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열기는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는다. 한국 대표팀의 명승부가 연일 펼쳐지면서 붉은 악마의 세력은 날로 번창하고, 붉은 티셔츠는 없어서 못 파는 지경으로 호황을 누린다. 경기에 이긴 날은 밤새도록 행진과 파티가 벌어지고, 수만명이 모여 붉은 물결을 연출하며 응원에 넋을 잃는다. 대한민국이란 단어와 태극기라는 도구가 이처럼 생활 깊숙이 당당하게 등장하는 것도 오랜만의 일이라 하겠다. 실로 주체할 길 없는, 그리고 역사상 유래없는 '열광'임에 틀림없다. 이런 가운데 시사주간지 <한겨레 21> 6월 27일치의 '홍세화-박노자 대담'에서 박노자 교수가 던진 말은 충격을 넘어 일종의 적개심을 갖게 만들런지도 모르겠다. 박노자 교수는 붉은 악마가 화두로 등장하자, '솔직히 말해 1937년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나치 대회를 연상했다'며, '집단적인 열기에 무섬증을 느꼈다'고 토로했다. '나치'라는 쇼킹한 단어도 머뜩찮은데 기존 인터뷰에서도 '월드컵 열기는 집단 광기'라고 단언한 박 교수이다보니 축구 팬들로서는 감정이 상할 법도 하겠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박 교수의 지적이 상당히 날카로운 것임을 감지할 수 있다. 이런 월드컵 열기 속에서 '나치' 운운하는 그 용기는 차치하고서라도, '축구 열기의 파시즘적 측면'을 지적하는 그의 통찰이 날선 면도칼처럼 예리하게 보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파시즘과 축구 열기? 언뜻 잘 와닿지 않거나 불쾌감을 느끼는 이들이 있을지 모르나, 실제 이 둘은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자리하고 있다. 단, 그 기저에 숨은 의도와 성격은 확연하게 다르다. 어떤 이유인지부터 먼저 살펴보도록 하자. 첫번째 근거는 '집단과 자신의 동일시'에서 찾을 수 있다. 다시 말해, 공동체에 자신이 온전히 소속해 있음을 확인함으로서 안심하는 성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붉은 티셔츠가 동날 정도로 팔려나가고, 너도 나도 길거리에서 만나는 모르는 이들을 향해 '대한민국'을 외치고, 그렇게 주고받고 같은 붉은 악마임을 확인함으로서 안락함을 느낀다는 것이다. 이것은 때로는 그 '집단'에 참여하기를 거부하는 이에 대한 적개심, 비판적 태도를 취하는 이들에 대한 방어적 공세로 변질되기도 한다. 아무튼 소속된 집단과 스스로를 동일시하고, 그 집단이 추구하는 가치에 무비판적으로 동승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파시즘이라면, 근래 나타나는 축구 열풍에 있어서도 그와 유사한 측면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왠지 축구를 보지 않으면, 좋아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심정. 한국 경기가 있는 날은 붉은 티셔츠를 입어야 할 것 같은 기분. 승리 후 길에서 만나는 붉은 티셔츠들과 대한민국을 외쳐야 할 것 같은 느낌. 바로 집단에 대한 소속감의 확인 절차인 셈이다. 두번째로는 잠재적 욕망과 울분의 집단적 표출이라는 측면을 들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걷잡을 수 없는 환호와 열정과 함성이 '폭력'의 대용품이라는 얘기이다. 오해 없기 바란다. 한국 청소년들의, 젊은이들의, 386세대들의, 더 나아가 기성 세대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 내재된 억압과 울분은 결코 가벼이 볼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 억압은 체내에 지나치게 축적되어 있고, 배출구를 찾지 못해 왔다. 사회와 제도와 언론의 공작 속에서 사상이나 신념의 정직한 표출이 통제되어 왔으며, 젊은이들은 그 젊음을 발산할 통로가 없는 현실 속에서 '참는' 법만을 배워 왔다. 