사람의 주장은 다르다"라는 대목에서 우리는 우 기자가 이홍규-이회창씨 부자측으로부터 "배후 인물"의 실명을 전해듣고 그 당사자에게 직접 확인취재까지 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

사실 이 문제가 처음 불거졌을 때 이홍규씨가 자신을 구속하고 고문했다는 검사의 이름을 분명히 댔다면 모든 의혹과 논란은 깨끗하게 종식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제3자가 보기에도 답답하게(?) 그는 그 '간단한 방법'을 쓰지 않았다.

독자들도 생각해 보라. 자신을 연행한 서울지검 직원들의 소속 부서(수사과)와 숫자(5∼6명), 연행된 날짜(1950년 3월 26일)는 물론이고 "배후인물"까지 정확히 기억해 내면서도 정작 자신에게 '좌익혐의'를 뒤집어씌우기 위해 4주 동안 물고문, 전기고문, 잠안재우기 등을 자행한 '반공검사'의 이름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이 도대체 말이 되는가.

이 사건의 최대 미스터리도 바로 여기에 있거니와, 이홍규-이회창씨 부자에게는 무언가 숨기고 싶은 사연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의혹2: 이홍규는 법조프락치사건과 전혀 관련이 없나?

▲ 1949년 국회프락치사건에 연류도니 김약수 제헌국회 부의장(왼쪽), 이 사건을 계기로 법조계에도 '메카시 열풍'이 몰아쳤고 그런 분위기 속에서 이홍규씨(오른쪽)가 1950년 3월 좌익혐의로 구속돼 심한 고문을 받았다.
앞의 기사에서 설명했듯이, 송석찬 의원은 2002년 2월 국회에서 "이홍규는 남로당 프락치로 좌익 활동을 하던 중 1950년 법조프락치사건에 연루돼 구속됐다가 6·25 전쟁이 터지자 공산당이 내려오면서 석방됐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당시 법조프락치사건의 담당검사였던 오제도씨와 선우종원씨의 주장은 이와 다르다. 우선 오제도씨는 1997년 2월호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1948년 국회프락치사건이 발생하자 판·검사프락치, 경찰프락치에 대한 수사가 3차에 걸쳐 진행됐는데, 나는 1차 수사를 담당했다. 남로당 입당원서를 낸 서울지검 차장검사 김모씨도 구속했지만 이홍규란 이름은 수사 대상에 오르지 않았다"고 말했다.

선우종원씨도 2002년 6월 27일자 <뉴스메이커>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확신에 찬 증언을 한 바 있다.

"그 사람(이홍규-필자주)은 남로당하고는 관련이 전혀 없어. 그 사건(이홍규 좌익혐의 구속사건-필자주)은 같은 사무실을 쓰던 오제도 검사가 담당했지. 내가 '무슨 죄목이냐'고 하니까 '보안법 위반'이라고 하더군. 법학자동맹에 가담했다고 하던데, 법학자동맹사건은 내가 담당했으니까 내가 더 잘 알았지. 결국 아무 혐의도 못 잡고 공소취하를 하고 말았다니까."

두 사람의 주장만 들어보면 더 이상 문제될 게 없다. 그러나 법조프락치사건이 어떤 성격의 사건이었는지 확인하고 나면 문제가 그렇게 간단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오제도씨의 증언에도 나오듯이 법조프락치사건은 국회프락치사건의 연장선 위에 놓여 있다.

그래서 잠시 옆길로 빠져 국회프락치사건을 짚어보려고 한다. 법조프락치사건의 전초전이었던 국회프락치사건은 1949년 전반기부터 불기 시작한 '매카시 선풍'의 도화선 역할을 했다.

이승만 정권은 1949년 4월 김약수 부의장과 노일환 의원 등 13명의 진보적 소장파 의원들을 남로당 프락치 혐의로 전격 구속했다. 당시 소장파 의원들은 1948년 7월 출범한 제헌국회에서 '반민특위(反民特委)' 결성을 추진하고 국가보안법 제정에 반대했으며, 외국군 철수 결의안을 제출하고 평화통일안을 상정했으며, 농지개혁법 제정 과정에서 지주 세력을 옹호한 한민당과 달리 농민의 입장을 적극 옹호했다.

