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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24일치 '홍사중 문화마당'에 게재된 홍사중 조선일보 논설고문(문학평론가)의 '얼굴없는 폭력'은 '황성 옛터'를 즐겨부른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그리움이 물씬 담겨 있다. 홍 고문은 이 글을 통해 얼굴없는 현정부의 교묘한 폭력을 지적, 차라리 가시적 폭력을 마구 행사한 박 대통령의 '얼굴있는 정치형태'가 더 나았다는 내용을 시사하고 있다. 따라서 홍 고문의 이 칼럼은 '보수 반동'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본다.

그는 자신도 박 대통령 시절 '남산'이라고 부르던 중앙정보부 별관에 끌려가 몇일간 고문의 분위기 속에서 심문을 받은 경험이 있다고 장황스레 언급했다. 그리고 철학자의 말을 인용해가면서까지 고통의 속성을 묘사했다. 그러나 실망스러운 대목이 있다. 홍 고문은 자신이 남산에서 당한 고문과 고통은 "요새 여권에서 '민주투사' 칭호를 받고 있는 분들이 겪어온 것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닐 것"이라고 지적했다.

문제는 마지막 문장이다. 그는 남산의 '공포교육'을 받은 지 얼마 후 그곳의'아주 높은 분'의 식사대접을 받았다고 했다. 홍 고문이 남산에서 받은 고문과 고통이 약해서 '그 높은 분'의 초대에 응했을까. 그것도 남산에 갔다온지 얼마되지 않아서... 그와 같은 곳을 갔다온 사람들의 말을 빌리면 그곳은 두번 다시 가고 싶지 않은, 아니 그쪽으로 고개조차 돌리기 싫은 곳이다. 그런데 홍 고문은 "저녁식사를 함께 나누면서 너털웃음을 지은 그가 적어도 꾸밈만은 없어보였다"고 글을 맺으면서 아직 고문의 아픈 상처가 아물지도 않았을텐데 고문의 책임자를 되레 순수하다고 칭찬했다.

필자는 홍 고문의 의도를 이렇게 보고 있다. 박 대통령 시절에는 이같이 드러나는 고문과 폭력을 마구 행사하면서도 그것이 잘됐든 못됐듯 끝나면 자신에게 한 것처럼 조그만한 배려는 베풀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같았다. 적어도 자신이 고문받은 것을 자랑하는 칼럼이 아니라면...

이 글을 자세히 읽어보면 박 대통령에 대한 향수를 느끼게 한다. 필자가 독자의 입장에서 본 홍 고문의 '얼굴없는 폭력'에는 박 대통령은 군부독재를 하면서 폭력과 고문을 합법화시킬 정도로 드러내놓고 폭력을 자행했지만 그것은 민족중흥과 경제부흥을 전제로 한 '개발독재'를 위한 것이다. 따라서 당시의 폭력은 '잘 살아보자'는 박 대통령의 정치철학을 꾸밈없이 나타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같다. 홍 고문은 "정치란 다 그렇고 그런 것이다"라고 말한 '남산의 높은 분' 말에 일면 동의를 하는 뉘앙스를 풍기며 글을 끝냈다.

그러나 홍 고문은 경제개발을 위해 당시 민주화를 외치고 홍 고문처럼 박 대통령을 직간접으로 조금이라도 반대하는 세력을 고문과 폭력으로 입을 막은 박 대통령의 정치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논리에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이 박 대통령 시절에 받은 고문의 피해자이면서 어떻게 이같은 '보수반동적인' 논리를 펼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홍 고문은 이 칼럼에서 박 대통령 시절 건전가요 권장이란 명분으로 대중에게 인기있는 애창곡 부르기가 금지되자 박 대통령이 즐겨 부르는 '황성 옛터'는 왜 금지시키지 않느냐를 말하기 위해 당시 박 대통령에 대한 간접적 저항의 글을 썼다고 했다. 그러나 그 때는 박 대통령의 이같은 독재에 항의했다가 지금에 와서 당시의 상황을 '정치란 다 그런 것이다'라고 얼버무린 홍 고문의 칼럼이 앞뒤가 맞지 않다.

