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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이회창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부친의 창씨개명과 관련, 한 역사학자가 추적한 결과를 역사전문 잡지에 실어 공개한 바 있다. 요지는 이 후보 부친의 경우 전형적인 일본인 성씨로 창씨(創氏)한데다 개명(改名)까지 한 사례여서 친일성이 엿보인다는 것이었다.

유명인사의 창씨개명이 화제가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 8월 5일 발행된 민주당 '당보'에서 김희선 의원이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 부친의 일제시기 경력(검찰 서기)을 문제삼은 것을 계기로 김대중 대통령의 창씨개명이 논란이 되기도 했었다.

▲ 아직 국내에는 '창씨개명'에 대한 제대로 된 연구성과가 없다. 사진은 지난 94년 기자가 펴낸 <창씨개명>의 표지
ⓒ 오마이뉴스 정운현
한나라당측은 특히 김 대통령이 대통령 취임 후 일본을 방문했을 때 목포상고 시절의 일본인 은사를 만나 "도요다(豊田)입니다"고 자신을 소개한 것을 두고 김 대통령의 '친일성'을 제기한 바 있다.

흔히 '친일성'이라고 하면 친일단체 간부나 총독부 관리로 들어가 일제 식민지 정책에 협조한 사람, 아니면 악질 고등계 형사나 친일 문필가들의 활동을 연상하기 쉽다. 그러나 조금 범위를 넓혀보면 일제 식민지 정책의 하나인 '창씨개명'을 통해서도 친일성 여부를 가늠해 볼 수는 있다.

먼저 창씨개명(創氏改名)은 1940년 2월 일제가 황민화 정책의 '완성편'으로 실시한 조선민족 말살정책 가운데 하나다.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조선을 대륙병참기지화하는 동시에 '내선일체'를 내걸고 조선인들의 황민화, 즉 '일본인화' 정책을 강행했다.

한 예로 매달 6일을 '애국일'로 정해 일장기를 게양토록 했으며, 일본 국가(國歌)인 '기미가요' 봉창, 동방요배, 그리고 신사참배를 강요하였으며, 이 해 12월에는 전국 각 학교에 일황의 사진을 배포하여 배례케 하였다. 다시 말해 이같은 '의식화 작업'을 통해 조선인을 일본인처럼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징병제 실시에 앞서 내선일체 완성편으로 창씨개명 실시

일제가 대다수 조선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도 '창씨개명'을 강제한 것은 1942년에 추진된, 이른바 '징병제' 실시를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는 1945년 3월 6일자 일본 내무성이 작성한 기밀문서에서 그 진의가 확인되고 있다.

"...특히 징병제를 실시한 오늘날 황군으로서 조금의 차별도 없이 (조선인 병사와 일본인 병사가) 혼연일체가 되어 군무에 계속 정진할 수 있고, 만일 현재 군대 안에 金모, 李모 등이 섞여 있다고 생각하면, 그 이득과 폐단 또한 저절로 밝혀지게 되고..."<'조선 및 대만 거주민 정치처우에 관한 질의응답', 내무성 관리국,1945.3.6>

▲ '창씨개명' 신고서 양식. 오른쪽은 씨(氏) 설정용, 왼쪽은 명(名) 변경용임.
ⓒ 오마이뉴스 정운현
창씨개명은 1940년 2월 11일 일본의 '기원(紀元) 2600년'을 맞아 한반도 전역에서 실시됐다. 접수마감은 이로부터 6개월간인 동년 8월 10일까지. 이 제도가 실시되자 초창기 조선민중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우리 속담에 '성을 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우리의 고유 성씨에 대한 조선인들의 집착은 거의 목숨과 바꿀 만큼 강렬한 것이었다.

전남 곡성의 류건영(柳健永)은 당시 미나미 총독에게 창씨제를 반대하는 엄중한 항의서를 보내고 58세를 일기로 자살했다. 또 전북 고창의 의병출신 설진영(薛鎭永)은 창씨에 불응하면 자녀를 퇴학시키겠다는 학교측의 통보를 받고 결국 자녀를 창씨시킨 다음 자신은 조상 볼 낯이 없다며 돌을 안고 우물로 뛰어들었다. 설진영의 경우 의병활동 공로 등을 감안, 정부는 지난 91년 뒤늦게 건국훈장 애국장(4등급)을 추서한 바 있다.

'창씨개명'은 쉽게 말해 한국식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도록 강제한 것을 말한다. 즉 한국식 '성'을 일본식 '씨'로 새로 만든 것을 '창씨(創氏)'라고 하고, 한국식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꾼 것을 '개명(改名)'이라고 했는데 사람에 따라서는 '창씨'만 하기도 하고, 또 '창씨'와 '개명'을 모두 다 한 사람도 있다. 예를 들어 이광수(李光洙)가 '향산광랑(香山光郞)'으로 성명을 바꾼 것은 '창씨+개명'이라고 할 수 있다.

