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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7월, 대전형무소 수감 정치범 및 인근 보도연맹원 등 민간인이 군인과 경찰에 의해 학살된 일명 '대전 산내학살사건'과 관련 학살지인 대전 골령골에서의 학살이 17일까지 이어졌고 희생자 수가 민간인을 포함,7천여 명에 이른다는 당시 외신기자의 증언록이 발굴됐다.

이같은 내용은 그동안 국내 각 언론이 미국립문서보관소에서 비밀해제된 문서를 토대로 보도한 대전형무소 정치범에 한해 3일동안 1800여 명이 학살됐다는 것과 큰 차이가 있는 것으로 그동안 자체 진상조사 활동을 통해 "민간인을 포함 최소 3천명 이상이 학살됐다"는 지역 민간조사단의 주장이 더욱 설득력을 얻게 됐다. (2000년 오마이뉴스 보도)

국민일보와 MBC는 30일, 민주당 전갑길 의원의 공개한 50년 당시 영국에서 발행된 일간지 데일리 워커의 앨런 위닝턴 기자가 쓴 ‘나는 한국에서 진실을 보았다’(I saw the truth in Korea)와 영국 유력 주간지 업저버의 필립 딘 기자가 쓴 ‘나는 한국에서 포로였다’(I was captive in Korea) 등 두 권의 한국전쟁 당시 형무소 학살 관련 증언록을 보도했다.

이 자료에서 데일리 워커의 앨런 위닝턴 기자는 그의 저서를 통해 대전형무소 학살과 관련 "학살 직후 대전 인근 낭월리를 방문했으며 6개의 구덩이 속에 7000여 명의 피학살자가 묻혀 있었다"고 증언했다.

그는 "형무소 재소자 집단학살이 7월4∼6일과 7월17일 두차례 실시됐으며 특히 2차 학살때는 여성을 포함한 재소자 이외의 민간인 학살도 이뤄졌다"고 폭로했다. 그는 이어 "이 사건은 미군의 지시에 따라 일어난 학살 중 하나"라고 덧붙였다.

당시 총살 집행 책임자(당시 도경찰국 사찰주임)인 변홍명(가명) 씨도 1992년 월간 '말'지와의 인터뷰를 통해 '처음 3일동안은 나무에 묶어놓고 죄수들을 처형했고, 그 이후에는 죄수들을 앉히거나 눕혀놓고 처형했으며, 죄수처형이 끝난 그 뒤 3일동안은 보도연맹원과 불순분자로 끌려온 5백여 명을 계속 처형했다'고 밝힌 바 있다.

업저버의 필립 딘 기자는 1953년 발간된 증언록에서 1950년 7월23일 충북 영동에서 인민군 포로가 됐고 포로생활중 만난 프랑스 카다르 신부(당시 72세)로부터 대전형무소 집단학살의 진상을 들었다고 기록했다. 학살현장을 목격한 카다르 신부는 미군이 철수하기 직전 한국 군경이 1700여 명의 죄수를 트럭에 겹겹이 싣고와 총살했다고 전했다. 또 “미군 장교도 지켜보고 있었다”고 밝혔다.

이에 앞서 지난 2000년 대전충남지역 13개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해 구성한 '대전형무소산내학살 진상규명회'는 "당시 총살을 집행한 경찰이 총살 집행장에 미군이 포진해 있었다"고 했고 '미군 장교등이 짚차 두 대에 나눠 타고 현장에 나타나 처형장면을 참관했다'는 당시 런던 데일리 워커 보도기사도 확인됐다"며 "미국은 학살사건과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고 밝힌 바 있다.

진상규명회는 또 "무덤규모, 당시 총살 집행 책임자의 증언과 주변 목격자, 대전형무소에 수감됐다 풀려난 생존자, 유가족 증언 등으로 볼 때 민간인을 포함 열흘이 넘는 기간 동안 최소 3천 명 이상이 학살됐다는 주장이 '가장 신빙성과 설득력이 크다'고 밝혔었다.

진상규명위원회 복진국 씨는 "이번에 발굴된 자료는 그동안 진상규명위원회에서 자체조사를 통해 밝힌 내용과 일치하는 내용이 많다"며 "더 이상 정부는 모르는 일이라는 소극적 입장에서 벗어나 민간 차원에서 이뤄낸 조사 결과를 이어나가 진상을 밝힐 차례"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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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천리 (牛步千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 천천히, 우직하게 가려고 합니다. 말은 느리지만 취재는 빠른 충청도가 생활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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