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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사건 당시 '좌익척결'의 이름으로 죽어간 이름 없는 백성들. 울부짖는 유족 뒤로 오만하게 서 있는 미군의 모습에서 이 사건이 미군과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 출전: 여순사건 제52주기 추모사업 안내책자 표지에서

지난 10월 19∼21일 전남 여수시에서는 여순사건(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는 '여수순천 10·19 사건'으로 돼 있다) 53주기 추모사업이 열렸다. 2박3일 동안 추모위령제, 학술세미나, 유족의 증언, 학살지 답사 등의 프로그램이 연이어 진행됐는데, 마지막 날에는 여순사건 와중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민초들의 원혼을 위로하듯 가을비가 하루종일 주룩주룩 내렸다.

나는 그 기간 동안 학술세미나에 발표자로 참여하였으며 여수, 순천, 광양, 구례 등 여순사건의 현장을 찾아 나선 답사에도 동행했다.

학술세미나에선 세 개의 논문이 발표되었는데, 나는 제2주제인 '여순사건 왜곡보도의 과거와 현재'를 맡았다. 제1주제인 '여순사건과 제임스 하우스만'은 김득중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가, 제3주제인 '여순사건과 미군 6사단 G-2, G-3 보고서'에 대한 발표는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가 담당했다.(이 두 논문은 여순사건에 대한 미군의 관여가 어느 정도로 이루어졌는지를 밝혀주고 있다. 특히 김동춘 교수가 소개한 미군 보고서는 <죽음의 예비검속> 저자인 이도영 박사가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찾아내 국내로 보내준 것을 번역해서 최초로 공개한 것이다.)

논문 작성을 위해 내게 주어진 시간은 보름. 추석이 끝난 10월 5일부터 본격적으로 여순사건을 한국언론이 과연 어떻게 보도했는지 추적하기 시작했다. 우선 여순사건과 관련된 각종 논문과 자료를 구해 읽기 시작했고, 거의 해독이 불가능할 정도로 인쇄상태가 조악한 당시의 신문도 뒤졌다. 원고는 예정된 마감시간을 한참이나 넘긴 채 세미나 하루 직전에야 완성됐고, 나는 그 동안 다른 일에 전혀 손을 댈 수 없을 정도로 이 작업에 몰두했다.

그리고 마침내 각종 자료와 기록에 파묻혀 며칠 밤을 지샌 끝에 원고를 마치던 날, 53년 전 이 땅 남도에서 발생한 '비극적 역사'에 대해 우리 국민들이 얼마나 왜곡되게 인식하고 있거나 잘못 알아 왔는지, 그러한 '극단적 오해(誤解)'가 어떻게 '절대적 정사(正史)'로 자리잡을 수 있었는지 그 비밀을 눈치챌 수 있었다. 앞으로 기회가 닿는 대로 연재할 '다시 쓰는 남행록-여순사건의 진실을 찾아서'에서 상세히 서술하겠지만, 그 비밀의 열쇠는 바로 언론의 왜곡보도에 있었다.

한편 학술세미나가 끝난 뒤에는, 여순사건을 비롯해 한국전쟁 전후에 무고하게 학살된 민간인들의 유족이 참석해 끔찍했던 과거의 악몽을 치떨리는 분노의 목소리로, 때로는 겁먹은 공포의 눈빛으로 생생하게 증언했다. '빨갱이 사냥'이라는 이름 하에 국가폭력에 의해 거침없이 저질러졌던 그 사건으로 치유가 불가능할 정도로 마음의 상처를 입고도 한 평생 동안 한 마디도 꺼내지 못한 채 벙어리 냉가슴을 앓아야만 했던 그들의 증언은 차라리 동물의 절규에 가까웠다.

"내가 살아서 이런 증언을 맘껏 할 수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소."

