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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순사건 당시 한국언론은 반란군의 만행을 고발하는 데는 적극적이었지만 진압 과정에서 정부군에 의해 무고한 민간인이 수없이 희생된 사실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평화일보 보도기사에서 '천인공노할 국군의 반란' '군경·양민 등을 살상' 등의 제목이 보인다.
2001년은 여순사건 발생 53주년이다.

그런데 여순사건 53주기를 기념하기 위해 제작 중이던 다큐멘터리 장편영화 <애기섬>의 제작이 한 언론사의 '색깔논쟁'에 의해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지구촌 사람들과 한겨레 사람들이 냉전과 대립으로 얼룩진 20세기와 결별하고 화해와 통일을 향해 나아가기로 약속한 21세기 벽두에 발생한 이 사태는 여순사건 왜곡보도가 '과거완료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준 사례이다.

다큐영화 <애기섬>은 2000년 7월부터 촬영에 들어가 2001년 9월까지 모든 제작을 마치고 10월 19일부터 여수와 순천에서 상영될 예정이었다. 1시간 20분 길이로 제작 중이던 이 영화는 홍영기 순천대 사학과 교수의 안내로 여순사건 당시 반대편에 서 있던 관련자 등을 찾아 사건의 진실을 추적하는 논픽션과, 한 평범한 가족의 비극을 재현해 가해자와 피해자의 화해를 모색하는 픽션의 요소를 동시에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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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제작 당시부터 파문이 끊이지 않았다. 여수와 순천에 있는 재향군인회와 상이군경회 등 15개 보수단체가 공동성명을 낸 것은 물론이고 군의 향토사단 역시 제작 과정에 개입했다. 이 과정에서 시나리오 내용이 일부 수정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기는 했지만, 영화제작 자체가 중단될 정도의 불상사는 발생하지 않았다.

문제는 전혀 엉뚱한 곳에서 발생했다. 한 언론사가 21세기 대명천지에 영화에 대한 '사상검증'을 제기하고 나서면서 '공든 탑'이 한순간에 와장창 무너진 것이다.

조선일보의 '새끼매체'(강준만 교수의 표현을 빌렸음)인 <월간조선> 2001년 10월호는 영화 <애기섬>을 "여순 14연대 좌익 반란사건을 통일운동의 성격을 띤 것처럼, 그리고 국군의 진압을 양민학살로 부각시키고, 국군이 함포사격으로 양민 1천명을 죽였다고 조작한 영화"라고 식칼로 두부 자르듯이 단순 명쾌하게(?) 규정했다.

▲ <월간조선> 2001년 10월호에 실린 특종(?) 기사. 편협한 역사인식과 부실한 확인취재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으로 확인된 이 기사를 한국언론사는 어떻게 기록할까. '낙종'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오보'는 말자는 금언이 새삼 떠오른다.

그런데 이 기사를 작성한 우종창 <월간조선> 기자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내세운 자료와 근거는 예상외로 단출했다.

우선 국정 고등학교 국사교과서 <국사(하)>와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가 펴낸 <한국전쟁사> 등 두 권의 책에 적혀 있는 여순사건 관련 기록을 제시하는 한편 몇몇의 취재원(그것도 자신에게 유리한 취재원 중심으로)과 나눈 대화내용을 소개한 것이 우 기자가 한 취재의 거의 전부처럼 보였던 것이다.

전면에 내세운 주장의 민감함과 무거움에 비하면 한마디로 너무나 안이한 취재를 했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월간조선>의 이러한 단순명쾌한 결론은 '편협한 역사인식'과 '부실한 확인취재'에 터잡아 내려진 함량미달의 판단일 뿐이 아닐까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다시 말해 단순하고 고정적인 역사인식을 가지고 사고를 전개하면 총체적이고 탄력적인 상황인식에 이르지 못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말이다.

예컨대 '심증'만 있고 '물증'이 없어 미궁에 빠져 있던 김구 암살 사건의 경우 최근 새로운 자료가 발견되면서 그 진상이 점차 드러나고 있지 않은가. 우 기자는 자신이 알고 있는 역사지식과 고정적 사고만을 판단의 잣대로 삼는 것을 고집하기 이전에 역사에 대한 정의와 개념도 이렇게 유동적일 수 있다는 기초적 사실부터 먼저 배웠어야 하지 않았을까.

