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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호아 사 증오비 앞에 핀 꽃 ⓒ 오마이뉴스 조호진
미국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난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두고 이러한 우문현답을 나눈 적이 있다. 그 우문(愚問)은 "최첨단 무기가 사용되는 지금 미국과 베트남이 다시 전쟁을 한다면 과연 베트남이 또 다시 승리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었다.

현답(賢答)은 "또 다시 베트남이 이길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이 패배한 원인은 억압적인 체제유지 때문이었다. 미국이 21세기 최첨단 무기로 무장해 침략한다 해도, 침략전쟁은 반드시 싸워 이기겠다는 베트남의 저항정신과 역사적 전통을 무너뜨릴 수 없을 것이다"는 결론을 내렸다.

미국이 또 다시 전쟁을 일으켜도 베트남은 또 승리할 것이다

▲베트남 전쟁박물관에 전시된 미 폭격기 ⓒ 오마이뉴스 조호진
베트남은 외세침략과 저항의 역사를 가진 나라이다. 중국 한나라의 1천년 간 지배를 끊임없는 반란과 저항으로 끝냈으며, 세계 최강의 징기스칸 몽고군을 물리친 역사적 전통을 지닌 민족이다. 이들은 식민지배로 점령한 프랑스와 일본과 끈질기게 싸우는 과정에서 현대전에서 침략자를 이기는 원칙과 방법을 터득했다.

프랑스와 일본의 식민지 수탈에 가까스로 해방된 북베트남은 세계 최고의 군대들과 상대해야 했다. 당시 남베트남 군은 1백만의 군대를 가진 세계 4위의 군사력이었고, 미군은 3520달러(당시 우리나라 예산은 10억 달러 안팎)의 전쟁비용과 연인원 650만 명의 병력을 투입했다. 거기다 파병된 6만의 한국군은 게릴라전을 경험한 군대였다.

이에 비해 북베트남군과 민족해방전선(베트콩) 게릴라들은 소금과 하루 두 끼 식사로 만족해야 했고, 전차 부대원을 제외한 병사들은 군화도 없이 타이어로 만든 슬리퍼를 질질 끌며 전투를 해야 했다. 이처럼 형편없는 물자와 군사력의 열세를 극복하고 어떻게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을까?

베트남전쟁은 인류역사 이래 가장 파괴적인 전쟁이었다. 미군이 지상에 퍼부은 폭탄량은 785만 톤(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 사용한 폭탄량 205만톤), 고엽제와 제초제는 7500만 리터나 됐다. 이러한 미군의 융단폭격과 화학전을 피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터널이었고 지하 토굴이었다.

이들은 중국과 라오스를 경유하는 장장 2000km의 호치민 통로와 250km에 달하는 구찌터널 그리고, 전국에 45000km 길이의 지하통로를 만들었다. 이들은 정글의 오솔길을 통해 자전거, 등짐, 수레로 전쟁물자를 보급했고 게릴라들은 지하통로로 신속하게 은신하고 이동해 공격하는 게릴라전을 폈다.

▲베트남전쟁 취재 중에 희생된 세계 각국 종군기자들 ⓒ 오마이뉴스 조호진

이 가운데 구치터널은 20세기 토목건설의 뛰어난 걸작이며 최고의 불가사의로 꼽힌다. 구치터널은 호치민 루트와 사이공을 연결하는 지하동굴로 프랑스 식민통치 시대인 1940년대부터 지방 게릴라들이 파기 시작했다. 폭 50cm, 높이 70cm와 지하 3층 구조로 된 이 토굴은 몸집이 큰 미군은 들어오기도 힘들 뿐 아니라 구조를 모르고 들어왔다가는 갖가지 함정에 빠져 죽을 수밖에 없다.

길이 250km의 구치터널은 호미와 망태기만으로 팠다. 이를 파들어 가는데 걸린 시간은 25년, 땅 속에 살며 토굴을 파던 한 게릴라는 "햇빛이 보고 싶지 않느냐"는 질문에 "조국이 통일될 때까지 파겠다"고 말했을 정도로 베트남 민중의 의지와 저력에 의해 탄생된 불가사의한 결정체다.

