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1981년 2월 나는 대학원 졸업식에도 못 가보고 군에 입대하게 되었다. 당시 이공계 교수요원이 부족하다 하여 신설된 병역특례제도에 따라 석사과정을 마치고 전방에서 1년 현역으로 근무하게 되었고 (이 제도는 여러 부작용 때문에 다음 학번부터는 석사장교로 바뀌었다) 103보충대를 거쳐 26사단(일명 '불무리'사단)으로 배치되었다.

26사단 신병교육대에서의 호된 훈련을 마치고 연대본부로 가서는 보직이 104로 변경되어 4중대, 즉 중화기중대로 배속되었다. 우리 연대의 각 대대에는 4중대 옆에 '감호중대'라 불리운 중대가 하나 더 있었는데 삼청교육대를 우리는 그렇게 불렀다.

▲ 신군부의 '사회정화' 시책에 부응, 삼청교육대에서의 인권유린을 외면하고 "순화교육이 순조롭게 이뤄지고 있다"는 논조로 일관한 80년 8월13일자 중앙일간지 사회면 머리기사.
그 감호중대 주위엔 철조망이 쳐져 있었고, 4개 중대병력이 교대로 24시간 경계를 섰다. 그 곳에서는 일석점호 시간만 되면 기합으로 침상에서 구르는 소리, 쿵쾅거리는 소리, 악악거리는 소리가 신참으로 가뜩이나 불안한 내 마음을 뛰게 만들었다.

그들은 비가 오는 날이면 팬티바람으로 마당에 불려나와 각종 취침(앞으로취침, 뒤로 취침 등) 형태의 얼차려를 받았고 김밥말이와 지금은 이름도 잊혀진 각종 기합으로 시간을 보냈다. 온몸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진흙투성이가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어느 일요일날 나는 총에 대검을 꽂고 감호중대 경계를 섰다. 그런데 앞에 아주 어린아이가 보이는 것이었다. 나는 나지막한 소리로 불렀다. 그는 내 가까이로 왔고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우리는 서로 다른 쪽을 바라보며 섰다. 멀리서 볼 때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병과 감호생간의 대화는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철조망 2m 전방에 설 수 없도록 되어 있었으나 주위의 눈을 피해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몇 살이냐고 물었다. 놀랍게도 12살이라고 하였다. 어떻게 들어오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구두닦이를 하고 있다가 그냥 잡혀왔다고 했다. 무슨 죄를 지었느냐고 물었다. 자기도 모른다고 했다. 12살짜리 어린 아이가 죄를 지으면 무슨 죄를 지었겠는가. 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또 다른 날 감호중대 정문 앞에서 보초를 서게 되었다. 내 앞에는 감호중대 담당 조교가 서 있었고 이것저것 지시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연세가 한 70은 되어 보이는 한 노인이 다리를 절뚝거리며 다가와 구부정한 허리에 엉성한 자세로 경례를 붙이며 "송조교님께 용무 있어 왔습니다"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손자뻘되는 그 조교는 반말로 "뭐야?"하며 거만하게, 모자를 눌러써서 보이지도 않는 눈을 치켜뜨며 묻는 것이었다. 그러자 그 노인 깎듯한 존대말에 말도 더듬거리며 잘 잇질 못했다. 갑자기 나의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저런 x잡놈...' 무슨 세상이 이런 세상이 있는가 싶었다.

감호생들, 즉, 삼청교육대생들은 거의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의 모습을 하고 사람의 언어를 썼을 뿐, 짐승이었다. 그렇게 취급받았다. 아침이면 사방에 총을 든 사병의 감시를 받으며 남루한 작업복에 통일화를 끌고 팔을 휘두르며 사역을 나가 하루 종일 삽질과 흙나르기, 각종 공사로 중노동에 시달렸다. 그리고 밤엔 한시도 쉴 틈 없이 기합을 받는 그런 세월을 보냈다.


관련
기사
삼청교육대, ' 순화교육 ' 명목 인권유린 그 때 우리 언론은 어디에 있었나?


어느 날 나는 야간매복을 나가게 되었다. 1.24 사태 때 우리 연대의 관할지역으로 김신조 일당이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통과한 이후로 군기가 엄청 세지고 그 길목에 항상 매복을 서게 되었다고 했다.

