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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부평구청 공무원들이 27일 구청 기자실을 강제 폐쇄했다. 기자실 비품을 철거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화투와 군용모포를 한 직원이 정리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손병관


"여러분, 이것 좀 보세요. 글쎄, 기자실 문 걸어 잠그고 지들끼리 쑥덕거린 이유가 다 있었다니까!"

12월27일 오전 인천시 부평구청 3층 기자실. 기자실 비품을 밖으로 들어내던 한 구청 직원의 탄식에 시민단체와 부평구청 직장협의회(위원장 고광식, 이하 부평직협) 관계자들의 시선이 기자실 한켠으로 쏠렸다. 이날 전격적으로 단행된 부평직협의 '기자실 철거작전' 도중 출입기자들이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화투와 군용모포가 발견된 것이다.

소파를 밖으로 나르던 한 공무원은 "명색이 지방일간지 기자라는 사람들이 기자실에서 화투패를 돌릴 여유가 있었다니 기가 차다. 관공서 기자실이 '혈세 낭비와 관언 유착의 온상'이라는 세간의 속설이 입증됐다"며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부평구청 기자실의 철거 전후의 모습 ⓒ 오마이뉴스 손병관
부평직협이 기자실 폐쇄 운동에 본격적으로 착수한 것은 지난 6일. 부평직협은 "27일까지 개인 비품을 모두 치우고 기자실을 비워주지 않을 경우 강제로 기자실을 폐쇄하겠다"는 입장을 통보한 후 이날부터 점심시간을 이용, 기자실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여왔다.

부평직협의 기자실 폐쇄 운동은 민주노총 인천지부, 신문개혁국민행동 인천본부, 민주주의민족통일 인천연합 등 지역단체들의 지지를 받았고, 이에 출입기자들은 "박수묵 구청장이 마련해준 것이니 구청장이 비워달라면 나가겠다"고 공을 구청장에게 넘겼다.

그러나 내년 지자체 선거를 앞두고 지역 언론들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구청장은 기자실 문제에 대해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직협의 관계자는 "구청장은 기자실을 폐쇄하자니 보금자리를 잃은 기자들의 '보복 기사'가 두렵고, 존치시키자니 '관언유착'이라는 비판이 두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결국 구청 출입기자들은 폐쇄 시한을 하루 앞둔 26일 '출입기자 일동'이라는 명의로 "17일 구청장을 면담, '22일까지 뚜렷한 결정이 없을 시 기자실 사용을 금하겠다'는 입장을 전했다. 따라서 26일 오후부터 기자실 사용을 금하기로 결정한다"는 요지의 성명서를 기자실 문에 부착했다.

그러나 이들은 "최근 출입기자들을 마치 사이비 집단으로 매도하는 것에 대해 유감의 뜻을 표한다"면서 "언론의 자유를 위협하는 부당한 간섭, 알력은 단호히 배격한다"는 '경고'를 잊지 않았다.

"기자실은 이제 공보실 소관"이라는 공보실장(카메라를 등지고 있는 사람)의 말에 고광식 부평직협 위원장은 "그 동안 제대로 관리했다면 오늘의 집단 행동도 없었을 것"이라고 응수했다. ⓒ 오마이뉴스 손병관
그러나 출입기자들의 '사실상 항복 선언'에도 부평직협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고광식 위원장은 27일 강제철거에 앞서 가진 집회에서 "기자들이 쫓겨갈 위기에 놓이자 망신당하지 않으려고 궁여지책을 썼다"면서 "여론이 비판적으로 흐르면 기자실에서 일단 철수했다가 조용해지면 하나둘 슬그머니 복귀할 것"이라며 '자진 반납 선언'을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고 위원장은 "99년도 구청 회계 결산 검사 보고서에 따르면, 출입 기자들에게 '구정(區政) 홍보 기여자 격려금'으로 총 1천만원이 지급됐다"면서 "구청장이 국민들의 세금으로 출입기자들에게 공공연한 촌지를 줘 관청에 유리한 기사를 쓰게 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밝혔다.