그것이 '축구'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열정적인 축제로, 환호와 웃음소리로, 흥분과 함성으로 일시에, 한꺼번에 터져 나오고 있는 것이다. '대체 얼마나 한이 쌓였길래'라는 탄식이 나오는 것도 이상한 일만은 아니다. 그리고 그것이 집단 폭력이 아닌 '응원'의 형태로 표출된다는 것은 실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그 폭발이 파시즘의 한 측면과 다르지 않다는 것 역시 틀림없는 사실이다. 파시즘은 국가 혹은 사회의 바닥에 침전한 욕망을 하나로 엮어 분출시킴으로서 위력을 발휘한다. 그런 면에서, 이 기쁨과 울분의 빅뱅은 파시즘과의 사이에 유사한 부분을 지니는 것이다. 세번째로 들 수 있는 것은, 도대체 이 전국민적 열기에 반대되는 의견이나 개인이나 집단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파시즘은 비판 세력을 원천 봉쇄한다. 혹은, 집단 최면에라도 걸린 듯 반대되는 의견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그도 아니면, 다른 견해가 있지만 대의를 위해 발설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무마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데 이번 월드컵 열기 역시 그와 다르지 않다. 이것은 4700만 전체가 하나도 빠짐없이 동참하는 열광인 것처럼 보인다. 틀림없이 어딘가에 비판적 시각을 지닌 사람이 있으리라고 기대하고 미디어를 살펴보지만 월드컵에 대한 반대의 '반'자도 눈에 띄지 않는다. 심지어는 <한겨레> 같은 신문조차도 지면 대부분을 축구 기사로 메우고, 한국 팀의 승전보를 성과 위주로 보도하는데 치중할 정도니 게임은 끝난 셈이다. 뉴스 프로그램 역시 축구 보도가 뒤덮다시피 했고, 거의 모든 정규방송은 축구 때문에 연기되거나 취소된다. 마땅히 제 시간에 영업중이어야 할 가게나 사무실이 축구 중계 때문에 휴업을 선언한다. 분명히 단언하는데, 사회의 지배적 흐름에 대한 반대 의견이 눈에 띄지 않는다면 그것은 일상적 파시즘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다른 문제는 무시하고라도, 월드컵에 대한, 혹은 축구 열기에 대한 반대편 진영의 목소리가 아예 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심히 우려할 만한 일이다. 전부 다 그 열기에 빠져들어 버린 것인지, 아니면 알면서도 때가 아니라는 이유로 함구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강만길 상지대 총장조차도 '문제점이 눈에 띄지만 이 열기에 대고 지금 지적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는 의견을 피력할 정도다. 16강 진출에 대한 비관적 견해를 개진했다는 이유로 일 개인이 테러에 가까운 사이버 공격을 받는 일도 생긴다. 일차적인 문제는 생각을 품고서도 겉으로 표출하지 않는 '반 월드컵' 진영에 있는 듯 하다. (실제 그런 사람들이 존재한다!) 축구 열기를 반대하는 것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이들이 소외된 가운데 품는 불만들은 한두가지가 아니다. 우선 강제로 실시되는 자동차 2부제. 모두가 일사분란하게, 군소리 없이 잘 따르는 분위기지만 분명히 강제 규정에 불만을 품는 사람은 존재한다. '전두환 시절도 아닌데, 왜 국가 행사에 강제 제도가 시행되는가'라는 의문이 제기되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이유는 그 때문이다. 대표선수단의 병역 면제 처분도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의 병역 특혜에 대해서는 극도로 히스테리를 부리는 한국 남자들이 아무 말대꾸도 없이 '당연하다'는 반응을 보인다. '국위선양'과 '국민에 준 희망'이 이유라는데, 축구의 '축'자도 싫어하는 사람 입장에서도 국위 선양이고 희망을 준 사건일까? 혹은, 아무 관련 규정도 없는 가운데서 선심쓰듯이 덜컥 하사한 면제 처분에서 어떤 형평성을 찾을 수 있을까? 