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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 종군기자들이 쓴 민간인 학살 사건 관련 기사들.
ⓒ 윤성효
"6.25 기간 중 사상자 총 600만명 가운데 학살된 민간인 총 수는 113만명이다. 이런 엄청난 민간인 학살의 결과가 전쟁 관련 나라에 미친 영향은 엄청나다."

경상대 신경득 교수가 그간 월간 <민>지와 학술논문집 등에 부분적으로 발표했던 민간인 학살사건을 묶어 <조선 종군실화로 본 민간인 학살>(살림터 간)을 펴냈다. 그간 <로동신문> <해방일보> <민주조선> 등에 실린 김사량 등의 종군실화 등 주로 한국전쟁 때 조선(북한, 북반부)에서 나온 신문에 실린 기사를 분석한 것이다.

책을 묶어내는 데 기본 자료가 된 북한의 신문기사는 북쪽의 입장에서 썼지만, 지금까지 민간인 학살에 있어 접근이 쉽지 않았던 사료들이다.

신 교수가 분석한 바에 따르면,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 학살은 전국에 걸쳐 일어났는데 학살은 미군과 한국군, 경찰 방첩대 등에 의해 자행된 것으로 나와 있다. 신 교수가 책에서 인용한 <로동신문> 등의 북한 기사는 상당 부분 '사실'로 증명되고 있다.

'이승만은 정권 재창출' 이득, 맥아더가 사례보고 받아

▲ 경상대 신경득 교수
ⓒ 윤성효
이 책에서 신 교수는 6.25 때 민간인 양민학살로 인해 이승만 정권이 '얻은 점'을 지적했다. 신 교수는 "민족 민중세력의 저항에 부딪쳐 붕괴 위기를 겪던 이승만 정권은 극적으로 역전되어 정권을 재창출할 수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좌익 세력을 완전히 학살함으로써 반공국가에 대한 직접적 위협세력은 사라졌으며, 남북협상파도 모두 북반부로 넘어가 중간좌파는 사라지고 보수수구세력만 남게 되었다. 평화통일론을 주장하던 조봉암이 1956년 법살됨으로써 이승만의 극우 반공 독재만이 유일한 정치이념이 되었으며, 민중운동은 중단된 채 반공자유민주주의 국가체제가 4.9 민주혁명 때까지 지속되었다."

신 교수는 1950년 8월 18일 미8군사령관(윌튼 워커)이 미 대사(무쵸)에게 보낸 문건을 분석, 민간인 학살 사례를 맥아더가 보고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맥아더의 책임론을 제기했다.

당시 문건에는 "나는 여기 대한민국의 정부기관이 저질렀다고 알려진 처형에 관련된 기록 사본을 동봉한다. 맥아더 군사령관은 당신의 생각이나 의견이 어떠한지 알고 싶어 이 문제를 소개하도록 저에게 명령을 내렸다"라고 적시돼 있다.

그러나 미 대사는 "이런 잔혹한 전쟁 범죄에 대해 미군은 미온적으로 대처하거나 묵인했다는 많은 사례가 있다"고 답변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 대사의 답변에는 "결론적으로, 나는 캡틴 신(신성모, 당시 총리서리 겸 국방부장관)에게 한국의 군대와 경찰, 청년단들이 게릴라들을 포함하는 적군의 죄수에 대한 처형을 실행하되, 합법적이고 인도적인 방법으로 집행하라고 촉구했다"라는 대목이 있다.

학살을 하되, 법적 절차를 밟고 인도적으로 하도록 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신 교수는 "민간인 학살 사례에 따라 미군은 전적, 부분적으로 책임을 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전국 곳곳 민간인 학살, 서울부터 마산까지

다음은 신 교수가 신문의 보도 등을 분석해 전국의 학살 현황을 기록한 부분을 발췌한 것이다.

서울(서빙고) 이제까지 전쟁 초기 서부전선이나 서울을 비롯한 경기도 지방에서는 민간인 학살이 없었다고 알려져 왔다. <로동신문> 등의 기록에 의하면, 이들 지방에서도 광범하게 '악의 씨앗'이 번졌던 것으로 파악된다.

먼저, 서빙고 일대에서 정치사상범 200여명이 처형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해방일보>(50년 7월 12일자)는 "보라! 귀축같은 살인귀들 수많은 애국자를 살육"이란 제목에서 "동민의 목격담에 의하면 200여명의 애국자들을 자동차에 실어내어 서빙고 산밑에서 일시에 총살하였다"라고 보도했다.

