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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기획 - 용산기지를 다시그리며]
2부 주권 잃은 서울의 노른자위 ①

<오마이뉴스>는 2002년 한해동안 '용산'을 집중 보도합니다. <"지하에 뭐가 있는지 알고 그러냐" 동작대교 북단대로 미군 반대로 무산>을 시작으로 용산기지와 관련된 문제들을 집중 보도하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동작대교를 제외한 한강의 모든 다리들은 남단과 북단의 연결이 매우 자연스럽다. 하지만 동작대교의 경우 북단과의 연결도로가 아예 단절되어 있는 것을 한눈에 볼수 있다.(지도에서 빨간 점이 용산기지)ⓒ문화연대

1970년대 중반 서울시 간부들 "미군이 반대했다"

동작대교 북단이 후암동쪽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반신불구가 된 것은 주한미군 당국의 반대때문이었다는 증언이 나왔다. 1970년대 중반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을 지낸 손정목(74) 씨와 도시계획국 과장을 지낸 김병린(62) 씨는 최근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동작대교를 계획하고 건설할 당시 미군당국자를 찾아가 북단도로 건설의 필요성을 이야기했지만 미군이 반대해 무위로 돌아갔다"고 말했다.

특히 김 씨는 "75년 서울시 도시계획국 과장으로 재직할 당시 엉클어진 서울 도심을 일신하기 위해 중앙청 앞에서 용산미군기지를 통과해 정부 제1청사인 과천까지 일직선으로 도로를 뚫는 도로 계획선을 짰다"면서 "그것은 서울의 자존심을 세우는 일"이었다고 말했다.

김 씨는 "그러나 이를 도시 계획으로 결정한 후 건설부에 심의를 받으려고 했지만 당시 건설부와 외무부는 동작대교 북단도로의 미8군기지 통과를 반대했다"면서 "미군당국도 나를 색안경을 끼고 보면서 외무부 등을 통해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김 씨는 이러한 미군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우여곡절 끝에 도로계획선 자체는 76년에 확정했다고 말했다. 김 씨는 "도시계획은 100년지대계로서 서울시의 고유영역이며 이를 관철시키지 못한다면 역사의 큰 오점을 남기는 것이 될 것이라고 당시 구자춘 서울시장을 설득해 용산기지를 통과하는 도로계획선을 확정했다"고 말했다.

▲사진 위쪽의 직선으로 나 있는 불빛이 동작대교. 동작대교는 용산기지로 인해 후암동 길과 연결이 단절되어 있는 모습이 한눈에 보인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한편 도시계획선이 확정된 후 동작대교 북단도로의 용산기지 통과 계획이 단순한 계획으로만 그치지 않고 실제로 북단도로 건설을 위한 시도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미군의 반대로 좌절됐다고 한다. 다시 김병린 씨의 증언이다.

"78년 지하철 3·4호선 계획이 서면서 동작대교 건설과 함께 북단을 잇는 도로의 필요성 때문에 미8군과 본격적인 논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건설국에서 예산까지 세워 치밀하게 협상을 벌인 것은 아니지만 여러 차례 논의가 오고 갔습니다. 그땐 미군도 처음에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당시 서울시 일부 공무원들에 한해서 후암동쪽을 연결되는 길을 통해 미군 기지를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기 때문에 후암동쪽과 동작대교를 연결하는 도로를 내 버스를 다니게 하자는 의견이었지요. 그러나 결국 협상은 결렬됐고 동작대교는 미래를 기약하며 다리 끝 부분을 잘라 놓은 채 완공된 것입니다."

이러한 김병린 씨의 주장은 1973년 서울시 도시계획국장을 역임한 바 있는 손정목(74) 서울시립대 명예교수의 증언을 통해서도 확인됐다. 손 교수는 최근 <오마이뉴스> 기자와 만나 "미군기지 때문에 지상에 길을 내지 못한다면 지하로라도 뚫어보려고 미군당국과 논의를 했지만 미군이 '지하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나 그러느냐'고 반대해 무위로 돌아갔다고 회고했다.

"미군의 절대적인 위치에도 불구하고 동작대교가 지하철 지지교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도로교의 역할을 하게 됨에 따라, 미군기지 때문에 지상에 길을 내지 못한다면 지하도로라도 뚫어보자는 논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미군측은 '당신들은 미군기지 지하에 무엇이 있는 줄 알고 지하도로를 뚫겠다고 하는 것이냐'고 하는 등 협의에 응하지 않는 바람에 무위로 돌아갔습니다. 당시 미군은 국가의 안전과 평화 보장이라는 측면에서 절대적인 존재였습니다. 서울시는 물론 정부도 협상은커녕 제대로 된 항의도 못하던 엄혹한 시절이었죠."