베트남 전쟁은 인간의 상식으로 쉽게 납득되지 않는 방식으로 전개됐다. 도저히 옮길 수 없는 200문의 중포와 다연발 로켓포가 자전거와 조랑말을 통해 정글 오솔길을 통과했다. 어린이까지 포함된 보급부대가 인간사슬을 이루며 전달한 보급물자(쌀)는 1/10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행군 도중에 소비한 것이다.

베트남은 이 같은 전쟁방식으로 거대한 제국주의 미국에게 참담한 패배를 안겨주었다. 어떤 물리적 파괴력도 민족의 자주권을 지키려는 민중의 결의와 단결된 힘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미국은 계산에 넣지 않았던 것이다.

▲맥나마라(사진 맨 좌측, 당시 미국방장관)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베트남전쟁은 잘못된 전쟁이었다고 뉘우쳤다. ⓒ 오마이뉴스 조호진
베트남 전쟁의 주역인 맥나마라(당시 미 국방장관)는 자신의 회고록 '베트남전쟁의 비극과 교훈'에서 "북베트남과 민족해방전선은 미국과의 전쟁에서 그들의 믿음과 가치관을 위해 죽을 수도 있다는 전투의욕을 고취하고 있었다"며 "베트남의 역사와 문화와 남북의 민중정치를 이해하지 못한 것"을 미군의 중요한 패인으로 분석했다.

북베트남과 민족해방전선은 1975년 사이공을 함락시키면서 제국주의와의 100년 전쟁을 끝냈다. 하지만 승자도 패자도 쉽게 치유할 수 없는 큰 상처를 입었다. 베트남은 이 전쟁을 통해 민간인을 포함해 3백만이 희생됐고 미군 58000 여명이 전쟁에서 사망했다. 특히 미국의 참전군인 6만 여명(혹은 4만 여명?)이 어린이와 노인 등을 야만적으로 죽인데 따른 죄책감으로 자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과거를 덮고 미래를 보자

▲빈호아 사 마을의 유일한 생존자 '도안 응히' ⓒ 오마이뉴스 조호진
지난 달 21일 빈호아 사 마을에서 만난 '도안 응히'(38) 씨는 "한국(군) 사람을 용서할 수 있겠는가"라는 질문에 "눈과 가족을 잃은 상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끔찍한 고통이다. 하지만 전쟁은 끝났고 평화의 시대가 왔다. 과거보다 미래를 위해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한국의 시민단체 관계자와 몇 차례 만난 적이 있는 그는 "한국 사람 중에도 좋은 사람이 많을 거라고 생각한다. 미국의 용병으로 전쟁에 팔려온 한국군의 상황을 이해한다"고 덧붙여 말했다.

이 마을 주민들은 1966년 12월 5일 청룡부대가 36명의 주민을 폭탄구덩이 넣고 죽였다고 증언했다. 당시 3개월이었던 도안 응히 씨는 어머니 품에 안겨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이때 탄피 화약액이 눈에 스며들어 장님이 된 도안 응히 씨는 할머니, 어머니, 누나 등 3명의 가족을 잃었다.

도안 응히 씨의 아들 이름은 평(平), 딸은 안(安)이다. 그의 소망이 담긴 이름이다. 베트남 사람들은 참혹한 전쟁이 다시는 일어나선 안 된다는 간절한 소망을 갖고 있다. 이처럼 베트남 정부와 국민들은 전쟁의 기억을 되살리는 일은 창자를 끊는 고통을 주는 일이라며 애써 감춘다.

▲36명의 빈호아 사 주민이 희생된 '쭝빈 폭탄구덩이'에서 분향하는 평화의료연대 회원들.ⓒ 오마이뉴스 조호진

지난 1986년 '도이모이(쇄신)' 정책을 도입한 베트남은 시장경제를 지향하면서 과거 문제보다 경제부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1백년 간의 전쟁으로 독립과 통일은 이루었지만 너무 많은 것을 잃은 베트남 정부는 "과거를 밀어두고 미래를 위해 협력한다(put aside the past and cooperate for future)"는 방침 아래 과거 문제를 덮어둔 상태다. 도안 응히 씨의 답변은 이러한 바탕에서 나온 말로 이해된다.

지난 92년 베트남과 수교한 한국은 투자 4위 국일 정도로 최상의 협력관계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경제적 우월감을 과시하며 오만하게 접근하는 사례가 간혹 불거져 역사의 상처가 덧나지 않을까 우려되는 대목도 나타난다.