우종창 기자의 기사를 정독해 보니, 논쟁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부분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1) <월간조선>은 "영화 <애기섬>이 국군이 함포사격으로 양민 1천명을 죽였다고 조작했다"고 주장했다.

<월간조선>은 기사에서 "이 영화에서는 역사적으로 확인되지 않은 사건을 고증을 거쳐 사실로 확인된 것처럼 묘사하는 장면이 일부 등장한다. 이는 역사의 왜곡이 아니라 역사의 조작이다"라고 주장하면서 국군이 여수시에 함포사격을 했다는 장면을 대표적인 사례로 꼽았다.

우종창 기자는 자신이 제기한 주장의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 국방부 문의를 통해 얻은 답변, 한 여수지역 6·25참전자회 관계자와의 인터뷰, <한국전쟁사>에 실린 관련 기록 확인, 종군기자단의 기록 확인 등 4가지 근거를 제시했는데, 그 내용은 각각 다음과 같다.

●국방부 문의를 통해 얻은 답변: "해군 함정이 출동하였으나 포격 여부는 밝혀진 바가 없다."
●한 여수지역 6·25참전자회 관계자와의 인터뷰: "함포사격은 처음 듣는 얘기이다."
●<한국전쟁사>에 실린 관련 기록 확인: "함정에서 박격포를 쏘았다는 내용은 있지만 함포사격은 아니다."
●종군기자단의 기록 확인: "그런 기록이 없다."

그러나 함포사격 사실 여부는 차치하고 우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취재의 수준과 범위가 너무나 부실하고 협소하다는 점이다. 우선 자신의 주장에 유리한 기록만을 취하거나 그런 취재원만을 만난 것이 아니냐는 혐의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왜냐하면 진압작전시 함선에서 사격을 했다는 증언이나 기록은 곳곳에 있기 때문이다.

우선 <월간조선> 기자는 국방부 관계자나 여수지역 6·25참전자회 관계자만 만나기 전에 이 지역 향토사학자 김계유 씨의 증언부터 점검해야 했다. 김 씨는 '당시 대한민국에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군사력을 동원하여 여수를 삼면에서 포위한 뒤 반군도 없는 거리에, 6만명의 동포가 살고 있는 거리에 무차별 포격을 가하고 장갑차를 앞세워 전 시민을 포로로 삼은' 진압작전의 현황을 다음과 같이 증언한 바 있다.

"육지에서는 사방에서 콩 볶는 것 같은 총 소리! 따아 따아 따아 하고 쉴 새 없이 뿜어대는 기관총 소리! 쿠웅 쿠웅 쿠웅 하고 천지를 뒤흔드는 박격포 소리! 바다에서는 아무데나 용서 없이 쏴대는 함포사격 소리! 하늘에서는 귀를 째는 비행기의 굉음! 좌우간 이 순간의 여수는 마치 지구 최후의 날을 연상케 하는, 바로 그것이었다."(김계유, '내가 겪은 여순사건', <여수문화> 제5집)

한편 종군기자단의 기록을 확인해보니 "그런 기록이 없다"는 우종창 기자의 주장도 사실과 전혀 다르다. 여순사건 종군기자단의 일원이자 <월간조선>이 1993년 발간한 <한국현대사 119대 사건>에 여순사건 관련 원고를 게재하기도 했던 이경모 씨(당시 호남신문 사진부장)는 자신의 회고문 '사선 넘으며 촬영한 동족상잔의 비극'에 이런 글을 남겼다.

"여수탈환은 10월 24일부터 시작되었다. 송호성 장군이 진두지휘를 하며 공격하였으나 워낙 반군의 반격이 심하여 첫 번째 공격은 실패하고 말았다. 26일 밤에 새로 투입된 장갑차를 앞세우고 재공격을 시작하여 곧바로 여수시 외곽에 진입한 국군은 27일 새벽녘에 함포사격을 시작하면서 전세를 유리하게 역전시키게 되었다.…함포사격이 끝난 뒤의 여수 시가지는 계속 불타고 있었으며 27일 밤의 여수 시가지 야경은 대낮의 살기 띤 상황이 언제였냐는 듯 아름답기만 하였다."

