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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2월 13일에 첫 호를 낸 <민족일보>는 첫 사설에서 "한편에는 기름진 포식이 있는가 하면 또 다른 한편에는 바닥까지 다다른 궁핍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라면서 1960년 4월에 학생들 피로 되찾은 자유와 민주를 장면 정권이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나라살림이 어려우니 정부 공직자들이 `도시락'을 싸 와서 물자를 아끼며 살자고 외쳤던 장면 내각 정부 처음 말은 어느결에 사라지고 `사동 혼자 덩그러니 남아' 도시락을 먹을 뿐 장면을 비롯한 모든 공무원들은 "구내식당에서 `비프'를 자른다"고 날카롭게 꼬집습니다.

<민족일보>는 창간 2호 사설에서도 "장정권은 미국에의 굴욕적인 태도를 수정하지 못하겠으면 물러나라"고 외칠 뿐 아니라 심산 김창숙 선생과 만나서 나눈 이야기를 싣습니다.

"결국 피값을 찾지 못한 4.19란 알맹이 없는 거죽이거든. 나라꼴을 보니 아무래도 `제2의 4.19'가 다시 일어날 것만 같아"

<민족일보>는 1961년 2월 13일에 첫 호를 내고 그 해 5월 16일에 군사쿠테타가 일어나 5월 19일에 마지막호를 낼 때까지도 처음 마음 그대로 `죽도록 일하면서도 늘 빚지고 허리 휘는 농민과 노동자'를 헤아리는 기사와 정부가 정부답게 나라살림을 똑바로 이끌지 않고 부정과 부패에만 빠지면 안 된다며 뼈 있는 사설과 칼럼을 가득 실었습니다.

고작 네 쪽밖에 되지 않는 신문이었으나 기사 하나하나에 이 땅 온 겨레를 생각하고 헤아리는 마음이 가득하지요. 창간 4호에서는 "우는 설 웃는 설"이라 하여 `떡국은커녕 끼니도 굶'고 `연탄도 못 피우고 달세도 못내 구박받는 삶'을 다룬 기사를 썼습니다. <민족일보>는 폐간되기 얼마 앞서도 `굶어서 한뎃잠을 자는 사람도 많으나 창경원에는 구경나온 사람으로 가득하다'는 기사를 쓰기도 했습니다.

민족일보 영인본 간행위원회는 <민족일보>를 다시 돌아보는 글(1990)을 쓰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무엇보다도 민족일보는 `조국의 통일을 절규하는 신문'이었기에 당시의 집권 엘리트와 기득권 수호의 보수세력에게 미움을 받게 된 가장 큰 이유가 이 점에 있었다. 가령 민통연이 남북학생 판문점 회담을 개최하려는 구체적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을 때에 시중 각 신문은 이들 학생들의 터무니없는 순진성이 큰 일이라거니, 무책임하고 위험한 발상이라거니 하여 매도하기에 급급했으며, 심지어는 학생들이 집회 개최를 알리면서 시민들에게 그 뜻을 해명코자 하는 광고를 내고자 했을 때 이의 게재마저 거절하는 형편이었다. 민족일보만이 학생들의 뜻을 정당하게 보도하는 데에 인색하지 않았다.

군사쿠테타가 있던 5월 16일에도 "민족적 노력으로써 남북협상의 단계에까지 공세를 발전시켜라"고 외치고 "우선 체육교류부터라도 시작하자(5월 12일)"고 외치는 한편 "학생들의 통일외교를 무정견으로 억압말라(5월 7일)"고 말했고 "중립화통일론에 대한 모함을 삼가라(2월 23일)"하면서 상식일 뿐 아니라 원론이며 오히려 시대를 앞서가는 이야기를 당연하고 힘있게 펼쳤습니다.

