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완연한 봄이다. 아니, 요즈음 날씨라는 것이 날짜에 상관없이 거의 초여름에 가까운 더운 날씨를 보이기도 하는 등 이미 세상은 봄의 한가운데를 지났는지도 모른다. 이처럼 봄날 같지 않은 날씨를 보이는 시기에 그래도 정들었던 모국을 떠나 머나먼 하와이 땅으로 떠난 이가 있었다. 아무런 환송도 받지 못한 채...

리승만. 하와이를 근거지로 조선의 독립을 위한 운동을 하다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독립한 한국의 초대 대통령을 지낸 그는 변칙적인 방법들을 통해 정권을 연장해가다 결국 시민들의 혁명이라는 항거에 직면해 하야를 함과 동시에 하와이로 망명을 떠나게 되고 결국 이승에서의 삶을 끝내고서야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 리승만이 조선 광복과 함께 귀국을 해 사용하던 집이자 하야한 뒤 하와이로 가기 전에 잠시나마 거처했던 곳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뒤편의 야트막한 낙산을 배경으로 약 1700여 평의 대지에 자리잡은 이화장(梨花莊)이 그것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곳에는 조선 중종 때 배밭이 있어 봄만 되면 배꽃이 만발했다고 전해진다. 지금은 봄기운을 타고 새싹과 함께 개나리가 활짝 피었는데 '서울 도심에 이런 데가 다 있네'하며 간단하게 돌아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화장 답사를 떠나기에 앞서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아간 장본인인 리승만에 대해 주마간산격이나마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개화사상에 심취해 기독교에 입교한 리승만은 서재필이 설립한 독립협회와 협성회 등에서 간부로 활약하기도 하는 등 국내에서부터 조선 독립을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던 중 1914년에 박용만의 초청으로 하와이로 건너간 리승만은 잡지 《한국태평양》을 창간해 한국이 독립하려면 서구 열강 특히 미국 정부와 미국 국민들의 지지를 얻어야 한다는 신념을 펴며 미국 교포 사회에 독립정신을 드높이고자 했다.

그러나 리승만의 운동 방식과 이후 대통령직 수행 및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 과정에 있어 한계로 지적되는 점도 결코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즉 운동의 주도권을 둘러싼 다툼으로 '국민회'를 분열시키고 독자적으로 좌파세력을 규합해 '동지회'를 결성함으로써 당시 무장투쟁론을 주장하던 박용만 등과 대립하기도 했고, 무장투쟁을 주장하던 임시정부의 '무단파'로부터 불신을 받아 1921년 상하이 임시정부 의정원에서 불신임 결의를 받기에 이른다.

뿐만 아니라 그 무렵 하와이와 워싱턴 등지의 재미 교포 사회에서는 그를 따르는 '우남파'와 안창호를 지지하는 '도산파'의 대립 양상이 노골화되어 해외에서의 독립운동 노선에 분열이 나타나기도 했다.

이후 그는 1934년 오스트리아 출신의 프란체스카와 결혼해 1945년 광복이 되자 같은 해 10월 귀국해 국내에서 자기 세력을 규합하는 데 사력을 다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우익 민주진영의 지도자를 자처하며 좌익세력과 투쟁을 벌였고, 급기야 1946년 6월에는 38선 이북의 북한을 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계획을 발표했다.

이후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투표 없이 당선된 후 국회의장이 되었으며 이때 대통령을 중심으로 하는 대통령중심제 헌법을 제정, 공포해 국회에서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점점 절대 권력의 단맛을 알아가던 리승만은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임시수도인 부산에서 2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야당이 우위를 차지하던 국회에서 재선이 어려운 상황에 맞닥뜨리게 되자, 자유당을 창당하고 계엄령을 선포해 반대파 국회의원들을 감금하는 등 불법적이고 변칙적인 방법을 동원해 헌법을 대통령 직선제로 개정, 2대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특히 1954년에는 이와 같은 아집이 극에 달하게 되는데, 그 유명한 '사사오입(四捨五入)' 사건이 그것이다.

리승만은 종신대통령제 개헌안을 발의하게 되지만 결국 국회에서 정확히 한 표가 부족해 부결되었는데 변칙적인 반올림을 의미하는 사사오입을 통해 1956년 3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특히 국내의 인권 의식 성장과 더불어 많은 문제점이 지적되고 있는 국가보안법이 1958년 12월 차기 대통령선거에 대비해 개정되기에 이르며, 몇몇의 재벌기업을 위한 특혜 정책 등을 폄으로써 일반 민중과의 거리는 점점 멀어지게 된다.