▲ 여순사건 종군기자 이경모가 촬영한 1948년 10월 27일 여수 시가지 야경. <월간조선>에 원고를 기고했던 이경모는 자신의 회고문에 "함포사격이 끝난 뒤의 여수 시가지는 계속 불타고 있었다"고 분명히 기록했다. <월간조선>은 이런 사진과 증언조차 무시했다. ⓒ 출전: 이경모 사진집 <격동기의 현장>

한편 흥미로운 것은 1948년 10월 28일자 조선일보 기사에도 '함포' '발사' 등의 말이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26일 대한민국 육군총사령부 발표에 의하면 여수에 대하여 2면 공격으로 남방으로부터는 여수항에 머물러 있는 해군 함정에서 발사하는 37미리 함포의 탄막 엄호하에 수륙양면작전을 써서 여수상륙에 성공하였다 한다.

따라서 <월간조선>은 영화 <애기섬>을 '역사적으로 확인되지 않은 사건을 고증을 거쳐 사실로 확인된 것처럼 묘사한 영화'라고 단정짓기 이전에, "함포사격이 있었다"는 다양한 증언과 기록에 대해서도 소개하고 이것에 대한 면밀한 고증과 객관적 검토의 절차를 밟아야 했다.

우종창 기자를 비롯한 <월간조선> 식구들에게 유익한 역사공부가 될 한 권의 책을 더 소개하기로 한다. 당대의 논객이자 청년의 스승으로 불려온 리영희 교수의 자전적 에세이 <역정-나의 청년시대>가 바로 그 책이다. 리영희 교수는 조선일보 외신부장까지 지내신 분이니 편견 없이 꼭 탐독하기 바란다.

이 책에는, 리 교수가 여수 앞바다에서 함포사격이 있을 당시 군대에 차출된 함선 갑판 위에서 해양대학 신입생의 신분으로 목격한 정황이 생생히 묘사돼 있다.

<여순사건을 공부하다 보니, 한국현대사의 이 비극적 사건과 적지 않은 사람의 운명이 긴밀하게 연관돼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앞으로 기회와 능력이 된다면, 여순사건과 리영희, 여순사건과 박정희(당시 남로당 정보팀 비밀당원으로 활동하다 후에 대한민국 대통령이 된 인물), 여순사건과 이경모(당시 사진작가로 종군취재), 여순사건과 신영길(당시 14연대가 주둔하던 지역의 파출소장) 등의 글을 올릴 예정이다. 우리는 이들의 이야기에서 '역사와 사람'의 운명적 관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할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2) <월간조선>은 영화 <애기섬>의 제목으로 따온 '애기섬'이 보도연맹 학살장소라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고 주장했다.

이번에는 두 가지의 근거가 제시됐는데, 국방부 문의를 통해 얻은 답변, 한 여수지역 6·25참전단체 관계자와의 인터뷰가 바로 그것이다. 그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국방부 문의를 통해 얻은 답변: "그런 역사적 기록이 없다."
●한 여수지역 6·25참전단체 관계자와의 인터뷰: "여순사건 무렵 애기섬에서 희생자가 있었다는 증언은 있지만 보도연맹 학살사건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만 보더라도 이 주장의 '논리학적 수준'은 너무나 부실하다. 무엇보다 "역사적 기록이 없다"는 무책임한 답변과 "관계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는 불확실한 증언만을 근거로 시시비비를 가리려는 것은 기자로서 성실한 자세가 아니다.

우선 "역사적 기록이 없다"고 했는데, '역사적 기록'이 없다는 것이 곧바로 '역사적 사실'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관계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는 증언도 달리 표현하면 "정확한 사실은 모른다"는 고백이 된다.

따라서 <월간조선>은 여수지역 시민단체가 수년에 걸친 현장발굴과 증언청취를 끝낸 뒤 정리한 다음과 같은 보고서부터 먼저 읽었어야 했다.