요새 `민족일보 조용수 선생'을 목매달아 죽도록 한 이회창 씨 문제가 크게 불거졌습니다. 하지만 정작 <민족일보>가 어떠한 신문이었는지 두 눈으로 보고 읽으면서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고작 92호를 냈을 뿐이며 도서관에서도 <민족일보> 영인본이라도 제대로 만나기 어려운 형편이니까요.

하지만 이참에 <민족일보> 영인본(원본은 더더구나 보기 힘드니)이라도 도서관을 찾아다니며 읽고 지난 1995년에 나온 <조용수 평전>을 읽으면서 어두운 시대를 밝히는 힘은 무엇이고 우리 겨레 앞날을 내다본 언론이란 어떠한 언론인가를 곰곰히 짚어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첫째, 민족일보는 민족의 진로를 가리키는 신문
둘째, 민족일보는 부정과 부패를 고발하는 신문
셋째, 민족일보는 노동대중의 권익을 옹호하는 신문
넷째, 민족일보는 양단된 조국의 비원을 호소하는 신문

<조용수 평전>에 실은 일화 한 가지를 옮기면,

(조용수) "선생님, 어제 말씀하신 신문을 만들자는 것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저 자신이 지난번 선거에서 아주 절실히 체험한 것이기도 하구요. 분단된 민족의 아픔을 절규하고 혁신의 바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신문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이영근) "그런데 일간신문을 하나 만들려면 상당한 자금이 있어야 되지 않겠나. 지금 조동지에게는 그런 돈이 없지 않은가?"

(조용수) "돈이야 만들면 됩니다. 지금 선생님이 만들고 있는 통일조선신문-일본 거주 민단에서-도 돈이 있어서 만드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또 신문을 만들기는 지금이 적기라고 생각합니다. 혁명 후-4.19혁명-의 혼란스런 사회에서 국민들이 혁신과 통일에 관심을 갖게 하는 언로를 만드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이번에 정권을 잡은 장면이 누구입니까. 이광수에 버금가는 사람이 아닙니까. 독립운동을 같이 한 이승만조차 혁신세력을 그렇게 말살하려 들었는데 아마 장면은 더 혁신계를 탄압할 사람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 주장을 할 수 있는 신문이 절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55쪽>


지금 우리나라를 이끌고 있는 15대 대통령 김대중 씨를 가르친 정치 스승 `장면'은 <민족일보>에게 날마다 비판을 받았습니다. 4월 19일에 흘린 학생들 피를 어찌 그렇게 쉽게 잊고 등돌릴 수 있느냐면서 나라살림을 올곧게 이끌라는 기사를 써갔죠. 그래서 <민족일보>도 5월 16일 군사쿠테타가 일어났을 때 썩어빠진 장면 정권을 무너뜨렸기에 반겼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반긴 군사정부는 <민족일보> 기사를 검열하여 삭제했죠. 그리고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 씨는 독재자 박정희 손에 목졸려 죽었습니다.

... 이러한 비난의 목소리는 물론 국내에 일체 보도되지 못했다. 군사정권에 대해 비교적 우호적인 태도를 견지하던 미국 언론도 조용수의 처형에 강력히 항의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사설을 실었다... ".. 결국 미국은 언론의 자유를 형벌로서 탄압하는 정권을 계속 원조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러한 잘못된 조치는 박장군에게 이후의 부정을 피하고 언론의 자유를 복귀시키는것에 대하여 중요한 짐을 지워지게 할 것이다(워싱턴 포스트,1961.12.사설)"

하지만 "국내에서는 여전히 어떠한 목소리도 내지 못했다. 펜은 총보다 강하지 못했던 것이다 <17쪽>"는 말처럼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습니다. 창간한 지 여든 돐이 넘는다고 외치는 <조선일보>나 <동아일보>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습니다.

조용수 선생이 <민족일보>를 낸 지 어느덧 마흔 해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마흔 해가 된 이제서야 비로소 <민족일보>를 다시 돌아보는 기사가 몇몇 신문에 자그맣게 나오기는 합니다. 하지만 <민족일보>는 용공이었다고 말하는 국회의원도 있지요.