그러나 겨울이 길면 그만큼 봄이 일찍 찾아오는 것일까. 이처럼 무소불위의 권력을 끝간 데 없이 휘두르던 리승만 정권은 1960년 3월 15일 여당과 정부가 중심이 되어 조직적으로 펼친 부정선거를 통해 4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나 4·19혁명으로 사임한 후 하와이로 망명을 떠나게 된다.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해방된 나라의 초대 대통령을 지낸 그는 그렇게 쓸쓸히 대한민국 땅을 떠나 결국 살아서는 영영 돌아오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리승만이 기거하던 곳이 바로 이화장이다. 지하철 4호선 혜화역에서 내려 마로니에 공원을 왼쪽으로 끼고 한참을 걸으면 한국방송통신대학을 지나 서울사대 부속초등학교 정문을 만나게 된다. 여기서 왼쪽으로 나 있는 골목을 따라 올라가자. 학교 담장을 계속 끼고. 그럼 길이 갈라지는 곳에 도착하는데, 여기서는 주위의 슈퍼마켓에라도 들어가 생수 한 병 사며 길을 묻는 것이 최선책이 아닐까 한다. 왜냐면 그 길이 멀지는 않지만 그래도 골목이 다소 복잡하게 나 있어 초행자의 경우엔 잘 찾지 못할 수 있기에.

원래 이화장 터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었던 신광한의 집터로 신대(申臺)라고 불렸다고 전해지며, 한때 이화장의 정문 앞에는 인평대군(麟坪大君)의 석양루(夕陽樓)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리승만 전대통령이 옮겨 살면서 우리의 기억 속으로 들어온다. 리승만은 광복되던 해인 1945년 10월에 귀국해 잠시 조선호텔에서 지내다가 성북구 동소문동에 있는 돈암장(敦岩莊)으로 이사해 1년 6개월 정도 기거했다.

그런데 리승만의 비서였던 윤치영에 따르면 당시 주한미군 하지 장군과의 불화설이 돌자 집주인이던 당시 서울타이어주식회사 사장 장진영은 집을 비워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그래서 리승만은 할 수 없이 돈암장을 나와 잠시 마포장(麻浦莊)에 머무르다가 당시 기업가 권영일 등이 모금해 헌납한 종로구 이화동 1번지 이화장으로 이사하게 된다.

1920년대 지어진 한옥 기와집인 이화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1988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 40주년을 기념해 국내외 인사들이 건립한 리 전대통령의 동상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오른쪽 개나리 너머 비탈 위로 눈을 돌리면 언뜻 보기에도 소박해 보이는 한옥 한 채가 자리잡고 있다. 조각당(組閣堂)이라 부르는데, 1948년 7월 20 제헌의회에서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리승만은 같은 달 24일 대한민국 초대 내각의 조각 본부를 이화장 조각당에 두고 국무총리 및 12부서 장관을 인선한다.

조각당이란 이름도 이에서 유래한 것인데, 현판은 1987년 제헌절에 제헌국회의원들이 모여 리 전대통령의 휘호를 집자해서 새긴 것이다. 당시에 이용하던 나무의자와 소파 등이 그대로 진열되어 있어 감회가 새로운 조각당은 방 한 칸 부엌 한 칸의 작은 규모이지만 우리나라 헌정사에서 역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한편 'ㄷ'자로 생긴 본관은 비가 새는 것 정도만 수리하며 본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데, 벽면을 따라 독립운동을 하던 당시의 사진이나 서신 등이 진열되어 있으며, 1904년 옥중에서 쓴 국민계몽서 '독립정신'도 볼 수 있다.

리승만은 초대 대통령으로 국가의 뼈대를 세우는 데 공헌을 하고 정치체제로 공화정을 채택하기는 했지만, 정작 자신은 절대권력을 구가하고 장기집권을 꾀하는 등 그 과정에서 수많은 정치적 과오를 범했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화장을 돌아보며 그의 공뿐만이 아니라 과오 역시 인식할 수 있는 조절력을 유지해야 할 일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www.SNUnow.com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우리들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찾아 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저서로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알마, 2008), <다시, 서울을 걷다>(알마, 2012), <권기봉의 도시산책>(알마, 2015) 등이 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