▲ 인천 민간인 학살 사건을 다룬 신문 기사.
ⓒ 윤성효
원주 원주에서도 정치사상범 학살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로동신문>(50년 7월 25일자)은 원주 뒷산에서 '애국자 180여명이 총살'되었다고 보도하고 있다. 기사에서는 처형 순간 결사적으로 목숨을 건진 박봉승의 자술 내용을 게재한 것이다.

"원주에 주둔하는 헌병들이 그 해 6월 30일 원주형무소 정치사상범 180명을 이감 명목으로 포승으로 결박한 채 6대의 트럭에 나눠 타고 원주 뒷산으로 끌고가 학살하였다" 는 기록이 있다.

인천 인천에서 정치사상범과 예비검속자 처형은 6월 29일 이전에 자행되었다. <로동신문>과 <해방일보>에서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즉결 총살된 민간인들은 인천시 임시 인민위원회 부위원장 가족, 의사를 비롯한 간호사, 노동자 리만손, 상인 정기철, 민청위원장 황선학과 그의 동생 황익선 등인 것으로 보아 정치사상범과 예비검속자, 민간인들이 총살된 것으로 보인다."

수원 수원에서 학살된 민간인 총수는 오산면 103명, 수원읍내 360명, 수원경찰서에 수감된 정치사상범 30명 등 1000여명으로 보인다. 김사량은 <해방일보> 기사에서 "수원에서는, 미군으로부터 지시를 받은 헌병이 6월 30일부터 각 면과 리를 돌아다니며 학생 노동자 농민 등 예비 검속자를 수색 체포해 산과 들로 끌고 가 학살했다"라고 주장했다.

<로동신문>(7월 22일자)은 한국 최고 권력층 관료들이 수원에서 저지른 추태를 폭로했다.

"한국 정부 요인 조병옥 신익희 장택상 림병직 채병덕 등은 가재도구와 집에서 기르는 개까지 차에 싣고 수원에 들어와 수원농업대학에 머물렀다"고 고발했다.

충북 <조선인민보>(8월 10일자)에는 조치원에서 예비 검속자 158명, <로동신문>(7월 28일자)은 진천에서 400여명과 남일면에서 민간인 50여명, 또 <로동신문>(8월 7일자)은 괴산 증평에서 예비 검속자 500여명이 학살되었다고 보도했다.

호남 <민주조선>(8월 21일자)은 전주 4500명, 논산 300명, 금산 1500명의 학살이 있었다고 보도했다. 경찰 헌병대 방첩대원에 의해 전주에서 예비 검속이 시작된 것은 6월 26일부터다.

▲ 미군 폭격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을 다룬 기사
ⓒ 윤성효
"시내와 그 주변 농촌주민을 동원하여 전주형무소 뒷산의 공동묘지에 구덩이를 하게 한다. 27일 밤 늦게부터 28일 새벽까지 3년 이상의 형을 받은 정치사상범을 총살했다." 신경득 교수는 책에서 "정치사상범은 여수순천사건 관련자이며, 이들 가운데 해방 격동기에 활동한 시인 유진오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밝혀냈다.

<민주조선> <로동신문> 등의 기사를 훑어보면, 군산 760명, 김제 200명이 학살되었다. 숫사가 밝혀져 있지 않은 곳도 있는데, 완주 우전면 황방산, 완주군 룡진면 소리재고개, 전주형무소 뒷산 공동묘지, 진안군 백운면 산 등이다.

광주도 학살은 여전했던 것으로 보인다. <로동신문>은 광주에서 3000명이 대량학살되었다고 보도했다. 지역은 광주 광산군 극락면 불갱이고개, 광주군 지산면 장고봉, 석고면 도등고개, 대전면 한톳재, 광주군 학동3구 밀양 동고개 등이다.

진주 등 신경득 교수는 영남권에서는 진주 산청 하동의 학살과 관련한 기록을 찾아냈다. <해방일보>는 서휘열의 증언을 토대로 명석면의 정치사상범 학살사건을 다루었다. 또 산청 생초면 묵곡리에서 1400여명의 부녀자와 어린이 등이 군경에 의해 학살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진주형무소 정치사상범은 문산 정촌 명석 등에서 학살되었는데, 종군 기사를 쓴 김사량은 2500명이 분산 학살되었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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