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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모든 방송매체에서 화려한 조명을 받으며 노래하는 가수들은 분명 우리 시대의 우상이다. 그들의 눈짓 하나, 몸짓 하나에 팬들은 가슴 졸이며 환호성을 보내고 매스미디어는 그들의 음악뿐 아니라 이성관계, 패션스타일을 비롯한 시시콜콜한 모든 것을 다 알아내 보도하기에 여념이 없다. 언뜻 보면 사소한 세상사에 매어 고심하는 보통 사람들과는 달리 진정한 자유인으로 세상을 쥐었다 폈다 할 것 같은 사람들, 그러나 실상은 어떠한가?

가수들은 자신들의 음악활동을 시작하며 제작사와 전속계약서를 체결하게 된다. 이 계약서는 1997년 이후 (사)연예제작자협회(이하 연제협)에서 마련한 것으로 대부분의 연제협 회원사들은 이 표준계약서를 준용하고 있다고 한다.

표준계약서의 준용으로 그나마 연예인과 제작사간의 계약관계가 사업자간의 계약으로 자리잡았다고는 하지만 연제협에서 제시하고 있는 표준계약서의 내용을 잘 살펴보면 여전히 연예인과 제작사간의 불평등한 계약관계의 소지가 그대로 담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가수들이 자유인으로 자신들의 예술활동을 하기보다는 심한 불평등 속에서 예술활동을 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는 것이다.

표준계약서의 가장 큰 문제는 표준계약서의 내용에 있어 가수들의 의무규정이 제작자의 권리규정에 비해 지나치게 많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전속계약서 5조의 제작자의 권리를 보면 음반, 비디오물, 영상음반, 프로그램출연, 사진촬영, 캐릭터 등에 대한 모든 제작, 복제, 편집, 판매, 초상에 대한 권리를 제작자에게 귀속하게 되어 있다.

반면 6조 가수들의 의무를 보면, 가수들은 제작자의 모든 권리취득 업무에 성실히 임해야 하며, 제작사가 원하는 모든 제 3자의 상업적 활동업무에도 성실하게 임해야 한다. 말하자면, 가수들이 일단 이 계약서에 사인하게 되면 자신이 원하지 않은 활동에 대해 사실상 거부할 권리가 없게 되는 것이다.

가수들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온갖 스케줄로 끌려다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특히 5조 3항에는 제작자가 가수들의 "성명, 예명, 사진, 주민등록등본, 주민등록등본사본, 초상, 필적, 각인 등을 계약에 사용, 수익 처분할 모든 권리를 가진다"고 명시해 놓고 있어 제작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가수들의 모든 신분들이 예속되는 것을 당연시하고 있다.

또한 8조를 보면 제작사는 자사 소속 가수들을 연제협 소속의 다른 제작사에게 계약상의 지위를 양도할 수 있으며 가수들은 이를 승인해야 한다고 명시해놓고 있다. 완곡한 표현이지만, 본말은 자신이 거느린 가수들을 다른 제작사에 상업적 대가를 받고 팔 수 있다는 뜻이다. 여기에다 계약의 효력발생조건으로 연제협 회장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제12조)는 조항은 형식적인 조문일 수도 있으나, 제 3자의 불공정 개입의 여지를 남겨놓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전속계약서에는 가수들의 이익분배 조항이나 손해배상 청구에 대한 권리들도 들어가 있다. 그러나 이 조항들은 제작자의 권리만큼 구체적이지 않고, 대부분 일에 대한 당연한 취득과 보상조항에 불과하다.

따지고 보면 제작사가 가수들의 모든 상업적 행위에 대한 취득권을 가지고 있고, 이를 그들의 동의없이 다른 제작사에 양도할 수 있으며, 가수들의 인적증명자료들이 계약에 사용될 때 제작사가 모든 권리를 가진다면 이것을 놓고 과연 평등한 계약관계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 것인가? 가장 현대적인 문화를 창조하는 가수들이 가장 낙후한 계약관계 속에서 일하고 있는 것이다. 대관절 우리는 지금 어느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인가?

그러나, 더 비극적인 것은 그나마 이 표준계약서마저도 현실에서 제대로 적용되는 사례가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이다. 아직도 많은 제작사들이 '가족같은 관계' 내지는 '보은-보신' 운운하며 생고생하는 가수들의 권리보장을 명문화하지 않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이는 대중예술 창작의 일익을 담당하는 제작사에서 자신의 파트너이자 대중예술창작자인 가수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말해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의 파트너이자 대중예술창작자인 가수를 자신과 동등한 입장의, 존중받고 세심하게 배려되어야 할 예술인으로 바라보기보다는 자신의 손쉬운 돈벌이 상대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어떻게 대중음악창작자인 가수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예술활동에 전념할 수 있을 것인가? 한마디로 표준계약서는 한국 대중음악의 발전을 가로막는 불평등하고 비민주적인 계약서인 것이다.

여기서 이제는 공정한 계약관계가 이루어진다고 주장하는 제작사들은 프로야구의 억대연봉 스타 뒤에 초라한 연봉을 받으며 연명하다가 시즌초면 수도 없이 잘려나가는 2진들이 존재하는 프로야구의 모순이 한국 프로야구를 팬들로부터 멀어지게 했던 사실을 반드시 새겨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구단의 횡포 앞에 무력하던 프로야구 선수들이 과연 어떤 모습으로 달라졌는지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는 표준계약서의 피해자인 가수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1월 16일 수요일 대중음악개혁을위한연대모임(대개련)의 '음반기획사의 독점 행사와 방송권력의 유착관계에 대한 개혁운동에 관한 기자회견'장에서 본 기자가 발표한 내용입니다. 

기자회견 도중 연예제작자협회의 백강 이사는 '앞으로 전속계약서의 불평등한 소지가 있는 조항들은 개정하자는 의견이 있다'면서도 '제작사의 마케팅 전략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관계를 불평등한 관계로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여 눈길을 끌기도 했습니다. 

덧붙여 위 기사는 대개련의 분석내용을 상당 부분 인용해 작성되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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