(당시 <조선일보>는 이들 소장파 의원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사설을 실어 북진통일을 주장하는 이승만의 측근들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사실 <조선일보>야말로 '미군철수'를 제일 먼저 주장한 신문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거기에는 호남의 대지주 출신인 김성수가 이끌고 있는 <동아일보>와의 경쟁관계도 한몫을 했다고 보여진다. 당시 <조선일보>를 경영하던 방응모는 이북 출신(평북 정주)으로 해방과 함께 38선이 그어지면서 독자가 한꺼번에 줄어들자 심각한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평화적 자주통일을 불온시하고 북진통일만을 진리로 여기고 있던 이승만 정권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국회프락치사건은 바로 이런 분위기 속에서 터졌다.

특히 검경수사본부의 오제도 검사는 38선에서 체포한 '의문의 여인' 정재한의 국부(局部)에서 일부 소장파 의원이 박헌영에게 보낸 암호문(실제로는 당시 신문에 나온 평이한 내용으로 이뤄져 있었다고 함)을 발견했다는 다소 황당한 발표를 했는데, 이 암호문(?)이 사건의 결정적 증거가 됐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해방 이후부터 지금까지의 대다수 공안사건이 그랬듯이, 이 사건에도 몇 가지 의혹이 있다.

첫째, 무엇보다 먼저 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던 정재한 여인이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하지도 않았고, 국회조사 때조차도 끝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수많은 의혹을 불러 일으켰다. 둘째, 당시 국회에서 이 사건의 배경 등을 두고 수많은 논란이 제기됐으나 재판 도중 전쟁이 터지고 말았다. 그 바람에 사건의 전모와 진상이 규명되지도 못한 채 그대로 정사(正史)로 굳어져 버린 측면이 강하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법조프락치사건에 대해 알아보자.

<법률신문> 2001년 7월 19일자에 게재된 '법조프락치사건' 연재기사 2편에 따르면, 1949년 7월경 김영재 서울지검 차장검사(오제도씨가 말한 "차장검사 김모"-필자 주)와 강중인·백석황 변호사 등 11명이, 그해 12월에는 김진홍 서울지검 검사 등 판·검사 5명이, 이듬해인 1950년 1월에는 김두식 서울지법 판사와 변호사 등 9명이 남로당 프락치로 몰려 오제도, 선우종원, 정희택 검사에 의해 잇따라 구속됐다.

<월간조선>은 1990년 10월호에서 이를 '매카시 선풍'으로 규정한 뒤 이홍규 검사가 그런 공안 태풍 분위기에 휩쓸려 구속된 것이라고 보도한 바 있다. 그런데 사실 이 사건은 한국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국회프락치사건과 마찬가지로 사건의 진상이 정확히 드러나지 않은 상태에서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우리는 그러한 한계를 전제로 한 채 이 사건의 전후 맥락을 찬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당시 판사, 검사, 변호사 등 상류층 인사들이 '뭐가 부족해서' 무산계급을 위한다는 남로당에 가입하게 됐는지 그들의 육성을 통해 직접 들어보자. 1949년 11월 26일 열린 공판에서 피고인 강중인(변호사)은 자신이 남로당에 가입한 이유를 이렇게 진술했다.

"일정(日政) 당시에는 내가 내 한 몸을 구하기에 여력이 없었습니다. 8·15 해방을 맞이하자 피고는 이때야 깨달은 바가 있었습니다. 이는 다름이 아닙니다. 내가 어찌하면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일할 수 있을까 함이었습니다. 해외에서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투쟁하던 위대한 애국자들이 해방된 조국을 찾아 들어옴을 볼 때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그후 피고는 남로당에 가입을 작정하였던 것이며, 법맹(법학자동맹-필자주)에도 초창기부터 가입하였습니다."(<서울신문> 1949년 11월 27일자 재인용)

강중인은 진술 말미에서 "남로당이 대한민국을 변란케 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루 전날인 11월 25일에 열린 공판에서도 피고인 백석황(변호사)은 "가입 당시 남로당이 비합법적 정당이 아니었으며 또 남로당 전체가 대한민국을 전복 책동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고 진술했다.