▲(주)대우엔지니어링과 (주)대우개발이 1979년 10월에 공동 작성한 '동작대교가설공사 실시설계보고서'에 있는 동작대교 설계도면. 이 설계도면에 보면 동작대교 북단을 잇는 도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설계보고서에서도 확인된 동작대교의 역할

이러한 당시 서울시 도로계획국 간부들의 증언은 동작대교를 건설한 회사들의 설계보고서에서도 확인된다. 동작대교가 서울의 교통난을 해결하기 위한 장기계획하에 건설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설계회사였던 (주)대우엔지니어링과 시공사였던 (주)대우개발이 1979년 10월에 공동 작성한 '동작대교가설공사 실시설계보고서'는 동작대교의 필요성을 이렇게 적고 있다.

"동작대교는 도심과 과천면을 연결함으로써 제2정부종합청사 및 영동지구 개발계획을 지원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동작대교는 교통의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서울시 전역에 영향을 미치는 기능을 갖게 되어 그 필요성이 부각되는 것이다. 또한 제1한강교(한강대교)와 잠수교의 통행량을 일부 흡수함과 동시에 전반적인 시설용량을 증대하고 지하철 4호선의 지지교로서의 역할과 다리 신설로 인한 우회 교통의 감축 효과를 기대한다."

즉 동작대교의 건설목적은 크게 두 가지로 제2정부종합청사 및 영동지구 개발계획을 지원하고 교통의 감축효과를 내는 것과 지하철 4호선의 지지교로서의 역할을 기대했다는 것이다. 보고서대로라면 동작대로 북단과 연결되는 길은 용산기지를 통과해 후암동과 연결되어야 한다.

▲동작대교 북단으로 진입하는 자동차 불빛 궤적들. 미군기지가 있어서 도로가 크게 휘어져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서울의 자존심으로 다시 태어나야 할 동작대교

단국대 도시개발학과 조명래 교수는 "다리의 제일 큰 기능은 거대도시의 도로망을 연결시켜주는 것으로 한강다리는 한강으로 인해 끊긴 강남·북을 도로로 이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면서 "동작대교만이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강에 걸쳐 있는 모든 다리는 서울의 남북을 잇는 목적으로 건설되어 있는 만큼 다리의 북단은 항상 남쪽에서 올라온 방향을 그대로 타고 북으로 향하는 것이 상식입니다. 하지만 서울의 다리 중 동작대교만이 북단으로 이르는 길의 진행이 단절되어 있습니다."

84년 11월 서울시가 한강대교와 반포대교의 과밀교통량 분산효과를 기대하면서 연인원 72만4600명이 참여하고 6만1500대의 장비가 투입되고, 당시 서울시 예산의 4분의1인 553억원이라는 막대한 돈을 들여 6년만에 완공한 국내 최초의 '랭커 아치교'. 하지만 동작대교는 다리의 강북 쪽을 막아서고 있는 용산 미군기지로 인해 제 구실을 하지 못한 채 반신불수 상태로 18년을 연명해오고 있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동작대교가 서울 강남·북을 제대로 이어주려면 동작대교-용산동-후암동을 거쳐 시내로 들어오는 직선도로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용산동에 미군부대가 자리잡고 있어 동작대교를 건넌 차량들은 한강로나 서빙고쪽 강북 반포로를 이용해 옆으로 돌아가야 한다.

따라서 출퇴근시간 다리를 건너 시내 쪽으로 진입하는 차량은 바로 이 부분에서 심한 병목현상을 빚는다. 시내에서 강남쪽으로 나갈 때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도로 전문가들은 매일 아침 출근시간마다 벌어지는 교통지옥은 바로 동작대교에서 비롯된다고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동작대교는 84년 다리 북쪽 부분에 입체교차로 시설도 없이 다리 끝 부분이 잘린 채, 동부 이천동에서 제3한강교(한남대교) 쪽으로 빠지는 2차선 샛길만 만들어 놓고 완공됐다.

이렇듯 동작대교는 서울시 도로망의 중심인 중앙대로로 계획된 것이었지만, 용산기지를 통과할 수 없다는 미8군측의 반대로 도로교로서는 별 효용 가치가 없는 다리로 전락하고 말았다. 동작대교가 서울시의 자존심으로 다시 서는 날을 기다린다.

▲서울타워에서 바라본 용산 미군기지 야경. 고층건물은 보이지 않고, 미군 숙소와 가로등만 빛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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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같은 남자. 산소같은 미소가 아름답다. 공희정기자는 오마이뉴스 대학기자단 단장을 맡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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