유족들이 증언에 나설 때마다 빼놓지 않고 던진 말이다. 수십년 동안 갇혀있던 봇물이 터졌기 때문일까. 유족들의 증언은 예정된 시간을 훨씬 넘겨 밤늦도록 이어졌다. 특히 그들의 증언은 방청석에 앉아있던 대학생들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오후 3시경에 시작된 행사가 밤 10시가 넘도록 끝나지 않았음에도 대학생들은 끝까지 자리를 지킨 채 '교과서에서 배우지 못한' 역사의 진실을 공부했다.(이 부분도 요약, 정리해 소개할 것이다.)

참혹한 학살에 대한 유족들의 증언이 이어지는 동안 300∼400명의 방청객이 가득 찬 여수대 인문사회관 대강당 곳곳에서는 한숨과 통곡이 터져 나왔다.

발제자 중 유일한 기자였던 나는 이날 참석자들에게 약속하지 않을 수 없었다. 행사 기간에 보고 들었던 이야기를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겠노라고. 그러나 지난 일요일인 10월 21일 오후 늦게 여수에서 돌아온 뒤 나는 연 이틀 심한 몸살을 앓아야 했고, 그 약속을 이제야 지킬 수 있게 됐다.

이 글의 제목에 굳이 '남행록(南行錄)'이라는 말을 집어넣은 데는 이유가 있다.

여순사건이 터지자 이승만 정부의 문교부는 작가들과 화가들을 동원해 현장으로 파견했다. 이들은 그후 각종 신문과 잡지에 답사기를 기고했는데, 대다수가 정부와 계엄군이 던져준 일방적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된 것이었다. 특히 인기소설가 월탄 박종화는 1948년 11월 14일자부터 11월 21일자까지 동아일보에 총 6회에 걸쳐 여순지역 답사기를 연재했다. 그런데 그 제목이 바로 '남행록'이었다.

이 대목에서 잠시 배경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여순사건 당시 한국언론의 심각한 왜곡보도 중 하나가 여수지역 학생들의 반란참가에 대한 과장보도였다. 대다수 언론은 정부와 군 당국의 발표를 받아 "홍안의 여학생들이 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고 죽창 혹은 총을 들고 전투에 참여"하고 있다고 보도했으며, 무려 남녀학생의 80%가 반란군에 가담해 싸웠다는 설이 현지에서 유포되고 있다고 전하기도 했다.

'참(慘)! 반역도(反逆徒)의 비인귀행(非人鬼行)!' 반란군의 만행을 고발하고 있는 1948년 당시 신문보도. 대다수 한국언론은 이승만 정부와 군 당국의 발표를 그대로 받아 보도하기에 급급했다.
이 과정에서 언론은 정부보다 한술 더 떠 윤색과 작문까지 시도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환상의 여학생 부대' 신화라고 할 수 있다. 이 신화의 창조(?)에는 특히 동아일보와 소설가 박종화의 역할이 컸는데, 박종화는 한 지방신문에 실린 기사를 윤색해 전혀 새로운 작품(?)을 창조했다. 그가 참고한 '원작'은 동광신문 1948년 11월 2일자에 실린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기사였다.

관군이 여수시가에 돌입하였을 때 조그마한 여학생 하나가 "아저씨!"하고 뛰어나와서 한 병사한테 달려들었는데 그 병사는 인민군에 납치되어 있던 여학생인줄 알고 "걱정 마라! 적은 우리의 손아귀에 있다" 하고 외치자마자 스카트 밑에 감추었던 권총을 쏘아서 그 병사를 죽인 예가 있다.

이는 격동기면 언제나 세간에 등장하기 마련인 '객관적 사실로 증명되지 않은 소문'에 불과했다. 그러나 박종화는 이 짧은 기사에 살을 입히고 소설가 특유의 문체로 정리해 다음과 같은 전혀 새로운 내용을 창조했다.

