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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8시에 일어나다. 일어나자마자 하늘을 보는 것이 이제는 습관이 되었다. 하늘에는 구름이 낮게 깔리고 태백의 산봉우리들은 안개 속으로 숨어 버렸다. 태백 재래시장 떡집에서 점심으로 먹을 찰떡 한 덩어리를 샀다.

김희정 씨에게 그 동안 여러모로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귀빈장여'관을 나섰다. 태백 버스터미널에서 아홉 시 이십 분 상사미행 완행버스에 몸을 실었다. 어제는 미처 몰랐는데 길가의 밭이란 밭에는 거의 모두 배추가 심어져 있다. 태백이 고냉지 채소재배로 유명하다더니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버스는 25분만에 피재를 넘어 상사미에 도착했다. 아침을 굶은 터라 상사미 '수석식당'에서 라면으로 아침을 먹었다. 밥은 아직 준비가 안 되었다고 한다. 이 마을에도 배추밭이 많이 보인다. 상사미에도 안개가 자욱하다.

10시 30분 상사미를 떠나 임도를 따라서 걷는다. 오늘은 제발 비가 오지 말아야 할텐데... 신발이 아직 덜 말라서 축축하다. 15분만에 어제 내려왔던 백두대간의 능선에 올라 선다.

▲ 한의령에서 태백여성산악회원들이 잠시 쉬고 있는 모습
ⓒ 임종헌
그때 여성들로만 구성된 태백여성산악회 백두대간 종주대를 만났다. 얼핏 열댓 명은 되어 보인다. 지리산에서부터 '태백여성산악회'라고 써 있는 꼬리표를 보면서 왔는데 여기서 만나다니 무척이나 반갑다. 그 중에는 제천서 왔다는 여성도 있었다. 제천에서 '쌍동이 원룸B동'을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또 도서출판 '사람과 산' 태백주재기자인 김부래 씨도 만났다. 그는 태백여성산악회 백두대간 종주대를 수행하면서 취재하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한 여성산악인이 취를 넣어 만든 가래떡과 포도즙을 준다.

태백여성산악회원들과 함께 구부시령까지 동행을 하기로 한다. 40분만에 한의령에 닿았다. 한의령은 삼척시 도계읍과 태백시 상사미를 잇는 재다. 여기서부터 백두대간은 태백과 삼척의 시계가 된다. 한의령에도 안개가 짙게 깔려 있다. 태백여성산악회원들은 한의령에서 산제를 지내고 간다고 한다. 산제가 끝나고 음복주를 한 잔씩 돌리는데 나는 산행을 생각해서 사양을 했다. 한 여성대원이 술대신 오징어를 준다. 나는 산에서는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한의령 한 켠에는 '백인교군자당'[百人敎君子堂]이란 현판이 붙은 사당이 있다. 김부래 씨의 이야기로는 이 고개는 원래 한의령이 아니라 건의령[巾衣嶺]이었다고 한다. 려말선초 이성계에게 충성을 거부한 고려의 유신들이 이 재를 넘을 때 망건과 옷을 다 벗어 던지고 갔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한다. 출발하기 전에 여성 종주대원들은 손에 손을 맞잡고 애국가를 부른다. 애국가가 울려 퍼지자 한의령에는 경건한 기운이 감돈다.

▲ 한의령 정상에 있는 백인교군자당
ⓒ 임종헌
백두대간 종주대원들이 먼저 출발하고 난 다음 잠시 쉬었다가 가기로 한다. 나도 곧 다시 출발한다.안개가 이슬방울이 되어 얼굴에 스친다. 간간이 노오란 말나리꽃이 눈에 띈다. 말나리[한약명:백합]는 윤폐지해[潤肺止咳]와 청심안신[淸心安神]의 효능이 있어서 기침과 불면증을 치료하는 데 쓴다. 꽃도 예뻐서 관상용으로도 가치가 있는 식물이다.

오후 12시 30분 푯대봉을 왼쪽에 두고 오른쪽으로 돌았다. 한동안 내리막길을 내려가자 다시 오르막길이 나타난다. 평평한 언덕에 다다라서 점심을 먹고 가기로 한다. 태백여성산악회원들과 함께 점심을 먹었다. 여성들이어서 그런지 갖가지 음식과 반찬을 내놓는다. 한 여성대원이 도시락 하나를 주어서 뜻하지 않게 포식을 했다. 참외도 한 쪽 얻어 먹었다.

점심을 먹고 구부시령을 향해 떠난다. 그녀들은 오늘 구부시령까지만 간다고 하면서 나에게 거기서 자기들과 함께 하산하여 하루 쉴 겸 묵어가라고 권한다. 그것도 괜찮을 것도 같아 그러겠다고 하였다. 도계 시도말로 내려가는 삼거리를 지난다. 울타리가 쳐진 목장을 만나 할 수 없이 우회를 해야만 했다.

