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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80년 6월 초 천주교 광주대교구 사제단 발표

▲ 최루탄을 피해 나온 시위대 한 명을 계엄군이 달려들어 곤봉으로 구타하고 있다 ⓒ 5.18 기자클럽 제공
국민 60.6% "5.18 그만 거론하자"...광주 청소년 49.6% 5.18발생시기 몰라

99년 광주사회조사연구소(이사장 김동원)는 광주광역시의 용역을 받아 실시한 5.18 관련 여론조사 결과를 내놨다. 이 조사를 끝으로 공식 여론조사가 실시된 적이 없으니 한국인의 오월관련 의식을 가늠할 수 있는 마지막 잣대인 셈.

이 조사에 따르면 국민의 60.6%는 5.18을 그만 거론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국민의 53.9%가 5.18 진상규명이 미흡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의외의 답변이 아닐 수 없다. 진상규명은 미흡하지만 지나간 일이니 더 이상 거론하지 말자는 이중적 태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특히 이 여론조사 결과에서 눈길을 잡아끄는 항목이 있다. 광주시내 청소년 2723명에게 5.18 발생시기를 물었는데 1980년이라고 정확하게 답변한 학생이 32.4%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광주시내 청소년의 49.6%는 모르겠다고 응답했고, 18.0%는 잘못 알고 있었다.

5.18은 완전한 진상규명은커녕 하나의 역사적 사실로 자리잡는 데도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거론하면 할수록 귀찮은 '천덕꾸러기 5.18'은 그렇게 또 하나의 기념일로 박제화 돼가고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20년 성상이 지난 오늘의 눈으로 5월을 보지 말고 80년 그때의 눈으로 5월을 보는 건 어떨까? 세련되게 평가된 '현재의 의미'로서가 아닌 '처절한 호소'로서의 당시의 목소리를 들어보는 것 말이다.

▲ 천주교 광주대교구 사제단이 80년 6월에 발표한 최초의 오월 관련 공식성명. 행방이 묘연한 원본을 천주교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가 85년 5월에 '광주의거 자료집'에 재수록했다.ⓒ 오마이뉴스 이주빈


80년 오월항쟁 이후 최초의 공식 성명 "광주사태에 대한 진상"

학살의 공포가 채 가시기 전인 80년 6월. 천주교 광주대교구 사제단은 성명서 한 장을 발표한다. 권력장악을 위해서 살상(殺傷)마저 주저하지 않았던 전두환 신군부에 맞서 광주를 말한다는 것은 또 다른 폭압을 자처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시절에 감히 광주를, 사태의 진상을 얘기한 것이다. 이는 광주항쟁 이후 최초의 오월 관련 공식성명이다.

"오월은 싱그럽고 아름다운 달이다. 그러나 80년 5월은 6.25 이후 가장 참혹한 민족사의 비극이 일어났던 대 참변의 달이다..."

'광주사태에 대한 진상'이라는 제목을 단 성명서는 그렇게 시작된다. "6.25 이후 가장 참혹한 민족사의 비극"을 접한 사제단은 "비상계엄이라는 허울 속에 정부 당국의 거짓된 발표와 통제된 언론의 편향보도로 인하여 (진상은) 철저히 왜곡되어 있다"고 안타까워한다.

그리고 마침내 "양심과 신앙의 명령에 따라 사태의 진상을 전 국민 앞에 발표하는 것만이 우리의 사명을 다하는 것이며, 이 사태로 죽어간 영령들을 위로하고 한맺힌 광주 시민의 아픔에 동참하는 길이라고 결정"한 사제단은 광주항쟁 이후 최초의 오월관련 성명을 발표한다.

사제단 성명, 항쟁의 전 과정 생생히 기록

사제단은 다소 흥분된 필발로 80년 오월광주를, 당시의 참상을 전한다. 사제단의 절절한 고발은 읽는 이의 시선을 80년 5월 금남로에 묶어둔다. 학생들의 민주화 시위가 점차 전 시민의 항거로 이어지는 광주항쟁의 전 과정을 기록하고 있는 사제단의 성명서 속으로 들어가 보자.

▲ 체포한 시위대를 계엄군이 일렬로 세워놓고 개머리판으로 돌려치고 있다.ⓒ 5.18기자 클럽 제공

"(18일 상황-편집자) 착검한 M16에 방망이로 무장한 공수대원들은 학생들을 해산시키기 위하여 남·여학생을 붙잡아 방망이를 휘둘러 마구 난타했다. 뒷통수를 맞고 피를 낭자하게 흘리며 쓰러진 학생들이 많았다. 이에 격분한 학생들이 보도블럭을 깨서 돌을 만들어 집어던졌다...(중략)...반항하는 경우 M16에 꽂은 칼(대검)으로 등과 허벅지를 사정없이 찔러 그었다. 피를 흘리는 학생들을 굴비처럼 엮어 군인 트럭에 싣고 갔으며, 통금이 밤 9시로 단축된 것이 발표되자 귀가하는 학생으로 보이는 젊은이까지 무조건 두들겨 패고 연행했다. 이를 만류하는 시민들까지 개머리판으로 마구 때렸다."

"(19일 상황-편집자) 시내의 표정은 무겁게 가라앉은 상태에서 술렁대기 시작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금남로 일대에 이루 셀 수 없는 시민들이 모여들었으며...(중략)...공수대원의 잔인성을 직접 목격한 군중들은 울분과 분노를 참지 못하고 흥분하기 시작했다. 오후에는 가택수색까지 해가며 학생들을 붙잡아갔고, 얻어맞아 택시에 실려가는 학생들까지도 차에서 끌어내려 두들겼으며, 심지어는 운전수들까지도 두들겨 팼다. 흥분된 시민들이 합세하기 시작한 남녀노소를 구별하지 않고 구타하거나 대검으로 난자했다. 칼로 옆구리가 찔린 학생도 등이 ×로 그어져 있는 시체가 추후에 확인되었다."

