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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사건이 최초로 발생한 시점은 1948년 10월 19일 밤이었다. 그러나 일반 국민들이 신문 보도를 통해 여순사건 발생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3일이나 흐른 10월 22일 아침이었다. 여순사건에 대한 정부의 철저한 보도통제가 실시된 결과였다. 이승만 정부가 이 사실을 언론에 공개한 것은 10월 21일 오전 11시였다.

이승만 정부는 그 이틀 동안 과연 무엇을 준비했던 것일까.

우선 당시 발행된 신문들의 보도내용을 찾아보자. 10월 22일. 모든 신문은 천편일률적으로 전날 이범석 국무총리가 발표한 여순사건 기자회견 내용을 보도했는데, 다음은 1948년 당시 대표적 신문인 서울신문과 자유신문에 보도된 내용이다.(참고로 여순사건 1년 전인 1947년 9월 미군정 조사에 따르면, 경향신문의 발행부수는 6만2천부, 서울신문 5만2천부, 동아일보 4만3천부, 자유신문 4만부, 조선일보 2만5천부∼3만5천부였다.)

서울신문의 여순사건 보도기사. 당시 언론은 정부와 군 당국의 발표를 앵무새처럼 보도하는 데 급급했다. '반란지구에 계엄령' '여수에서 국군반란' '순천에서 학살방화' 등의 문구가 보인다.
이번 국군이 일으킨 반란의 주요 원인과 폭동 성질은 수식 전에 공산주의자가 극우의 정객들과 결탁해서 반국가적 반란을 일으키자는 책동이었다.(서울신문 1948. 10. 22)

천인공노할 공산주의 도당의 패악은 물론 여기에 국가와 민족을 표방하는 극우파가 가담하여 죄악적 행위를 조장시키고 사리를 위해 합한 것은 가증한 일이다.(자유신문 1948. 10. 22)


이승만 정부의 최초 발표에 따르면, 여순사건이 '공산주의자가 극우의 정객들과 결탁해서 일으킨 반국가적 반란'이자 '천인공노할 공산주의 도당과 국가와 민족을 표방하는 극우파가 가담한 폭동'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여순사건에 대해 우리가 진리처럼 알고 있던 '교과서식 정의'와 정면으로 배치된다. 우리는 그 동안 여순사건을 '여수 주둔 국방경비대 14연대 좌익계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여기에 이 지역의 좌익계 청년과 주민이 호응한 폭동'으로 배워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승만 정부가 익명으로 발표한 '국가와 민족을 표방하는 극우정객'은 과연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

이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잠시 후로 미루기로 하고 여기서 잠시 1948년 당시 한국언론의 행태를 살펴보기로 하자. 한국언론은 무엇보다 먼저 여순사건의 전개과정을 지켜보면서 그 원인에 대한 냉정한 분석을 수행해야 했다. 설사 정부의 발표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상식적으로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가져보는 것이 당연했을 것이다.

(1) 왜 다수의 군인들이 소수의 남로당 계열 군인들의 선동에 넘어갔는가.
(2) 왜 다수의 지방 주민들이 이들의 반란에 가세했는가.
(3) 왜 일부 진압부대 군인들이 도리어 반란군에 합류했는가.

실제로 당시에도 그런 '상식적 의문'을 제기한 기자가 있었다. 다음은 합동통신 설국환 기자가 여수와 순천을 취재한 뒤 월간지 <신천지> 1948년 11월호에 발표한 기사의 일부다.
이 사건의 현지로 가면서 우리가 먼저 알고자 한 것이 왜 제14연대라는 적지 않은 국군의 병사가 반란을 일으키었는가 하는 의문이었다. 그리고 이에 대한 해답은 서울서 우리가 들은 한 공산당원과 극우파의 공동전략으로 일으킨 것이라는 것이었으나 만일 이 단순한 해석을 그대로 믿는다면 반란의 가능성은 비단 제14연대뿐은 아니라는 결과가 되어버리는 것이며 따라서 금반 사건은 좀더 상세한 설명 없이는 이해하기 곤란한 것이다.