공산주의 사상이 한번 머리에 들어가면 어떻게 사람이 지독하게 되는 것을 아십니까? 여수 진주에서 생긴 일인데 여학생들이 카빈총을 치마 속에 감추어가지고 우리들 국군장교와 병사들을 유도합니다. 오라버니! 하고 재생의 환희에서 부르짖는 듯 우리들을 환영합니다. 무심코 앞에 갔을 때는 벌써 치마 속에서 팽! 소리가 나며 군인들은 쓰러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깜찍한 일을 보십시오. 이것들은 나이 겨우 열여덟, 열아홉 살 되는 것들입니다. …(중략)… 이러한 여중학생 몇 명을 잡아다가 고문을 했습니다. 그 꼴을 보느라고 너는 총살이다 위협했더니 처음엔 부인을 하며 엉엉 울다가 하나, 둘, 셋 하고 구령을 불러서 정말 총살하는 듯한 모양을 보였더니 '인민공화국 만세'를 높이 부릅니다. 기막힌 일이 아닙니까? 평시에 학교 교육이 얼마나 민족적인 육성에 등한시했다는 것을 증명하고 남는 노릇이올시다. 학교에 다닙네 하고 공산주의의 이념만을 머리에 집어넣는 공부를 한 셈이올시다.


이 '환상의 여학생 부대' 신화는 5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순사건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로 일반 국민의 뇌리에 강렬하게 남아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진압군과 정부, 그리고 언론과 지식인이 퍼뜨린 여학생 반란가담의 진상은 1949년 봄 여수군 장학사 오길언이 여수여중에서 열린 여수지역 교원세미나에서 발표한 '반란사건에 대한 조사보고'에 의해 당장 바로잡힌 바 있다.

오 장학사는 항간에서 떠돌고 있는 이 소문이 '사실무근의 낭설'이라고 일축했다. 그는 문교부의 지시를 받고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의 소재를 확인해 보았는데, 조사한 결과 여학생 가운데 죽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하였다. 총을 들고 가담했다면 죽거나 군 당국에 처형당하거나 군법회의에 넘어갔어야 하는데 그런 사람은 전혀 없었다는 것이었다. 사실 병기교육 한번 받아보지 못했던 학생들이, 그것도 여학생이 정규군과 맞서 일사불란하게 싸웠다는 말 자체가 우선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진압군은 이들의 저항을 '조직적이고 극렬한 저항'으로 묘사했지만, 실상은 진압군의 공격을 죽창이나 총으로 방어하는 데 급급한 '비조직이고 무모한 저항'일 뿐이었고, 그나마 대다수는 진압군이 몰려오자 모두 뿔뿔이 도망쳤다는 것이 김계유(여수지역 향토사학자), 반충남(전 동아일보 주재기자) 등 현지주민들의 증언에서 확인된 바 있다.

그렇다면 진압군이 학생들이 '완강한 저항'을 했다고 강변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1948년 10월 23일과 24일에 있었던 정부군의 1차, 2차 여수 진압작전이 반란군의 매복과 기습으로 패배로 끝난 것에 대한 군사적 책임을 면피할 필요가 있었다. 아울러 그 화풀이(?)로 진행된, 여수시민 전체를 적(敵)으로 규정한 진압작전에서 발생한 엄청난 민간인 학살에 대한 비난여론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한 '가상의 악마'를 설정해 둘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미군이 결정적 증거도 제시하지 못한 채 일단 오사마 빈 라덴을 테러의 원흉으로 설정하고 보복전을 펼치고 있는 것을 연상하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박종화의 탁월한 글솜씨로 윤색되어 세상에 널리 전파된 '환상의 여학생 부대' 신화의 전말이거니와, 내가 박종화의 '남행록'을 이 연재기사의 제목으로 역설적으로 차용한 이유이기도 하다. 박종화의 남행록이 여순사건의 진실과 본질을 은폐하고 왜곡한 답사기였다면, 나의 남행록은 그 진실과 본질을 찾아내 재조명을 하기 위한 답사기가 될 것이다.