면제 처분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과 합의도 없이 선물을 멋대로 살포하는 정부에게 따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 면제 처분에 대해서도 '그 누구도' 반론을 제기했다는 얘기는 찾아볼 도리가 없다. <한겨레>가 사설까지 동원해 면제 처분을 옹호했으니 이 또한 말 다한 것 아닌가. 이외에도 축구 무관심 혹은 혐오층에서 가질만한 불만은 다양하다. TV 프로그램과 신문 지면의 축구 독점 현상. 10시 반 이후에 발 디딜 틈도 없이 꽉 차는 지하철. 밤새 울리는 클락션 소리. 기껏 찾아간 가게가 문을 닫았을 때 느끼는 울화통. 그럼에도 분명히 존재하는 이 '축구 알레르기' 집단은 입을 꾹 다물고 있을 뿐이다. 4000만이 붉은 악마인 마당에 공연히 나서면 적이 된다는 이유에서일까. 그럼에도 우리는 그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축구 열성 지지층'에 대한 문제제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적어도 필자가 보기에는, 이들은 자신들과 함께 월드컵에 광분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꿈에도 생각지 않는 것 같다. 혹은, 그런 사람을 이해할 수 없는 것 같다. 그도저도 아니면, '이 마당에 축구를 거부하는 사람은 애국심이 부족한 것이다'라고 힐난하는 경우까지 생긴다. "애국심"이라. 그것 참 편리한 애국심인 모양이다. 애국심을 꼭 겉으로 드러내고 커밍 아웃해야 하는지도 의문이지만, 대표팀 경기때만 붉은 옷 입고 손뼉 치는 형태의 애국심이라면 참으로 편리한 종류의 이념임에 틀림없다. 축구를 좋아하고 열광하는 것과 애국심은 무슨 관련일까? 이것은 군대와 축구의 관계를 떠올리면 쉽게 해답을 찾을 수 있다. 흔히 '남자들이 좋아하는 얘기는 군대 얘기, 축구 얘기. 군대가서 축구한 얘기'란 우스개소리를 듣게 되는데, 사실 이게 웃을 일이 아니다. 축구라는 스포츠 자체가 전쟁을 모델로 삼은 것이고, 탄생 자체도 전쟁 뒤 시체의 해골을 발로 차며 발생한 것임은 알려진 사실이다. 더욱이 월드컵이란 국제 행사와 맞물려 축구는 '애국의 한 방편'이자 국가의 위상이 달린 '대리전'으로서 기능한다. 결국 축구와 애국심이 갖는 특수한 관계는 '국가주의'에서부터 발현한다는, 축구팬이라면 거부하고 싶은 결론을 얻게 되는 것이다. '축구는 그냥 스포츠다'라는 항변이 먹혀들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처럼 월드컵 축구에 대한 열기와 압도적 관심은 '다른' 의견, 생각이 '다른' 사람, '다른' 행사가 없을까 고민하는 세력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만들어 버린다. 혹은 그런 의견이 개진된다 하더라도 애국심이나 스포츠의 탈정치와 같은 편리한 논리를 동원해서 공격하고, 잠재우는 경향을 보인다. 앞서 언급한 박노자 교수는 국내 몇 안되는 상식적 지식인에 속하는 인물임에도, 단지 월드컵 열기를 폄하했다는 이유로 '러시아놈' 내지는 '내 손으로 죽인다'와 같은 사이버 테러를 당해야 했다. 마지막 '파시즘'의 근거는 다름아닌 정치인이다. 바로, 이 열기를 배경으로 이용해서 정치적 입지를 넓히는 정치인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가 누구인지는 축구팬들이 잘 알 것이고, 그에 대해 다루기에는 시기적으로 이른 감이 있으므로 여기서는 일단 생략한다. 아무튼, 정치 지도자가 '열기'를 업고 세력을 확장한다는 면에서는 파시즘적 측면이라는 지적을 피하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근래의 월드컵과 축구에 대한 열기는 파시즘의 속성과 일치하는 부면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붉은 악마로 대표되는 한국 축구에 대한 함성은 '파시즘의 한국 버전'이라고 단언할 수 없는 측면을 지닌다. 바로, 긍정적-발전적으로 나아갈 여지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리고, 그것이 박노자 교수의 말마따나 '배타적이지 않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면을 일부 지니고 있음을 생각한다면 더욱 그렇다) 붉은 악마와 근래의 응원 문화는 앞서 언급했듯이 한국 현대사에서 유래를 찾기 힘든 신기한 현상이다. 