월남전 참전 군인들로 구성된 한 단체는 지난 2000년 꽝남성 디엔반현 하미마을의 위령비를 세우는 일에 3만 달러를 기부했다. 당시 이 마을에 주둔했던 청룡부대에 의해 희생된 주민 135명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세워진 위령비에는 이러한 비문(碑文)이 새겨져 있었다.

▲하미 마을 위령비에 덧씌워진 연꽃 ⓒ 오마이뉴스 조호진
"(전략)1968년 이른 봄, 음력 1월 26일 청룡병사들이 미친 듯이 와서 양민을 학살했다. 하미마을 30가구 중에 135명이 죽었다. 피가 이 지역을 물들이고, 모래와 뼈가 뒤엉켜 섞이고, 집들은 불타고, 불에 그을린 시신들이 얼키고 설키고, 개미들이 불탄 시신들을 갉아먹고, 피냄새가 진동했다. 폭풍이 한바탕 몰아치고 간 그것보다 더했다.

무너진 집에서는 늙은 어머니들과 아버지들이 신음하며 죽어갔고, 아이들은 두려워 공포에 질렸다. 도망친 사람들은 총에 맞아 죽었고, 아기가 죽은 어머니에게 기어가서 젖을 먹었다. 더 끔찍한 것은 탱크로 무덤을 파헤친 것이다. 어둠은 이 지역을 덮었다. 풀이 시들고 뼈가 말랐다. 원혼은 잠들지 못하고 여기저기 뒹굴고, 분노는 푸른 하늘에까지 닿았다.(중략)

과거의 전장이었던 이곳에 이제 고통은 줄어들고 있고, 한국인들은 다시 이곳에 찾아와 과거의 한스러운 일을 인정하고 사죄한다. 그리하여 용서의 바탕 위에 이 비석을 세웠다. 우리는 인도적인 인의로 고향의 발전과 협력을 열어갈 것이다. 이 모래 사장과 포플러 나무들이 양민학살을 기억할 것이다."


▲위령비에 새겨진 자식의 이름을 가리키는 어머니. 그는 자식 둘을 잃었다고 했다. ⓒ 오마이뉴스 조호진
지난달 22일 찾아간 하미 마을 위령비에는 이러한 비문대신 연꽃 그림이 덧씌워졌다. 위령비 제작비를 도왔던 참전 군인회의 항의로 비문이 사라진 것이다. 이 사건은 뼈아픈 반성보다 경제적 우월감으로 접근한 시각이 빚은 상처로 작용했다. 비문에 새겨진 연꽃은 평화와 자비를 상징하지만 강요에 의해 핀 탓인지 몹시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이밖에도 베트남에 진출한 일부 한국기업이 베트남 노동자들에게 가혹 행위를 저지르는 경우도 적지 않아 상처를 덧씌우고 있다. 작업 중 잡담을 했다는 이유로 입에 테이프를 부친 사건, 압정으로 찌른 사건 등은 천박한 자본이 저지른 악행으로 기억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조폭영화' 등이 한류열풍의 틈바구니에 끼여 무분별하게 수출돼 말썽을 일으킨 것으로 알려졌다. 베트남에서 한국 드라마와 한국 연예인의 인기는 매우 높다. 지난 99년에 45편의 한국 드라마가 상영됐으나 2000년에는 60편으로 늘어날 정도다.

▲증언을 듣다가 눈물을 흘리는 평화의료연대 소속 치과의사 ⓒ 오마이뉴스 조호진
폭력영화 수출에 대한 베트남 당국과 국민들의 반발은 상대 국가에 대한 역사적 배경이나 문화적 이해를 도외시한 천박한 자본주의 침투가 벌인 현상으로 해석되고 있다. 베트남 국민들의 반발은 우리가 지난 70년대 역사적 반성 없는 일본의 자본침투와 문화침략을 우려한 것과 궤를 같이할 수 있다.

한류악풍(韓流惡風) 걷어내는 한-베트남 평화예술제

'미안해요 베트남'을 만든 박치음 교수는 지난달 23일 베트남에서 반레 감독을 만났다. 이 두 사람이 만난 이유는 역사적 화해도, 반성도 없이 몰아치는 한류악풍(韓流惡風)을 걷어내고 양국의 진정한 화해와 평화를 위한 문화가교를 놓기 위해서다.