2시 30분 997.4m봉에 오르다. 정상에서 잠시 땀을 식힌다. 사방은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숨쉬기조차 곤란하다. 오늘도 경치를 보기는 다 틀린 일이다. 안개를 헤치며 비탈길을 내려간다. 고만고만한 봉우리가 연달아 나타난다.

3시가 조금 넘어서 구부시령에 도착했다. 아름드리 갈참나무 밑에 무덤만하게 쌓여 있는 돌무더기가 보인다. 평평한 언덕이 꽤 넓다. 구부시령은 태백 하사미동 외나무골과 도계 구수골을 잇는 재다. 또 이 재는 삼척 도계읍과 신기면의 경계가 되기도 한다. 김부래 씨가 구부시령의 유래를 들려준다.

옛날 아주 먼 옛날 이 고개마루에는 주막집이 한 채 있었다. 주막집에는 금슬이 좋은 부부가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이 죽었다. 하루 아침에 과부가 된 여인은 그렇게 한동안 홀로 외로이 살다가 이 재를 넘어가던 한 남정네와 눈이 맞아 짝을 이뤄 살게 되었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또 남편이 죽었다. 홀로 된 여인은 또 새 남편을 얻었다. 그 남편이 또 죽었다. 그녀는 또 새 남편을 들였다... 이렇게 해서 이 기구한 운명의 여인은 아홉 명의 남편을 모시게 되었다. 그 때부터 이 재를 아홉 구,지아비 부,모실 시,재 령을 써서 구부시령[九夫侍嶺]이라고 불렀다.

태백여성산악회원들의 간곡한 권유로 오영애 여사의 집에서 하루 묵어가기로 하였다. 오여사는 백두대간 종주대원 가운데 제일 고령자임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참가하고 있다고 한다. 그녀들은 일주일에 한 번 목요일을 택해서 백두대간 구간종주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다들 중년의 기혼녀들임에도 백두대간을 종주하는 모습을 보니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구부시령을 내려오다가 외나무골에 이르니 '예수원본부'가 보인다. 어제 '분수령목장'에서 만났던 젊은 여인이 밭에서 파를 심고 있다가 나를 알아본다. 무척이나 반가워 한다. 인연이란 묘하고도 묘한 것이다. 어제 베풀어준 친절에 대한 깊은 감사의 뜻을 그녀에게 전하고 길을 떠난다. 아마 내가 총각이었다면 서슴지 않고 그녀에게 프로포즈를 했을지도 모른다.

산악회원들과 함께 승합차로 태백시 삼수동 창죽마을 오영애 여사의 집으로 이동하여 마당에 있는 비닐하우스에서 삼겹살구이 파티를 열었다. 널찍한 철판 밑에 번개탄으로 불을 피우고 돼지고기를 올려 놓으니 기름이 쪽 빠지면서 맛있게 구워진다. 상추쌈에 삼겹살을 놓고 마늘과 풋고추를 된장에 찍어서 싸 먹으니 꿀맛이다. 소주를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산행중에 있었던 이야기로 꽃을 피운다.주는 대로 소주를 받아 마시니 금방 술기운이 오른다.

▲ 창죽리 홍종옥 씨와 오영애 여사 부부
ⓒ 임종헌
저녁 때가 되어 다른 산악회원들은 돌아가고 오여사, 그녀의 부군인 홍종옥 씨와 함께 셋이서 또 찹쌀동동주를 마셨다. 가히 명주라고 일컬을 수 있을 만큼 술맛이 좋다. 오여사는 창죽을 통과하는 백두대간에 태백시에서 조성하려는 공원묘지 반대운동을 이끌었던 맹렬여성이다.

백두대간을 훼손하면서까지 공원묘지를 조성하려는 태백시의 계획에 반대하는 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그녀는 전국 산악인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그 결과 백두대간의 주능선만큼은 훼손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마 오여사만큼 백두대간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도 없으리라.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밤 늦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늘 여기서 하루 묵어 가기를 잘 했다.

자리를 끝내고 오여사네 집 건넌방에 들었다. 장작으로 불을 넣어 뜨뜻해진 온돌방에 누우니 세상 부러운 것이 없다. 옛날 어린 시절 내가 초가집에서 살던 때의 추억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푸근한 마음에 젖어 잠들다.

2001년 6월 21일[목].흐림,안개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2001년 5월12일부터 7월10일까지 60일동안 백두대간을 순례한 기록입니다. 이 날은 상사미를 떠나 한의령과 997.4봉을 넘어서 구부시령으로 내려왔습니다. 마침 백두대간을 구간종주중이던 태백여성산악회원들과 동행을 하게 되었지요. 그 분들의 권유로 댓재까지 가려던 것을 포기하고 창죽마을 오영애 여사의 집에서 하루 쉬어가기로 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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