반란군 진압을 위해 광주에서 여수 방면으로 이동하는 정부군이 전남 주암 광천리를 지나고 있다. ⓒ 출전: 이경모 사진집 <격동기의 현장>에서

그런데 문제는 한 작가와 언론의 왜곡보도가 미친 영향이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환상의 여학생 부대' 신화를 비롯한 각종 왜곡보도는 이승만 정부와 군의 폭력적 강제진압, 마치 만주벌판에서 항일무장세력의 근거지를 말살하기 위해 무고한 조선인 양민들까지 가차없이 싹쓸이해버린 '토벌작전식 진압'을 해방된 나라에서 제 나라 국민을 상대로 펼칠 수 있도록 정당화시켜준 것이다.

실제로 여수 진압시 정부군은 육·해·공군을 동원한 입체작전을 펼쳤다. 그러나 당시 반란군의 주력은 이미 백운산과 지리산으로 도주해버린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몰랐던 정부군은 비행기까지 정찰활동에 동원하였으며, 바다에서는 함선이 시가지를 향해 사격을 개시하였으며, 시내에서는 81밀리 박격포와 30밀리 중기관총을 사용하였다. 이때 일어난 화재는 순식간에 전 시가를 검은 연기로 뒤엎었고, 여수는 죽음과 공포가 출렁이는 지옥의 도시로 바뀌었다.

논문에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나는 여순사건 전후에 자행된 한국언론의 왜곡보도를 지켜보면서 1980년 5월 광주학살에 대한 왜곡보도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5월 24일, 전남대생에 대한 공수부대의 학살만행에 분노한 광주시민들이 봉기하면서 광주시 외곽으로 쫓겨난 계엄군은 시민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강제진압을 앞두고 계엄군은 주요 언론사의 간부급 기자들을 계엄군과 시민군이 대치하고 있던 광주시 외곽의 화정동으로 초청한 뒤 지원사격(?)을 요청했다. 한국언론은 즉각 화답했다. 바로 다음날인 1980년 5월 25일자 아침 모든 언론에는 이런 류의 기사가 실린 것이다. 다음은 그 중의 하나인 서울신문 기사이다.

광주는 현재 외곽 사방이 계엄군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 시가지는 공권력이 전혀 미치지 않는 무법지대…군인을 잡아 낫으로 찔러 죽이고 껍질을 벗기는 만행을 저질렀는가 하면 한국방송은 못 믿으니 이북방송을 들으라 권유하는 사례 그리고 사상범 등 중범이 가득한 광주교도소를 7차례나 습격하고 그때마다 어린이·중학생을 앞장세운 행태 등은 도저히 데모나 소요의 개념으로 파악할 수 없다는 당국의 설명이다.

생각해 보라. 세상 천지에 어느 한국인이 '군인을 잡아 낫으로 찔러 죽이고 껍질을 벗기는 만행' '한국방송은 못 믿으니 이북방송을 들으라고 권유' '사상범과 중범이 가득한 교도소를 7차례나 습격하며 어린이와 중학생을 앞장세운 행태' 등등의 살벌한 보도를 보고 광주를 이해할 수 있었겠으며, 광주시민을 지지할 수 있었겠는가.(물론 이 모든 것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됐는데, 결국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이 장악하고 있던 계엄군이 악의적으로 퍼뜨린 낭설에 불과했다. 그로부터 15년이 흐른 뒤 국사교과서는 이 사건을 '광주민주화운동'이라 명명한 바 있다.)

한국언론의 왜곡보도로 광주는 철저하게 '고립된 섬'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바로 그 다음날 새벽 4시, 계엄군은 한국언론의 일방적인 '지원사격'을 디딤돌 삼아 17대의 탱크를 앞세우고 광주시내로 진격할 수 있었다. 참고로 당시 화정동으로 초청되어 지원사격에 부역한 언론인 중 실명기사를 쓴 기자는 조선일보의 김대중(현 주필)과 서울신문의 김진규였다.