베트남평화의료연대, 베트남진실위원회, 나와 누리 등 3개 단체는 오는 6월 29일 국립극장에서 <한-베트남 평화예술제>를 열 계획이다. 이 평화예술제에는 전쟁반대와 평화를 주제로 예술활동을 펼쳐왔던 예술인들이 참여할 예정이다.

▲박치음 교수(좌측)와 반레감독(우측) ⓒ 김문호
평화예술제 총연출을 맡은 박 교수는 이날 반레 감독에게 "추악한 전쟁으로 인해 총부리를 겨눴던 한국과 베트남이 이제 평화의 세기를 여는 주역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평화예술제를 준비하고 있다"며 "베트남과 한국의 예술인들이 전쟁의 상처를 극복하고 평화를 선언하는 무대에 꼭 참석을 부탁한다"고 초청의사를 밝혔다.

이에 대해 반레 감독은 "예술인과 시민단체 관계자들의 노력으로 한국과 베트남의 상처가 조금씩 씻겨지고 있는 것을 바람직하게 생각한다"며 "무엇보다 문화예술이 과거의 상처를 씻는데 효과적으로 생각하며 이번 예술제 기꺼이 동참하고 싶다"고 초청을 수락했다.

반레 감독은 시와 소설 등의 문학작품을 발표한 작가이며 동시에 25여 편의 전쟁 다큐멘타리를 제작한 영화감독이다. 반레의 본명은 레지투이로 1949년 베트남 북부 닌빈 출신이다.

반레 라는 필명은 베트남전 당시 같은 소속 부대원으로 가장 친했던 '반레'라는 친구의 본명이다. 친구 '반레'는 시인이 되고자 했으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전쟁터에서 숨을 거두었고 그 친구의 꿈을 대신해 자신의 첫 시집에 '반레'라는 이름을 쓰면서 자신의 필명이 되었다.

▲오토바이 행렬로 활기찬 호치민 거리 ⓒ 오마이뉴스 조호진
1966년 베트남 전쟁 당시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군에 입대한 그는 입대동기 300명 중 살아남은 5명중의 한 명이 됐다. 그는 자신의 삶을 죽어간 벗들을 대신해 살기로 하고, 자신의 모든 문학 열정을 벗들의 원혼을 달래고 베트남전의 실상을 밝히는데 노력해 왔다.

'반레'는 '통일현의 천주교 신자'라는 영화로 베트남 영화제 시나리오 분야 최우수상(1985) '사랑에 빠지다'라는 시집으로 혁명전쟁문화위원회 최고상(1994) '그대 아직 살아 있다면'이라는 소설로 국방부 문학상(1994) '사이공, 1968년의 봄'이라는 영화로 일본영화제 Galaxi상(2000년) '원혼의 유언'이라는 영화로 베트남영화제 최고 감독상(2000년)을 수상했다.

박치음 교수는 1일 "이 무대는 불행했던 두 나라 사이에 생긴 상처를 인정하고, 평화적인 역사로 나아가기 위해 상처를 치료하고 화해하는 과정을 형상화하고 싶다"며 "전쟁을 넘어 평화의 세계를 여는 두 나라 예술인의 합창을 기대하고 싶다"고 평화예술제에 대한 소망을 밝혔다.

▲평화를 염원하는 베트남 어린이의 그림 ⓒ 조호진
세계 최강 미국은 아시아의 약소국 베트남을 침략했다가 참담한 패배를 당했다. 그것은 베트남의 문화와 전통을 무시한데 따른 결과이며 부도덕한 침략전쟁에 대한 세계 비난 여론과 양심의 반격에 무릎 꿇은 것이다.

한국과 베트남의 관계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역사적 반성과 화해를 바탕으로 싹을 틔운 우호와 협력을 자양분 삼아 좋은 친구가 될 것인지 아니면 오만한 경제적 우월감과 한류악풍(韓流惡風)으로 인해 잘못된 관계로 악화될 것인지에 대해 수교 10년을 맞아 되짚어 봐야 할 문제다. '역사는 반성하지 않는 자까지 용서하지는 않는다'는 말을 새겨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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