고참병과 2인 1조가 되어 이곳 저곳에 구덩이를 파고 들어가 총만 빼꼼히 내놓고 밤새 교대로 지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개는 고참은 잠을 자고 신참이 밤을 새기 마련이었다. 그 날 나는 아침까지 눈을 붙이지 못했다. 그리고 부대로 돌아왔다. 이제 막 쉴 참이었다. 왜냐하면, 야간매복 근무조는 아침 훈련이 면제되고 오전에 잠을 잘 수 있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대 행정반 앞으로 벌건 눈에 지친 몸을 이끌고 온 나에게 날벼락(?)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옆 대대의 감호생 한 명이 탈영하여 잡으러 가야하는데 매복근무조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벌건 눈에 핏발이 서고 머리는 뜨거워져 김이 나는 듯했다.

실탄이 지급되었고 탄창에 끼워졌다. 그 길로 우리 조는 감호생이 도주했다는 산으로 향했다. 우리 대대와 인근 대대 병력이 모두 동원되어 산밑에서부터 이 잡듯이 샅샅이 뒤지며 올라갔다. 비트를 만들어 은신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며 모두 나뭇가지를 꺾어 땅을 쑤셔댔다. 등 뒤에서는 "발견시 사살해도 좋다. 사살하면 헬리콥터 타고 고향간다"며 대대장이 짚차를 타고 돌아다니며 독려를 했다.

순간, 내가 헬리콥터를 타고 귀향하는 모습이 상상되었다. 내가 탄 헬기 밑에서 동네 사람들이 손을 흔들며 환영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당시 사병들은 모두 그런 꿈을 꾸고 있었을까? 모두들 신이 나서 땅을 마구 쑤셔대며 산을 타고 올라갔다.

며칠 뒤 그 감호생이 잡혔다던가, 죽었다던가 하는 소문이 들렸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한없이 부끄럽다. 그 때문에 놓친 반나절의 잠 때문에, 그 분풀이로 애꿎은 산을 나뭇가지로 쑤시며 눈이 벌개서 올라갔던 것이. 참으로 부끄럽다. 나의 1981년의 봄과 여름은 그렇게 지나갔다.

지난 10월 1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삼청교육 전과정에 대한 철저한 진상조사와 피해자 명예회복과 배상을 정부에 권고키로 했다 한다.

26일에는 삼청교육 배상 소멸시효를 놓고 과거와는 다른, 엇갈린 판결이 나왔다 한다. 삼청교육대 피해자 및 유족 등이 삼청교육대에 끌려가 구타와 가혹행위 등으로 피해를 봤다며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원고패소 판결이 나왔다는 것이다. 어처구니없는 판결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판사가 삼청교육대 피해자들이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는 처참한 광경을 목도했다면 감히 그런 판결을 내 놓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무런 죄도 없는 그들에게 인간 이하의 취급을 하며 씻을 수 없는 수모를 안겨준 국가. 그 국가가 저지른 야만적 범죄행위가 세월이 지났다고 해서 덮일 수는 없는 것.

재판부는 손해배상 소멸시효를 따지는 모양이나, 국가가 저지른 그런 반인륜적 범죄에 시효를 따지는 것 자체가 수준 낮은 일이다. 오히려 국가의 그런 범죄행위가 부끄러워서라도 나서서 하루빨리 해결을 촉구해야 할 일이다.

그리고 정부에 권고해서 될 일이 아니다. 강제해야 한다. 이제라도 공소시효 적용을 배제하는 특별법을 제정해서라도 그들의 명예를 회복시켜주고, 그 동안 그들이 겪었을 육체고생, 마음고생, 시간 등등 모든 면에서 배상을 해주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그들의 억울함을 풀어줘야 한다.

나는 삼청교육대 피해자들이 인간 이하의 핍박을 받는 그 현장에 있었고, 내 눈으로 그 광경을 목도한 사람이다. 그런 나의 양심이 말한다. 삼청교육대 피해자에 대한 명예회복과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하라.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대자보>와 하니리포터에도 올렸습니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여인철 기자는 카이스트의 감사와 연구교수를 지냈습니다. 친일청산에 관심이 많아 오래 민족문제연구소 지부장을 지내고, 운영위원장을 역임하였으며, 지금은 장준하정신을 되살리기 위한 '장준하부활시민연대'의 공동대표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대학에 출강하면서 '코칭으로 아름다운 세상' 만들기와 '에듀코칭'을 통한 학교교육 혁신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