고 위원장은 또 "구청 직원 설문조사에서도 90% 이상이 기자실 폐쇄를 찬성하고 있는 상황에서 기자실 폐쇄는 공직사회 개혁의 첫 걸음"이라고 강조했다.

부평직협의 연락을 받고 달려온 열쇠 수리공 ⓒ 오마이뉴스 손병관
집회를 마친 직협 임원들이 기자실로 향했으나 이들을 맞이한 것은 기자들이 아닌, 구청 문화공보실(이하 공보실) 관계자들이었다.

기자실 열쇠를 달라는 직협의 요구에 공보실장은 "기자들이 기자실을 자진반납해서 이제는 공보실이 기자실을 관리한다"며 "분쟁의 소지가 없어졌으니 집단 행동을 하지 말고 돌아가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고 위원장은 "지난 50년 동안 공보실이 기자실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서 갖가지 폐해가 일어났다"면서 "기자들의 반납 결정은 무늬만 반납이지, 믿을 수 없고, 기자들이 행여나 다시 돌아올 생각이 들지 않도록 우리가 기자실을 말끔히 정리해주겠다"고 답했다.

공보실과 직협 임원들의 논쟁이 진행되는 동안 직협의 한 관계자는 "경남 사천 기자실은 폐지 여론에 밀려 '보도실'로 개편됐지만, 이름만 바뀐 일회성 조치라는 비판이 많아 직협에서 다시 개선을 요구하고 있다"며 "일시적인 기자단의 철수로는 기자실 개혁이라는 최종 목표가 이뤄졌다고 볼 수 없다"고 부연 설명했다.

공보실장이 계속 완강한 태도를 보이자 직협 임원들 사이에서는 "구청장의 지시를 받은 공보실장이 우리로 하여금 강제로 문을 따게 한 후 비품 훼손 등의 명분을 걸어 징계 조치를 내리려는 처사"라는 말들이 터져 나왔다.

지루한 실랑이에 지치다 못한 한 구청 직원은 공보실장에게 "실장님이 이런다고 출입기자들이 '어휴, 잘하셨어요!'라는 말이나 할 것 같습니까?"라고 쓴 소리를 던지기도 했다.

부평구청 공무원이 기자실에서 꺼낸 비품에 안내문을 붙이고 있다. 안내문에는 "그 동안 기자실에서 불법적으로 사용한 물품은 구청의 것이기에 다시 환원한다"는 문구가 씌여 있다. ⓒ 오마이뉴스 손병관
언쟁이 끝없이 이어지고, 외부 행사 참석차 청사를 비운 구청장과의 연락도 여의치 않자 직협은 열쇠 수리공을 불러 기자실 문을 강제로 열었다.

구청 직원들은 비품들을 밖으로 끄집어내고 기자실 문을 다시 잠그는 데는 15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부평직협의 한 관계자는 "50년 공무원 역사상 엄두도 내지 못했던 일을 단 15분만에 해치웠다"고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신문개혁국민행동 인천본부는 이날 "혈세 낭비, 관언 유착의 온상인 기자실은 한국 언론 상황에서만 볼 수 있는 병폐로, 기자실 폐쇄 운동이 부평구를 시발로 전국으로 번져나가길 바란다"는 환영 논평을 발표했다.

일선 관공서 출입기자단의 기자실 반납 결의에도 불구하고 해당 직장협의회가 기자실을 실력으로 폐쇄한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부평직협의 이같은 실력 행사는 내년 3월 전국적인 공무원노조를 출범시키겠다는 전국공무원직장협의회총연합(이하 전공련)의 움직임과 맞물려 각 지역 관공서 기자실 개혁운동에도 촉매제로 작용할 전망이다.

전공련에 따르면, 현재 부산, 경남(창원, 마산, 진주, 사천, 고령), 울산, 강원(강릉, 평창, 원주), 경기(오산), 충청 등지에서 기자실 개혁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또한 일선 직협의 요구에 밀려 실제 일부 지방 관공서의 기자실이 폐쇄되거나 개방형 브리핑룸으로 전환되는 성과가 나타나기도 했다.