반란군에 협조했다는 혐의로 붙잡혀온 여수여고 학생들. 당시 정부와 언론은 이들을 '환상의 여학생 부대'로 둔갑시켰다.ⓒ 출전: 이경모 사진집 <격동기의 현장>에서

국내 언론이 계엄사가 던져 주는 보도자료를 가지고 이런 후안무치한 기사를 만들어내는 동안 광주의 진실을 알린 것은 부끄럽게도 외신이었다. AFP 통신이 1980년 5월 25일 전세계에 타전한 기사는 이렇게 시작된다.

광주의 인상은 약탈과 방화와 난동이 아니다. 그들은 민주주의란 대의에 의하여 움직이고 있다. 한국 군부의 야수적 잔인성은 라오스나 캄보디아를 능가한다.

캄보디아? '킬링필드'의 나라가 아닌가! 권력을 잡기 위해 제 나라 백성 수백만 명을 학살한 크메르 르주의 폴포트 정권. 그들에게 학살당한 수백만의 캄보디아 민중들의 시신이 널려 있던 죽음의 들판! 1980년 5월 현장을 취재하고 있던 외신 기자들의 눈에는 광주의 모습이 바로 킬링필드, 죽음의 들판으로 보였던 것이다.

역사는 반복되는 것인가? 1948년 여순사건 당시에도 한국언론이 왜곡보도를 양산하고 있을 때 현장의 진실을 제대로 알린 것은 부끄럽게도 외신이었다.

1948년 12월 6일자 <라이프>지에는 '한국에서의 반란'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그해 10월 19일 밤 한반도 남단에서 발생해 일주일 동안 지속된 '비극적 사건', 여순사건에 대한 한 외신기자의 현지보도였다.

이 기사를 쓴 기자는 칼-마이던스였다. 1907년 미국 보스턴에서 태어난 그는 보스턴 대학 시절부터 프리랜서로 활동했다. 1945년부터 3년 동안 <라이프>지 동경지국장으로 근무하기도 한 그는 1948년 10월에는 한국 최남단에 있는 항구도시 여수에서 종군기자로 활약했다.

칼-마이던스 기자는 여순사건이 크게 세 가지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거니와, (1)반란군의 봉기와 살육 (2)정부군의 잔혹한 보복 (3)민중의 눈물과 통곡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이러한 객관적 상황을 공정하게, 그리고 객관적으로 보도했다. 그것은 이 미국인 종군기자라는 제3자의 눈에 비쳐진 여순사건의 '객관적 인상'이었다. 그의 기사에서 (3)민중의 눈물과 통곡에 해당하는 부분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순천이 피로 물든 처음 며칠의 공포 시기엔, 그 어떠한 관계자들도 감히 관련 사체를 요구할 수 없었는데, 이는 그렇게 하는 것이 생존자와 죽은 자 간의 신원확인을 통해, 공산주의자나 정부 그 어느 쪽으로부터도 즉각적인 보복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나중에 안전하게 되었을 때, 여자들은 (퉁퉁) 부어오른 시체더미에서 관련 사체를 찾기 위해 눈물을 흘리며 큰 운동장을 돌아다녔는데, 이는 보기 쉽지 않은 장면이었다. 그들이 자신의 관련 사체를 찾았을 때, 처음에는 망연자실했다가 나중에는 통곡 속에 광란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운동장에 널려 있는, 그러나 가족들조차 마음대로 가져갈 수 없었던, 그래서 퉁퉁 부어오른 시체가 반란군과 정부군에 의해 학살된 사람들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반란에 참여한 좌익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그 중의 대다수는 좌익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무고한 주민들이었다.

물론 독자 중에서는 이렇게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설사 과정이나 결과가 잘못되었다고 하더라도 먼저 반란을 일으킨 것은 좌익이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는 다시 이렇게 물어야 할 것이다. "14연대 군인 중 일부는 왜 반란을 일으켰으며, 대다수 장병과 일부의 여수 시민마저 그들의 반란에 동참했는가?"