자진해서 창씨개명 실천, 홍보에 앞장선 춘원 이광수

창씨제가 실시되자 일반군중들의 정서와는 달리 친일파들은 앞장서서 이를 홍보하며 설쳐댔다. 대표적으로 공주 갑부 김갑순은 창씨제가 시행되기 전부터 '김정갑순(金井甲淳)'으로 창씨하여 모범(?)을 보였다. 대표적인 또 한 사람은 춘원 이광수였다. 그는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선씨고심담(選氏苦心談)'(1940.1.5), '창씨와 나'(1940.2.20) 등을 실으면서 창씨제도를 적극 홍보하였다.

참고로 이광수의 창씨개명인 '향산광랑(香山光郞)'은 일본의 시조격인 진무(神武)천황이 즉위한 향구산(香久山)에서 '香山'을 따서 '씨(氏)'로 삼고, 이름 가운데 글자인 '光'과 일본인 남자이름에서 흔히 사용하는 '郞'을 따서 이름(名)을 만든 것이다. 흔히 이광수를 극렬한 친일파로 분류하는 데는 이처럼 창씨개명에서부터 '진짜 일본인'을 능가하는 친일성을 보였기 때문이다.

▲ 친일성이 농후한, 일본식 이름으로 솔선수범해 창씨개명한 후 창씨개명 선전에 열을 올린 춘원 이광수. 사진은 이광수의 창씨개명 결의를 보도한 <경성일보> 기사(1939.12.12)
ⓒ 오마이뉴스 정운현
반면 창씨개명을 하면서도 자신의 뿌리를 남겨두기 위해 애쓴(?) 사람들도 많다. 성씨을 가문의 상징으로 여겨온 조선사람(한국인)들은 일제의 압력으로 창씨가 불가피해지자 '문중회의'를 열고 거기서 결정된 창씨를 대개 채택했다. 그러다보니 은연중에 자신들의 '뿌리'를 담은 글자로 창씨를 한 경우가 많았다.

한 예로 김(金)씨의 경우 '원래 김씨였다'는 의미에서 '金'을 '金原', 또는 '본래 김씨였다'는 의미에서 '金本'으로 창씨를 하였다. 또는 본관을 따서 씨(氏)로 삼기도 했는데, 예를 들어 안동(安東) 권씨 화천군파 종중은 서울에서 각 파 종손이 모여 협의한 결과 본관과 성에서 한 자씩 떼내 '安權'으로 창씨하기로 결의하였으며, 더러는 안동(安東), 권동(權東) 등으로 창씨를 하기도 했다.

또 전주 이씨의 경우 조선왕가의 일가라 하여 대개 궁본(宮本), 국본(國本), 조본(朝本) 등으로 창씨하였다. 따라서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이회창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부친 이홍규 옹의 창씨가 보통의 경우라면 위 세 가지 중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옹의 창씨가 '마루야마(丸山)', 즉 왜색이 짙은 것이었다면 이를 두고 '유별난 조선인'이라고 한 것이 그리 과한 지적은 아니라고 본다.

대개 문중회의 통해 '창씨' 결정, 더러 예외도

덧붙여 이회창씨와 함께 대선후보 대열에 오른 노무현 후보의 경우를 보자면, 당시 전국에 있는 노(盧)씨 각 파 종중회의에서 노씨의 시조가 평북 용강 쌍제촌에서 우거한 사실을 기념하여 강촌(岡村)으로 창씨할 것을 결의한 바 있어 노 후보의 집안은 '岡村**'로 창씨했을 가능성이 크다. 또 다른 대선주자로 거명되고 있는 정몽준 의원 집안의 경우 본관이 경남 하동(河東)인데, 하동 정씨는 본관을 따서 '河東**'으로 창씨했다.

한편 이광수를 능가하는, 즉 친일성이 농후한 창씨개명의 사례도 적지 않다. 일경 경시(현 총경급) 출신으로 중추원참의를 지낸 최지환(崔志煥, 전직 모 장관의 부친임)의 경우 일본 후지산(富士山)과 정한론자인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의 이름을 따서 '후지야마 다카모리(富士隆盛)'으로 창씨개명하였다.

또 '불놀이'로 유명한 시인 주요한은 일제의 황도(皇道)정신인 '팔굉일우(八紘一宇)'를 따서 '마쓰무라 고이치(松村紘一)'로 창씨개명하였으며, 친일승려 출신으로 현 조계종의 종조(宗祖)격인 이종욱(李鍾郁)은 일본 근위내각의 외무대신 히로다(廣田弘毅)의 성을 본따 '히로다 쇼이쿠(廣田鍾郁)으로 창씨했다.