그러나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당시 대다수 한국언론은 '상식적인 의문'을 제기하거나 '좀더 상세한 설명'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당시 독자와 국민이 여순사건의 원인과 배경을 제대로 파악하기란 애초에 불가능했다. 첫 회에서 <라이프>지 칼-마이던스 기자의 통찰을 소개했거니와, 14연대 반란의 원인과 배경은 김득중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가 <역사연구>에 발표한 다음과 같은 논문 내용과 무관치 않다.
여순사건은 봉기를 일으킨 주체세력인 군과 경쟁관계에 있던 경찰과의 갈등도 작용했지만 제주 4·3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거부하면서 발발한 것에서도 잘 나타나듯이 분단정권 반대, 친일파 척결 등 해방 후부터 쌓인 여러 불만이 폭발된 것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군인과 경찰의 대립, 친일파 척결의 미흡 등이 여순반란의 근인(近因)과 원인(遠因)으로 작용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두 개의 인용문으로 간략하게 설명하기로 한다.

우선 1948년 10월 23일 여순사건 현장으로 달려가던 서울발 광주행 열차에서 국방부 인사국장 강영훈 중령이 합동통신 설국환 기자에게 털어놓은 말을 들어보자. (강영훈 중령은 이후 노태우 정권에서 국무총리까지 지냈다.)
사회경제의 혼란에서 오는 일부 행정관리 내지는 경찰의 부패를 곁에 보면서 국군병사들은 완전히 목표를 잃어버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국군의 고민은 경찰 측에서 왕왕 말하듯 하는 국군의 불순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수입의 부족을 비행(非行)으로써 보충하는 많은 경관은 다만 묵묵히 어느 날만을 기다리고 있는 국군병사를 경멸하는 경향이 있었고 이에 대한 국군병사의 반경감정(反警感情)은 결코 상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공산당의 모략으로 발단한 것이기는 하지만 제주상태(4·3사건을 말함)만 하더라도 진압이 어려운 것은 경찰의 비행 때문입니다.

강영훈 중령의 발언에서, 당시 경찰이 부패와 비행을 저지르면서도 도리어 국군을 경멸하는 태도를 보였으며, 이에 대한 군인들의 반감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심각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일보는 김구의 해명을 지면에 적극 반영했다. '極右關與云은 理解難'(여순반란에 극우가 관련됐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문구와 함께 김구의 얼굴 사진을 실었다. 당시 조선일보 사장이었던 방응모는 김구가 이끈 한독당의 재정부장을 지냈다.
이번에는 <조선일보70년사>에 기술되어 있는 여순사건 관련 내용을 읽어보자.

1948년 9월 22일, 일제시대에 일본에 협력하여 악질적으로 민족배반행위를 하였던 친일분자를 처벌하기 위하여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정 공포되고, 이에 따라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특별검찰위원회·특별재판위원회가 설치된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의 비협조로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전라남도 여수와 순천에서 국방경비대(국군의 전신)의 일부가 반란을 일으키는 충격적 사태가 터진다.

이 글의 '이런 분위기 속에서'라는 대목에서 잘 알 수 있듯이, 반민특위에 대한 이승만의 비협조 때문에 친일파 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한 것도 여순사건의 배경으로 작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당시 대다수 언론은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도리어 한국언론은 여순사건이 터지자 이승만 정부와 군 당국의 발표를 확인과 검증도 없이 일방적으로 기사화하는 행태를 보였다. 그러다 보니 이승만 정부의 정치적 의도에 철저히 이용당한 것은 물론이고 그 과정에서 숱한 오보를 양산할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자칫하면 김구 선생이 이승만 정부의 정치모략에 걸려들어 희생당할 뻔한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승만 정부가 여순사건 주체세력에 대한 여론조작을 통해 이 사건을 철저하게 자신들의 정치적 의도를 관철시키기 위한 전화위복(?)의 수단으로 활용하려 했던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 보다 자세히 알고 싶으신 분은 다음의 논문을 참조하기 바란다. 김득중, [이승만 정부의 여순사건 왜곡과 국회논의의 한계], <역사연구> 제7호, 2000)

백범 김구. 그는 이승만 정부와 관제 언론의 여론조작으로 여순사건의 수괴로 몰릴 뻔했다. ⓒ 출전: <백범 김구 전집>
그 전말은 다음과 같다.