때마침 노사정위원회에서 공무원노조에 단결권과 단체교섭권을 부여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상황에서 공무원노조가 제한적인 범위에서나마 합법성을 띨 경우 기자실 개혁 운동은 더욱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기자실 내 비품들이 바깥 복도로 옮겨진 후 부평구청의 한 공무원이 기자실 문을 잠그고 있다. ⓒ 오마이뉴스 손병관


여전히 건재한 중앙지 기자실

전국 각 지역의 기자실 폐쇄 움직임과는 달리 중앙의 기자실은 과거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올 한해 언론계 안팎의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킨 기자실 존폐 논쟁의 단초는 지난 3월 오마이뉴스 기자가 인천공항 기자실을 취재목적으로 방문했다가 기자단 간사의 제지를 받고 쫓겨난 '인천공항 기자실 사건'으로부터 비롯됐다.

네티즌들의 폭발적인 관심 속에 '출입기자실 제도'는 언론개혁운동의 주요 과제 중 하나로 떠올랐지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특권을 놓지 않으려는 중앙지 기자실은 요지부동인 상황이다.

실제 오마이뉴스의 K기자는 지난 11월15일 경찰서 출입기자들의 일상을 취재하기 위해 서울 강남경찰서 기자실을 방문했다가 저지당한 바 있다.

당시 K기자가 서울 경찰청과 법원을 방문하고 이 경찰서에 도착한 것은 다음날 새벽 1시 30분이었다. 숙직실에서 잠을 청하다 불쑥 나타난 J일보 기자는 K기자에게 "아저씨는 여기 들어오면 안되는데..."라고 운을 떼며 기자실에서 나가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K기자가 반발, 둘 사이에 언쟁이 붙었고, 옆 자리의 K신문 기자까지 J일보를 거들고 나서 갑자기 기자실 분위기는 '제2의 인천공항 기자실'을 방불케 했다.

오마이뉴스의 최경준 기자가 지난 3월 인천공항 관리공단과 출입기자들을 상대로 낸 '기자실 출입방해금지 가처분 신청'에서 인천지법은 "인천공항 기자실 사건에 대해 법원은 '공공기관 기자실의 배타적 운영은 헌법이 보장한 언론자유 정신에 위배된다"고 결정한 바 있다.

하지만 '강남 경찰서 사건'은 일반인과 비등록 기자들에게는 여전히 높은 중앙기자실의 문턱을 실감하게 하는 케이스이다.

현재 서울 시내 일선 경찰서나 정부부처에 전용 기자실을 두고 있는 '중앙언론사'는 <경향>, <국민>, <대한매일>, <동아>, <문화>, <세계>, <연합>, <조선>, <중앙>, <한겨레>, <한국>, KBS, MBC, SBS, YTN, CBS 등 16개사이다. 지방의 공무원직장협의회에서 활발히 전개되고 있는 기자실 개혁운동도 유독 서울은 물론 광역지자체의 중앙언론 기자실에까지 확산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언론노동조합연맹의 김용백 사무처장은 "중앙언론사 기자들이 기자실 전용 부스를 엄청난 특권으로 인식하는 관행이 수십년간 이어져온 마당에 기자실 개혁이 하루아침에 이뤄질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한 중앙일간지 기자도 "인천공항 사건 재판에서 이겼지만, 오마이뉴스에서 좀더 적극적으로 문제를 제기했어야 했다"고 지적하고, "사건 이후 기자 사회 내부에서 기자실 개혁에 대한 논의가 오갔지만, 더욱 폐쇄적으로 운영하자는 목소리도 높아졌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이 기자는 "복잡다단한 여러 상황이 얽혀 있지만, 기자실 개혁이 언론개혁으로 가는 큰 줄기라는 것은 인정한다"면서 "그런 측면에서 기자실 개혁은 아직 끝나지 않은 싸움이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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