실제로 이 사건 재판부의 주심을 맡은 송문현 판사는 검찰이 5년을 구형한 검사 6명에게 모두 무죄를 선고했으며, 이봉규 판사는 검찰의 지나친 구형량을 비웃기라도 하듯 가벼운 선고를 내렸다. 재판부가 무죄를 선고하거나 형량을 낮춘 이유는 "남로당이 합법적 정당이던 미군정 시절에 그것도 국가보안법이 공포되기 이전에 가입했고, 그후 남로당이 불법화됨에 따라 탈당은 하지 못했으나 특별한 활동은 하지 않았는데 이제 와서 죄를 묻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그러나 당시 이 사건 수사를 주도했던 오제도, 선우종원, 정희택 검사는 이러한 판결에 즉각 반발했다. 자신들이 구속한 법조인들이 '남로당의 프락치'가 분명하다며 사법부와 지상 논전까지 불사한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법조계에 침투한 남로당 프락치'들이 벌였던 '범죄행위'는 무엇이었을까.

▲ 선우종원 검사.
이와 관련, 선우종원 검사는 1992년에 발간했던 회고록 <사상검사>에서 "이들은 주로 현직 판·검사, 변호사들로서 합법을 가장하여 검거된 남로당원을 뒤로 빼돌리기 공작을 벌였으며 사식과 물건들을 차입해 주는 등 중앙지도부의 지령을 받아 움직였다"고 주장했다. 1949년 11월 25일 피고인의 신분으로 법정에 섰던 김영재 차장검사(7월 23일 구속)도 "남로당 당원의 구속을 인정상으로 돌보아 준 사실이 있었다"고 자신의 '범죄혐의'를 인정한 바 있다.

우리는 여기서 1949년 7월∼1950년 1월경에 법조프락치사건으로 구속된 법조인들의 '범죄혐의'와 1950년 3월경 "남로당 당원을 풀어주었다는 이유로" 구속된 이홍규 검사의 '범죄혐의'가 공교롭게도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둘 사이에 차이가 있었다면, 이홍규 검사는 '대단히 운이 좋게도' 당시 권력의 최고 실세였던 장면 유엔 대사(얼마 후 이승만에 의해 국무총리로 발탁됨)의 적극적인 구명(救命) 도움을 받았다는 점이다.

물론 이회창 후보는 회고록에서 아버지의 "좌익혐의가 발견되지 않아 석방됐다"고 주장했지만 말이다(그러나 선우종원씨는 "장면 총리의 청탁으로 석방될 수 있었다"고 증언했다).

한편 오제도, 선우종원 검사는 자신들이 담당했던 법조프락치사건 혐의자 명단에서 이홍규 검사의 이름을 발견할 수 없었다고 증언했다. 그런데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이 법조프락치사건이 미제(未濟)의 사건이었다는 사실이 변수로 작용한다.

우선 피고 백석황 변호사가 1949년 11월 25일 법정에서 진술한 바에 따르면, 법학자동맹 맹원은 약 200명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앞의 <법률신문> 기사에서 살펴보았듯이 오제도, 선우종원 검사 등이 구속한 숫자는 전체 맹원의 8분의 1에 불과한 25명이었다. 더욱이 재판이 끝나기도 전에 한국전쟁이 발발하는 바람에 관련자들은 모두 석방됐으며 법조프락치사건 수사도 끝까지 진행되지 못한 채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물론 이홍규씨가 법학자동맹 맹원이라는 증언이나 증거는 아직까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좌익혐의로 구속된 것이 법조프락치사건의 연장선 위에 있었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당시 수많은 검사, 판사, 변호사가 이씨에게 적용된 것과 똑같은 '빨갱이' 혐의로 끌려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법조프락치사건과 이홍규씨의 관련성이 전혀 없다는 주장이 타당성을 얻기 위해서는 더 많은 검증작업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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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환 기자는 월간 말 취재차장으로 일하고 있으며 언론, 지역, 에너지, 식량 문제에 관심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