이승만 정부는 처음에는 1948년 10월 1일 발생한 '혁명의용군사건'과 10월 19일 발생한 여순사건이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것처럼 여론을 조작함으로써 해방정국에서 최대의 정적(政敵)이었던 김구를 견제하려 했으며, 나중에는 반란의 실질적 주체가 14연대 장병들이 아니라 계획적으로 조직된 민간 좌익이라고 몰아감으로써 예상치 못한 주민들의 대규모 반란 동참에 따른 정부의 실정에 대한 비난과 진압과정에서의 민간인 학살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 했다.

(뒷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서 상술할 예정인데, 현지의 민간좌익, 즉 주민들을 반란의 주체로 조작하는 과정에서 우익 성향이지만 성격이 강직해 평소 경찰의 미움을 받았던 현직 국회의원, 현직 검사, 현직 고등학교 교장이 반란 수괴로 몰려 총살당하거나 빨갱이로 몰리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발생했다.)

기사 앞쪽에서 설명했거니와, 여순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을 알고도 공개하지 않고 있던 정부는 이틀이 지난 10월 21일 오전 11시 이범석 국무총리의 발표를 통해 처음으로 이 사실을 언론에 공개했다. 당시 이 총리는 여순사건을 '공산주의자가 극우정객들과 결탁해 일으킨 반국가적 반란'이라고 규정했다.

이범석 총리는 다음날인 10월 22일에도 '반란군에 고한다'는 제목의 포고문에서 "반란군이 일부 그릇된 공산주의자와 음모정치가의 모략적 이상물이 되었다"(서울신문 1948. 10. 24)고 언급하며, 이 반란사건에서 '극우정객'의 역할이 매우 컸음을 은근히 부각시켰다. 이날 김태선 수도경찰청장도 장단을 맞추었다. 10월 1일 발생한 '혁명의용군사건'에 대한 수사발표를 통해 여론몰이를 거들고 나선 것이다.

한편 거의 모든 언론이 이 두개의 발표를 천편일률적으로 대서특필했는데, "소위 혁명의용군 사건은 그 주모자 최능진, 오동기, 서세중, 김진섭 등이 남노당과 결탁하여 무력혁명으로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하고 김일성 일파와 합작하여 자기들 몇 사람이 숭배하는 정객을 수령으로 공산정부를 수립하려고 공모했다"(동아일보 1948. 10. 23)는 것이 그 요지였다.

여기서 잠깐 새롭게 혁명의용군사건의 주모자로 떠오른 최능진이란 인물이 누구인지 살펴보자. 사실 '혁명의용군사건'이 처음 언론에 보도될 때만 해도 최능진이라는 이름은 없었다. 그런데 여순사건이 터진 뒤에 이 사건이 발표되면서 추가적으로 포함된 것이다.

수사당국은 최능진을 '유엔감시 하의 남한정부 수립을 방해하고 남북협상이 실패한 후에는 마지막 수단으로 국방경비대를 이용하여 무력혁명을 감행하려 한 인물'로 발표하였다. 그러나 최능진은 "남북협상에 나서려는 김구·김규식을 남한 우익진영이 '공산주의자'로 매도하고 비난했음에도 이에 대항하지 못하는 남한 청년들은 다 썩었다고 분개한 민족주의자"(연합신문 1949. 2. 9)에 불과했다.