1928년 만들어진 '황성 옛터'는 폐허가 된 고려의 옛 궁터 만월대(滿月臺)를 찾아 받은 쓸쓸한 감회를 그린 노래다.

"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스른 회포를 말하여 주노나 아! 가엾다 이 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고 끝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어 있노라.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라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서 잠 못이루어 구슬픈 벌레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

이 노래는 그해 가을 단성사에서 가수 이애리수(李愛利秀)가 불러 크게 히트,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졌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더 이상 '황성 옛터'가 유행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이 노래를 금지시켰지만 조선인들은 계속 불렀다.

박정희는 1942년 일본육사인 만주군관학교를 수료하면서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맹세한 사람이다. 그런데 박정희는 조선총독부가 금지곡으로 만든 '황성 옛터'를 왜 금지시키지 않았을까. 이 노래는 개성(옛 송악)시 송악산(松嶽山) 남쪽 기슭의 고려 왕궁지(王宮址)인 '만월(보름달)대'가 황폐해진 성(황성)으로 전락해 버린 것을 비통해하는 가사로 일관하고 있다.

이는 고려 왕조 몰락에 대한 한탄이요, 왕건의 옛 영화(榮華)를 아직도 사모하는 애절한 마음이 깊숙히 서려있다. 조선총독부는 이를 조선인들이 조선왕조의 몰락을 한탄한 나머지 일제를 무너뜨려 '고려'를 상징적으로 내세워 '조선나라'를 다시 세우려는 의도로 받아들여 '황성 옛터'를 금지시킨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는 이를 금지곡으로 만들지 않았다. 그는 조선인이 총독부시절 일제 전복을 노래한 것처럼 자신의 집권시기에도 이 노래가 '박정권 타도', '민주국가건설'이라는 의미로 들릴 수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는 그 만큼 즐겨 불러온 애창곡, 아니 생사의 갈림길에서 파란만장하게 살아온 자신의 삶을 그대로 말해주는 노래이기 때문에 '황성 옛터'를 부르지 못하게 할 수 없었다. '황성 옛터'의 금지는 자기가 살아온 인생의 역정을 부인하는 것이고 자신이 쌓아온 성을 무너뜨리는 일이다.

'인간 박정희'란 서적에 소개된 박정희의 시(6-25전쟁 참전 당시 사선을 오가면서 쓴 시) 여러편에는 그가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이곳에서 우는 한마리의 벌레처럼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한탄하며서 허무하디 허무한 죽음의 사선을 담배 연기로 태워 없애야하는 전쟁의 하루 하루를 절실하게 표현한 내용이 나온다. 이 시들이 표현한 단어와 시적 상황은 '황성 옛터'의 가사내용과 당시 절박한 사정을 그대로 담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홍 고문이 적어도 문학평론가라면 '얼굴없는 폭력'이란 칼럼을 이렇게 문학적으로 전개하면서 박 대통령의 개발독재 배경 및 '당근과 채찍(얼굴있는 폭력)'의 숨김없는 사용 등을 역설했으면 지금의 '얼굴없는 폭력'이 얼굴을 보는 것처럼 분명히 드러날 것인데 말이다.

지금의 폭력을 홍 고문은 '얼굴없는 폭력'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지금도 얼굴있는 폭력이 계속되고 있다. 경찰의 무자비한 근로자 폭력, 목숨을 앗아갈 정도의 의경 구타, 학교폭력 사고 등...홍 고문이 지적한 '얼굴없는 폭력'의 정부는 이같이 얼굴있는 폭력이 뒷받침하고 있고 '얼굴있는 폭력'을 없애는 것이 '얼굴없는 폭력' 정부의 과제다.