그러나 세간에 알려진 극렬 친일파 가운데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사람도 더러 있다. 해방후 반민특위에 '검거 제1호'로 붙잡혀온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朴興植)을 비롯해 중추원고문 한상룡(韓相龍), 일본 대의사(代議士, 국회의원)를 지낸 재일친일파의 거두 박춘금(朴春琴), 경북도지사를 지낸 김대우(金大羽), 귀족원 의원을 지낸 윤덕영(尹德榮) 등이 이에 속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 '비밀'은 반민특위에 불려온 박흥식에 의해 풀렸다. 박흥식에 따르면, 일제는 그들이 조선인에게 창씨개명을 강제하지 않았다는 변명거리로 삼기 위해 소위 내로라는 친일파들에게 이같은 잔꾀를 부렸다는 것이다.

세간에 알려진 김대중 대통령의 일본식 이름은 '도요다 다이쥬(豊田大中)'으로 소문나 있다.(*정확한 것은 구호적을 떼어보면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전임 김영삼 대통령의 일본식 이름은 '가네무라 코유(金村康右)'로 알려져 있다. 참고로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창씨명은 기자가 수년 전 한 일본잡지에 실린 내용을 통해 확인한 바 있다.

또 박정희 전대통령의 일본식 이름은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로, 이는 기자가 만주군관학교 2기생 졸업앨범과 일본 육사 졸업앨범에서 확인한 내용이다. 박 전 대통령의 창씨인 '高木'은 그의 본관(고령 박씨)인 고령(高靈)에서 '高'를, '朴씨'의 '朴'자에서 '나무 목(木)'을 따서 창씨를 했다는 얘기도 있으나 자료로 확인된 것은 아니다. 또 박 전대통령의 경우 '오카모도 미노루(岡本 實)'라는 또 다른 창씨명이 있는 것으로 소문나 있으나 아직 공식 기록으로 확인된 바 없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창씨개명은 '다카키 마사오'뿐

▲ 호적에 나타난 '창씨'의 사례. 아래 호주란에서 호주의 성인 '박(朴)' 옆에 줄을 긋고 '무산(武山)'으로 창씨한 내용이 보인다.
ⓒ 오마이뉴스 정운현
이 세 사람 모두 대통령(박정희의 경우 최고회의 의장 시절임) 재임시절 일본을 방문, 옛 은사(박정희의 경우 만주군관학교 시절 중대장, 학교장 등도 찾아가 인사함) 등을 찾아가 인사를 하면서 자신의 일본식 이름을 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시대에 창씨를 한 것이라든지, 옛 은사를 찾아가 인사를 한 것은 그들이 성장한 시대상황을 감안해 별개로 친다고 해도 이들이 스스로 자신의 일본식 이름으로 댄 것은 개인이 아닌, 국가원수로서는 적절치 못한 언행이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위에서 예를 든 것처럼 창씨제도에 항의하며 목숨을 버린 사람도 있었거늘 하물며 외세지배하도 아닌, 해방된 독립국가의 국가원수로서 '사적 인연'을 앞세운 행위는 비난의 소지가 있다고 본다.

다만 창씨개명은 조선인들이 희망한 것이 아니라 분명 일제가 강제한 것이다. 또 창씨개명이 시행되던 당시 김대중 대통령(1925년생)은 만15세, 김영삼 전대통령(1927년생)은 만13세, 박정희 전대통령(1917년생)은 만23세였다.(*출생연도는 2001년판 <연합인명사전> 참고함)

박정희 전대통령은 창씨개명 당시 만주군관학교 생도였는데, 그의 경우 본인이 스스로 창씨개명을 했다. 그러나 김대중, 김영삼 두 사람의 경우 창씨개명 당시의 나이로 봐 자신들이 스스로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역설적으로 창씨개명을 하면서도 민족정신을 담은 사람도 드물지만 있었다. '향수'로 유명한 시인 정지용이 바로 그 경우에 속한다. 정지용의 창씨개명은 '대궁수(大弓修)'였는데 '大弓'은 우리 민족의 상징인 '이(夷)'자를 풀어서 씨(氏)로 삼고, 활쏘는 기본자세인 '수(修)'를 이름(名)으로 한 셈이다.

문제는 창씨개명을 하더라도 '근본'과 '정신'을 어디에 두었더냐 하는 점이다. 창씨개명 자체를 '친일'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다만 이광수류의 극렬 친일분자에 한해 친일의 기준으로 적용하는 것은 일면 일리가 있을 수도 있다. 결국 일제 때 창씨개명했다고 해서 모두를 친일파로 모는 것은 더욱 바람직하지 않다. 친일의 기준에도 상식은 당연히 적용돼야 마땅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필자가 대한매일 근무 시절인 지난해 8월 대한매일 뉴스넷에 썼던 글을 보완한 것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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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 년간 언론사에서 근무했고, 친일청산 등 역사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평소 그 무엇으로부터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글쓰기'를 갈망해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