그런데 최능진에게는 색다른 전력이 있다. 1948년 제헌의회선거 당시 이승만이 출마했던 동대문 갑구에 출마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결국 '국부 이승만'과 감히 겨루었던 최능진을 한번 손봐주려 했던 수사는 최능진의 선거운동원으로 참가했던 군인을 신원보증했던 오동기(전 14연대장)로 이어졌고, 여순사건이 오동기가 근무했던 14연대에서 일어나게 되자 최능진에게 무력혁명의 죄까지 뒤집어씌우게 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승만 정부가 실명을 거론하지 않은 채 연막을 피우며 '극우의 정객' '국가와 민족을 표방하는 극우파' '음모정치가' '혁명의용군 주모자가 숭배하는 정객'이라고 표현한 사람이 과연 누구를 겨냥한 것인지 금방 눈치챌 수 있다.

물론 그는 해방정국에서 이승만의 최대 정적이었던 김구였다.

"그때의 웃음은 어디로 가고…" 중국에서 갓 환국한 김구 임시정부 주석을 미군정 사령관 하지 중장에게 소개하는 이승만. 단정수립을 반대하고 남북협상을 주장했던 백범 김구는 이승만의 최대 정적이었다. ⓒ 출전: <이승만의 삶과 꿈>


이승만 정부는 최능진이 주장했던 단독정부 수립반대, 남북협상 등의 정치적 입장이 김구와 한독당의 노선과 상당한 친화력을 갖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 것이다.

그러나 '혁명의용군사건'은 나중에 조작된 사건이었음이 증명되었다. 당장 재판과정에서 무력공산혁명 혐의가 인정되지 않았던 것인데, 이 기록은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지낸 유건호의 저서 <전환기의 내막>에 나온다.

(나는 이번에 논문을 준비하면서 여순사건 당시 예상과 달리 조선일보가 동아일보 등 다른 신문과 비교해서 신중한 태도를 보이려 노력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음 글에서 상세히 설명하겠지만, 독자들은 최근 다른 언론매체는 가만히 있는데 유독 <월간조선>만이, 그것도 고등학교 국사교과서 수준의 역사관을 달랑 잣대로 삼아 여순사건에 대해 색깔논쟁을 벌이는 것이 얼마나 이율배반적이고 소도 웃을 작태인가 알 수 있을 것이다.)

국방부도 오동기 전 14연대장이 '무고하게 역적의 죄인'이 되었다고 인정했다.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가 발간한 <한국전쟁사>에 따르면, 오동기가 생면부지인 최능진과 결탁하고 14연대의 김지회와 반란을 음모하기에는 14연대장 시절부터 한국전쟁 동안 일체 좌익에 협력하지 않는 등 행동거지가 너무나 명백했다고 한다.

우익 성향의 김구 선생마저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을 뻔했던 이 소동의 정체에 대해 김득중 편사연구사는 다음과 같이 진단했다.
이승만 정권은 여순사건을 활용하여 우익 지배층 내부를 재편하고 이승만의 의지가 관철될 수 있는 안정적인 정치지형을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정부는 여순사건을 정부의 실정에서 비롯된 밑으로부터의 저항이 아니라 일부 우익세력에 의한 쿠데타적 행동으로 국민에게 광고함으로써 이를 계기로 정치세력을 재편하는데 활용하려고 했다. 그러나 여순사건을 이용하여 정적을 압살하려던 이승만 정부의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가 '오동기→최능진→김구'라는 허구적 삼단논법을 통해 여순반란의 주체를 조작하려던 시도는 실패했지만, 이 과정에서 정부의 발표를 일방적으로 독자에게 전달함으로써 대다수 한국언론은 이승만 정부의 충직한 나팔수로 이용되었다. 이러한 과오는 여순사건이 전개되는 과정이나 이후에도 고쳐지지 않은 채 반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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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환 기자는 월간 말 취재차장으로 일하고 있으며 언론, 지역, 에너지, 식량 문제에 관심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