덧붙이는 글 | 조선일보 24일치 컬럼 <홍사중 문화마당> '얼굴없는 폭력'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얘기다. 건전가요를 권장한다면서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를 비롯해서 많은 대중적 애창곡들을 부르지 못하게 했다.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노래란 듣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달리 들린다면서 「황성 옛터」를 예로 든 글을 썼다. 탄식과 넋두리와 구성진 감상으로 가득찬 그 곡이야말로 정부가 말하는 불건전가요의 대표적인 노래가 아니겠느냐는 것이었다. 물론 대통령이 그 노래를 가장 즐겨 부른다는 사실을 의식하며 쓴 요지였다. 신문이 나오자마자 나는 당시의 사람들이「남산」이라고 부르던 중앙정보부 별관에 끌려갔다. 

『고통에는 한도가 있지만 공포에는 한도가 없다.』 이렇게 옛 로마의 철학자 폴리니가 말했지만 그에게는 어두운 골방에 몇 시간씩 갇혀서 불안과 공포에 떨어본 경험은 없을 것이다. 있었다면 아무리 심한 공포라도 오래 지나고 나면 차츰 공포에 마비된다는 것을 터득했을 것이다. 취조관이 방에 들어온 것은 공포에 무감각해지기 직전이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절묘한 타이밍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한 시간 가량 심문을 계속하는 동안 그는 책상밑으로 나의 정강이를 구두발로 툭툭 쳤다. 이어 또 다른 취조관들이 번갈아 들어와서 비슷한 심문을 거듭하는 동안에 밤이 지났다. 그러는 동안 나의 공포심을 증폭시키기 위한 효과음악처럼 어디에선가 간간이 비명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간도 담도 별로 크지 못한 나로선 인권이며 법을 들먹이며 항의한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첫날에는 비교적 공손한 말투였던 조사관들의 태도는 다음 날부터 일변해서 마냥 거칠어졌다. 심문의 초점은「황성 옛터」가 박 대통령의 애창곡인지 알고 쓴 게 아니냐는 것으로 좁혀져 나갔다. 철학자 폴리니는 공포란 공포의 정체를 모를 때까지만 무한하다는 사실까지는 미처 통찰하지 못했는가보다. 나는 희미해진 판단력으로나마 모른다고 잡아떼는 게 상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는 중에 거나하게 술에 취한 사천왕처럼 험상궂은 사람이 불쑥 들어와서는 『이런건 죽여버려』라고 취조원에게 호령하고 나갔다. 그 다음은 얘기하지 않는 게 좋겠다. 

사흘째가 되어 나는 풀려났다. 아마 그만하면 충분히 혼내줬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풀려나는 날 아침에 다시 만난 간밤의 「사천왕」은 보살님처럼 마냥 인자스러워 보였다. 틀림없이 가정에서는 그도 착한 남편이요 어진 아버지 소리를 들을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겉으로는 멀쩡해서 돌아온 나를 반기면서 주필이 말했다. 『이제야 당신도 언론인 자격증을 받았다고 생각하시오.』 이것이 내가 중앙정보부와 맺은 첫번째 인연(?)이었다. 

이런 나의 경험은 요새 여권에서「민주투사」칭호를 받고 있는 분들이 겪어온 것에 비한다면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나보다 몇 곱이나 더 절실하게 자유와 법이 소중한 것임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나보다 몇 곱이나 더 간절하게 자유를 억압하는 어떠한 폭력도 활개치지 못하는 사회를 염원했을 것이다. 그날 나는 눈부시도록 화창한 하늘을 쳐다보면서 어리석게도 적어도 10년 후에는 시들었던 민주주의의 꽃이 되살아나고 폭력의 두려움없이 마음대로 글을 쓸 수 있는 날이 오리라 생각했었다. 

그런 지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고 또 몇 해가 지났다. 돌이켜 볼 때 교묘하게 얼굴을 숨기며 불법의 폭력이 다가오는 요즘의 상황보다는 차라리 폭력이 노골적으로 제 얼굴을 보여주던 그때가 견디기 쉬웠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때「남산」에서 2박3일의「공포교육」을 받은 지 얼마 후에 그곳의「아주 높은 분」으로부터 저녁대접을 받았다. 『정치란 다 그렇고 그런거 아닙니까』하며 너털웃음을 짓던 그에게는 적어도 꾸밈만은 없어보였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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