조용수 선생은 독재정권이 짓누른 언론 죽이기로 목숨을 잃었지만 박정희가 새로 만든 `사형자의 분묘 및 장례, 초상 등을 금지하는 법률'로 옭아지는 바람에 죽어서도 장례식도 치르지 못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지난해도 올해에도 어김없이 `창간 몇 돐'을 맞이한 신문사 사주와 만나 `축하한다'는 이야기를 했고 또 하겠죠. 그러나 자기 정치스승이 탄압하기도 했던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 선생이 <민족일보>를 처음 내던 날 망우리 무덤을 찾아가 꽃을 바치기라도 했을까요? 조용수 선생이 돌아가신 날 그 분 남은 식구들(유가족)에게 죄송하다는 말을 한 마디라도 했을까요?

정권이나 기득권을 쥐고 있는 이들이 "우리 겨레가 나아갈 길"을 밝히고 있다거나 "나라 안팎 부정과 부패를 고발하고 뉘우치고 벌을 주고 있다"거나 "일하는 사람들의 권리와 이익을 지켜 주고 있다"거나 "갈라진 남북 겨레와 떨어진 중국, 러시아, 일본, 중아아시아 조선족이 하나되는 길을 바라며 애쓰고 있다"면 <민족일보> 조용수 선생을 몰라 주어도 좋고 기리지 않아도 좋습니다.

이미 우리가 일하며 보람을 찾고 겨레 앞날을 밝히고 있다면 조용수 선생이 바랐던 일을 이루는 셈이니 억울한 원혼이 이 땅에 남을 까닭이 없을 테니까요. 하지만 조용수 선생 원혼은 아직도 이 땅에 남아 있습니다. 정권을 쥔 이와 기득권을 쥔 이들이 제 잇속을 챙기며 우리 나라와 겨레 피와 땀을 빨아먹고 있으니까요.

<민족일보>는 100호도 내지 못하고 어두운 역사 속에 파묻힌 신문입니다. 그런데 <경향신문> 뉴스메이커부 기자인 원희복 씨는 조용수 선생 흔적을 되짚어가며 <조용수 평전>을 엮었습니다.

나는 조용수는 `냉정한 통찰력을 지닌 언론인이었고, 민족을 생각하는 뜨거운 가슴을 가진 통일운동가'였다고 평가하려 한다. 그러나 나의 이런 결론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조용수로부터 받았던 괴로움에서 탈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그 이유는 조용수가 그토록 갈구했던 민족언론의 문제는 여전히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최근 그 문제를 너무나 뼈저리게 느꼈다. 조용수가 생명으로 절규했던 본질적인 문제가 여전히 진행중인 한, 조용수라는 이름 석자는 계속 나를 괴롭힐 것이 분명하다. <후기-원희복. 1994년 12월>

우리는 15대 정권이 들어선 뒤 북풍과 최장집 시비들을 거치며 우리 사회가 얼마나 조용수 선생에게 빚을 지고 있는지 다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미처 느끼지 못하고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언제까지 빚을 지고 살아야겠습니까? 이젠 빚 좀 훌훌 털어내고 다 갚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덧붙이는 글 | - <민족일보> 영인본은 1990년에 나왔습니다.
 
민족일보 영인간행위원은 다음과 같습니다
: 강만길, 고  은, 김금수, 김낙중, 김자동, 김진균, 박태순, 박현채, 송건호, 양수정, 이상희, 전무배, 전원중, 정동익, 조용준, 하일민, 황건

- 책이름 :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 평전
- 글쓴이 : 원희복
- 펴낸곳 :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
- 펴낸날 : 199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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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말사전 편집자로 일하면서, 전남 고흥에서 <사전 짓는 책숲집 '숲노래'>를 꾸립니다.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읽는 우리말 사전》《골목빛》을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