이러한 물음에 대해 칼-마이던스는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 바 있다. 그는 나중에 고국으로 돌아간 뒤 <눈에 비치는 그 이상의 것(More than meets the eye)>이라는 제목의 단행본을 쓰면서 여순사건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진단했다.

이 반란은 반도의 최남단에 주둔하고 있던 남조선군 연대안의 소수 공산당 세포가 야음을 틈타 그들의 장교를 살해하고 장기간에 걸쳐 인민을 계속 학대해 온 정치가와 경찰에 대한 불만을 터트리자 시민이 폭동에 가담하게 된 것이 원인이었다.

여순사건이 '14연대 안의 소수 공산당 세포가 야음을 틈타 장교를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킨 것'도 사실이지만 '장기간에 걸쳐 인민을 계속 학대해온 정치가와 경찰에 대한 불만을 터뜨린 것'이 시민들이 폭동에 가담한 원인이라는 설명이다. 한편 칼-마이던스는 이 책을 통해 여순사건의 악몽을 회고하면서 다음과 같은 대목을 '가장 무섭고 두려운 장면'으로 소개하기도 했다.

그리고 나서 4일 후 3명의 기자와 함께 내가 시내에 들어갔을 때 전 시민이 학교 운동장에 모아져 앉혀져 있었다. 이곳에서 폭동을 진압했던 정부의 군대가 반란자들의 잔학행위와 같은 짓의 야수성과 정의를 무시한 태도로 오히려 그들보다 더한 보복행위를 자행하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그 광경을 여자들과 아이들이 가만히 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중에서 내가 가장 무섭고 두려운 징벌의 장면을 말하라고 한다면, 보고 있는 아녀자들의 숨막힐 것 같은 침묵과 자신들을 잡아온 사람들 앞에 너무나도 조신하게 엎드려 있는 모습과 그들의 얼굴 피부가 옥죄어 비틀어진 것 같은 그 표정-그리고 총살되기 위해 끌려가면서도 그들은 한마디 항변도 없이 침묵으로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한 마디의 항변도 없었다. 살려 달라는 울부짖음도 없고 슬프고 애처로운 애원의 소리도 없었다. 신의 구원을 비는 어떤 중얼거림도 다음 생을 바라는 한마디의 호소조차 없었다. 수세기가 그들에게 주어진다 해도 이런 상황에서 그들이 어떻게 울 수조차 있었겠는가.


다소 긴 이 인용문의 마지막 문장에서, 우리는 칼-마이던스가 말하고자 했던 '눈에 비치는 그 이상의 것', 즉 여순사건의 '본질'이 결국 '국가폭력에 의한 인간성 파괴에 대한 환기와 경고'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는 물론이고 지금까지도 한국언론에선 여순사건에 대한 이런 '다양한 시각'과 '본질적 통찰'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칼-마이던스의 시각을 기준으로 한다면, 한국언론은 여전히 (1)반란군의 봉기와 살육만을 부각시켜 왔을 뿐 (2)정부군의 잔혹한 보복과 (3)민중의 눈물과 통곡에 대해선 애써 외면해온 것이 사실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여순사건의 '원인'과 '본질'에 대한 본격적 논의는 아예 엄두조차 못 내고 있는 실정이다.

우선 한국언론의 주류를 자처하는 대다수 매체조차 여순사건에 관한 한 단세포적 인식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최근 여순사건을 화해와 용서의 시각에서 다룬 영화 <애기섬>의 상영이 색깔논쟁을 동원한 <월간조선>의 융단폭격을 받고 좌절된 것은 여순사건 왜곡보도가 '과거완료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임을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한국언론은 이제라도 좌우대립이라는 극한적 상황에서 '항변 없는 침묵' 속에 죽어가야만 했던 민초들의 역사를 향한 '소리 없는 호소'에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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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환 기자는 월간 말 취재차장으로 일하고 있으며 언론, 지역, 에너지, 식량 문제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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