우선 '광장'에 불특정 다수의 군중이 모여 하나로 일치 단결하고 함성을 내지르는 광경은 기존의 한국에서는 상상하기도 힘든 일이다. (이 중 '광장'에 관한 연구는 소설가 김훈과 여타 기자들이 수행중이니 생략하기로 한다) 우리는 이미 여러차례 시청과 대학로 등에 운집한 셀 수 없는 '붉은' 무리를 보았다. 노동자들 몇명만 모여 소리질러도 경기를 일으키는 '보수'가 지배적인 한국에서 이런 거대한 물결은 분명 그들에게는 '충격적인' 현상일 것이고, 참여자들 입장에서는 즐겁고 흥겨운 한판의 잔치와도 같은 것이리라.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진풍경, 그리고 금기시되던 것의 일상화. 이것만으로도 축구 열기가 사회에 가져오는 파장은 적지 않다. 문제는 이것이 자신들에게 속하지 않은 자들에 대해 고려하는 과정을 거침으로, 한단계 높은 수준의 그 무엇으로 도약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전까지 붉은 악마는 기독교로부터는 악마 논쟁에, 보수 계층에게는 '빨갱이' 논쟁에 말려들어 어려움을 겪었다. 그 과정에서 붉은 악마가 도태되지 않은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이들의 주장 그대로 이들이 '탈정치적인 순수 축구 서포터즈'이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붉은 악마가 일반화된, 대중화된 시점에서 또 한번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리라. 개인의 잠재욕을 집단적 마스터베이션으로 푼다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혹은 무비판적인 젊은 층의 대중화를 상징한다는 힐난을 반박하기 위해서라도 붉은 악마에 '의미'와 '동기' 부여는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시작은 아이러니하게도 '반 축구팬'에 대한 성찰에서 출발한다. 다시 말해, 붉은 악마 스스로에게 주어진 세력과 축적된 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진정으로 모든 사람들이(축구 반대자들이라 하더라도!)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범국민적 활동으로 나아가기 위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물론 붉은 악마도 나름대로, 알아서 그런 노력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가령 지방선거에서 붉은 악마의 투표 참여 운동은 물론 좋았지만, 강도가 조금 약했다. 이제 월드컵 끝난 뒤에 본격적으로 한국 축구의 근본적 발전을 위한 노력을 계속하는 것은 어떨까? 이미 8강까지 진입하기는 했지만, 다른 출전국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축구 인프라가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프로축구 활성화나 아마 축구의 발전을 위해 붉은 악마가 진지하게 힘을 사용한다면 어떨까? 혹은, 축구 발전을 막는 어떤 부류의 언론이나 권력에 대해 축구팬들이 공동의 저항을 시도한다면 어떨까? 붉은 악마는 이미 '단순한 축구 서포터즈 모임'이라고 몸을 사리기에는 너무도 커져 버렸고, 많은 의미가 부여되어 버렸다. 이 에너지가, 이 거대한 통합의 에너지가 월드컵 뒤 없었던 일인 것처럼 사라지는 것은 아무도 바라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단순히 파시즘의 한 한국적 요소라는 식으로 마무리짓는 것 역시도 필자가 원하지 않는 바이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무엇이 필요할까. 집단적 에너지의 건강한 승화를 위한 진중한 논의가 절실한 때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소수에 대한 고려로부터 출발한다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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