"(20-21일 상황-편집자)맨 주먹으로 대항하던 시민들은 이에 대항할 무기의 필요성을 깨달아 화순을 비롯한 인근 경찰서에 들어가 경찰 예비군용 총기, 실탄, 수류탄, 화순탄광에서 사용하는 티.엔.티를 빼앗아 시내로 모이자 시가지는 완전 전쟁상태로 돌변했다. 총을 든 시민들에 의해 게엄군은 외곽으로 퇴각했으며 이때에도 많은 사상자가 생겼다. 밤새껏 쉬지 않고 총소리가 났으며 밤에는 도청이 데모 군중에 의해 점거되었다."


"응어리진 마음 풀리지 않은 채 구호품 외면하고 있다"

▲ 오월관련 최초의 성명인 천주교 광주대교구 사제단 성명을 재수록한 정의평화위의 85년 '광주의거 자료집'ⓒ 오마이뉴스 이주빈
마침내 광주시민은 계엄군에 의해 강탈당한 광주를 되찾았다. 이름하여 '해방광주'. 사제단의 성명은 '해방광주, 그들만의 5일'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계엄군이 외부와 통신 교통을 차단시켜 생필품과 식량이 공급되지 않는 가운데도 매점 매석 행위나 폭리를 취하는 자가 없었다. 언제 풀릴지 모르는 사태 속에서도 서로 식량을 나누어 먹었고, 총상으로 인한 환자가 급증하여 피가 부족하게 되자 헌혈하는 시민들의 수가 무한히 늘어서 지금도 헌혈 받은 피들이 남아돌고 있다. 부녀자들은 데모 대원들에게 스스로 음식과 약품을 제공했고 배고파하는 계엄군들에게도 미움을 잊은 채 먹을 것을 제공해주었다."

그리고 사제단은 신군부와 그들이 장악한 매스컴에 의해 '폭도'로 규정돼버린 광주시민을 담담히 변호한다.

"방망이를 휘둔 공수대원 앞에 너무나 섧게 울어버린 어느 아낙의 따스한 마음, 파괴와 방화를 하지 말자며 만류하던 우리 모든 광주 시민들! 그것은 우리가 아는 폭도들의 짓이 아니다. 저들이 불순분자라면 감히 할 수 없는 일들이다. 그런데 저들은 불순분자와 폭도가 되어버린다. 그리고 연행, 체포의 위협 속에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광주 시민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민주시민의 긍지를 마음속에 갖지만 응어리진 마음은 풀리지 않은 채 이재민에게처럼 보내지는 구호품을 달갑지 않게 생각하며 외면하고 있다."

모두 다 알고 있는 사실처럼 얘기하지만 진실을 제대로 얘기하지 않는 80년 5월의 그날들. 지난한 지역주의와 정치놀음에 의해 진상이 왜곡되고 폄훼되는 것은 그 당시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군은 이상과 같은 한국 근래사상 유례없는 유혈사태를 유발하여 놓고 그 책임을 광주 시민들에게 전가하기 위해 일체의 보도를 통제하고 사실을 은폐함으로써 광주 시민들과 우리 국민 전체의 가슴에 피맺힌 한을 남겨놓았다. 더욱 그들이 스스로 저지른 잔인한 난행에 대해 추호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 체포한 시위대를 계엄군이 군화로 목을 짓밟으며 묶고 있다.ⓒ 5.18기자 클럽 제공

정형달 신부 초안 작성, 윤공희 대주교 승낙

그렇다면 이 최초의 오월성명서는 누가 작성했을까? 80년 당시 천주교 광주대교구는 '광주의 아버지'로 불리는 윤공희 대주교가 교구장으로 봉직하고 있었으며 김성용 신부는 광주항쟁 당시 시민수습대책위원으로 참여했다는 이유로 구속, 수감중이었다.

80년 6월초에 발표된 천주교 광주대교구 사제단 성명은 정형달 신부가 초안을 작성하고 40여 명의 신부가 동의하여 발표된 것으로 알려진다. 물론 당시 교구장이었던 윤공희 대주교의 승낙이 있었던 점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김양래 전 평화방송 국장은 "지금도 오월문제와 관련해선 그렇지만 당시 윤공희 대주교는 상당히 쎘다"며 "항쟁 중엔 최규하 당시 대통령에게 '이런 방식으론 안된다'는 요지의 편지를 자필로 쓰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오월항쟁 이후 최초의 오월 관련 성명인 천주교 광주대교구 사제단의 성명.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제단 성명서의 원본은 행방이 묘연하다. 다만 원본의 문안을 천주교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가 85년 5월 '광주의거 자료집'에 재수록해 그 역사적 기록을 증언하고 있을 뿐이다.

항쟁 이듬해인 81년 5월 18일 희생자 추도 미사를 연 광주대교구 사제단은 19일부터는 구속자 석방 등을 요구하며 단식에 돌입하기도 했다. 암흑의 시대에 힘없는 자의 편에 서서 진실을 지키기 위해 고난을 마다하지 않은 성직자들. 역사를 지나간 사실 정도로 거추장스럽게 여기는 우리를, 그들은 어떤 눈으로 다시 기록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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