"여순사건이 종료되자 정부는 전국적으로 좌익 성향자들을 '국민보도연맹'에 가입시키고 이들을 관리하였는데 여수지방의 보도연맹원들은 거의 여순사건 관련자들이었다. 사건 후 2년이 지나지 않아 6·25가 터지자, 정부는 전국에 걸쳐 이들 보도연맹 가입자들을 제거하기 위해 집합시키고 이들을 처형하였다. 율촌, 소라, 삼일, 쌍봉과 여수의 내륙지방은 여수경찰서 무덕관에 집결시킨 후에 경남 남해도 남단에 있는 애기섬으로 끌고 간 후 총살하고 수장하였는데 당시 관계자의 증언에 의하면 약 120명 이내로 추정된다."(여수지역사회연구소, <여순사건자료집2>, 16p)

(3) <월간조선>은 "영화 <애기섬>이 국군진압을 양민학살로 지나치게 부각시켰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증거로 시나리오에 등장한 내용을 열거했다. 다음은 그 중의 한 대목이다.

"장면 21: 이른 새벽. (10월) 23일 순천이 탈환됐다. 군경은 부역자를 색출한다는 이름으로 피의 보복을 시작했다. 그냥 죽어야만 했다. 의심만 가도, 손가락질만 당해도 아무런 저항도 없이 죽어야만 했다. 눈먼 총부리의 역사. 이것이 한국사의 최대 비극, 집단 민간인 학살의 시작이 될지는 역사도 모르고 있었다. 그 시절의 군인과 경찰은 삶과 죽음의 감별사였다. 누구도 대항할 수 없는 신적인 존재였다. 초등학교에 수천명씩을 모은 뒤 정확한 판단도 없이 의심만 가면 그 자리에서 수십명씩 죽였다."

그러나 연재기사 (1)의 칼-마이던스 라이프지 기자와 연재기사 (3)의 유건호 조선일보 기자의 증언에서도 확인했듯이, 이 내용은 부인하고 싶어도 부인할 수 없는 '객관적 사실'이다.

실제로 이날 진압과정이 지나쳤다는 고백은 당시 진압군 측에서도 나온 바 있다. 백선엽 장군은 <실록 지리산>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지도자들의 성화로 조급하게 이뤄진 작전으로 시가지에 대한 무차별 포격이 이뤄져 많은 시민의 희생을 낳았다"고 일부나마 그 잘못을 시인한 바 있다.

▲ 과잉진압에 대한 고백은 진압군 측에서도 나왔다. 한국군 최초의 4성장군인 백선엽은 자신의 회고록 <실록 지리산>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성화로 작전이 조급하게 이뤄지는 바람에 무차별 폭격에 따른 민간인 희생이 적지 않았다"고 고백한 바 있다. 백선엽과 회고록 표지.

따라서 "영화 <애기섬>이 국군의 반란군 진압을 근거도 없이 비방했다"는 <월간조선>의 주장은 사실과 다를 뿐 아니라 도리어 그것 자체가 '근거 없는 비방'이다. 아울러 <월간조선>은 여순사건 당시 조선일보에 실린 이런 기사를 가슴에 손을 얹고 읽어보기 바란다.

나는 상사의 명령으로 순천탈환전에 참가했을 때에도 솔직히 말하면 반군에게 아무런 증오감도 느끼지 않았다. …(중략)… 순천을 완전 점령한 지금에도 나는 '점령'이라는 말을 결코 쓰려고 하지 않는다. 동족간에 자국 내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는 데 점령이 무슨 점령이란 말인가? 나로서는 피눈물 나는 싸움이었다.(조선일보 1948. 11. 23. '정비석의 여순낙수(2)')

소설가 정비석은 진압군 측에서 종군기를 쓰면서도 동족상잔의 아픔을 이런 식으로 표현했던 것이다.

앞에서 몇 차례 지적한 것처럼, <월간조선> 우종창 기자는 조선일보나 <월간조선>에 실렸던 수많은 기사나 자료조차 검토하지 않고, 그저 고등학교 국사교과서 수준의 역사인식 하나 달랑 들고 용감하게 색깔공세에 나섰다.

<월간조선>이 53년 전의 조선일보보다도 더 퇴행적인 역사인식을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자신의 매체에 실린 기사 논조와 전혀 반대의 주장을 펼치고 있는 <월간조선>의 행태는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러나 내가 <월간조선>과 우종창 기자라는 사람에 대해서 정말이지 정신분석학적 접근이 필요한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하게 만든 사연은 따로 있다. 그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는 내일 올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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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환 기자는 월간 말 취재차장으로 일하고 있으며 언론, 지역, 에너지, 식량 문제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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