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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으나 여러 가지 사연으로 침묵을 강요당했던 이야기가 임자도 통혁당 사건이다.

통혁당을 이야기하지만 사건의 발단이 된 소위 '임자도 간첩단 사건'은 베일 속에 감추어져 있었으며 누구도 이야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다만 중앙정보부와 당시 언론에서 발표 됐던 몇 가지 단편적인 사실들로만 이야기 됐던 게 사실이다.

어떤 이들은 '아물어 가는 상처가 재발하지 않기를…', 또 어떤 이들은 '묻혀지기엔 너무 안타까운…'이라고 말한다.

우려 속에서 다시 이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몸뚱이의 반쪽을 잃고 절름발이를 강요당했던 우리 역사 속에서 지워졌던 수많은 사건들과 사람들을 새삼스레 기억해 보는 것은 더 이상 시대의 장애를 대물림하지 않기 위한 몸부림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1968년 7월 20일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기자들을 불러 남한 최대의 간첩단 사건, 이른바 '임자도 간첩단 사건'의 전말을 담은 발표문을 또박또박 읽어 내려간다.

관련자 118명. 정태묵, 최영도, 윤상수 등 거물급만 27명으로…1961년부터 임자도를 중심으로 서해안과 전라남도 일대에 지하당을 조직하고 결정적 시기에 대비한 유격활동과 근거지 구축을 기도하며 서울과 목포를 비롯한 각지에서 위장기업을 운영하면서 각계각층에 대거 침투했다. (경향신문 68년 7월20일자)

이후 8월 24일 중앙정보부는 통혁당 사건의 전모를 발표했다.

'해방 이래 국내 최대의 지하당 사건', '거물급은 쟁쟁한 일류대학 출신이고, 정계·학계·군부 등에 인맥관계를 가지고 깊게 침투'라고 주요 언론과 방송을 연일 뜨겁게 달구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임자도 간첩단사건(혹은 통일혁명당 사건)을 말하는 것은 금기로 여겨지고 있으며, 역사의 그늘 속에서 숨죽이며 침묵하고 있다.

엄혹한 시절 정치권력은 국민의 눈을 막고 비판세력의 씨를 말리기 위해 많은 시국 조작사건을 만들었지만, 통혁당 사건은 사건이 조작됐다는 일부 주장과 달리 실재했던 사건이다.

당시 통혁당 경남도당위원장을 역임했던 신광현 씨(남·76세)는 "통혁당은 조작된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와 통일을 위해 투쟁했던 사람들의 주도로 엄연히 실재했던 사건이다. 다만 임자도 사건은 통혁당과 연계성은 있으나 별개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말한다.

내부 밀고로 촉발됐다는 임자도 간첩단 사건의 전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밀고자의 행적을 살펴보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나는 죽어서 편하게 잠들 수 없는 사람이다. 내 무덤에 봉분을 만들지 말아라. 지나가는 사람마다 무덤을 밟고 지나가게 해라."

자신이 다니던 목포 문태중학교 국기게양대에 인공기를 내걸어 퇴학까지 당했던 한 소년(이하 이름은 정모 씨로 통일)은 말년을 아편중독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고통받다가 임자도 자신의 집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형 정태묵 씨와 동료들에 대한 죄책감을 유언으로 남기고 숨을 거둔다.

죽어 가는 정모 씨가 차마 눈감지 못한, 역사 속에서 흔적 없이 지워진 임자도 사람들은 누구인가?

'임자도 간첩단 사건'으로 알려진 통일혁명당 전남위원회의 주요 인물 중 세 사람은 정모 씨의 형이자 남로당 정치공작대장을 역임했던 정태묵 씨를 비롯해 통혁당 전남위원회 위원장이자 신안군 임자면장을 역임했던 최영도 씨 그리고 해남 화원중학교 교사 윤상수 씨다.

임자도는 한국전쟁 과정에서 도서지역 중 가장 많은 인명피해를 본 지역이다.

주민들은 우익계로 분류돼 죽은 994명을 비롯해 1950년 7월부터 9월까지 석달 동안 1만여 명의 주민 중 2000∼3000명이 좌·우익의 극한 대립에서 희생당했다고 전한다.

당시 인민위원장을 역임했던 강자원 씨가 최영도 씨의 처남이고 정태묵 씨가 전남 도당에서 활동했다는 점에서 통혁당을 한국전쟁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볼 수도 있겠으나 주요 구성원들이 당시 임자도에 거주하지 않았고 이들이 당시 희생된 좌익집안이 아닌 지주집안 출신으로 고등교육을 받은 인텔리였다는 점에서 전쟁 전부터 북한과 연결된다던가 과거 좌익활동 경력의 인사들이 개별적 계기에 의해 다시 활동을 재개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신광현 씨도 말했듯이 임자도는 서울 조직의 지도를 받아 구성된 여타의 조직과 달리 통혁당 건설 이전부터 북한과의 독자적인 관계 속에서 형성돼 점조직 형태로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질적인 조직책임자인 정태묵 씨는 북한에서 교육받은 동생 정모 씨의 안내로 월북해 교육받은 후 조직활동에 들어갔으며, 전남조직의 책임자로 돼 있는 임자면장 출신 최영도 씨는 1945년 인민위원회 결성과정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북한에서 교육받고 내려온 조카 김수영 씨를 매개로 하여 본격적 활동을 시작해 1964년 통혁당 창당준비위원회 전남위원장을 맡게 된다.

정태묵 씨는 목포상고를 졸업하고 보성전문(고려대) 중퇴, 김일성대학과 모스크바대학을 나온 엘리트로 남로당 정치공작대장으로 활동했으며 6·25때는 임자로 오지 않고 목포와 도당 등지에서 주로 활동을 펼치다 1952년 영광 불갑산에서 빨치산 활동을 시작, 1953년 지리산에서 군·경에 체포돼 1960년까지 7년 간 옥고를 치르고 고향에 칩거하던 중 동생의 권유로 활동을 재개했다.

중앙정보부에서 발간한 '대남공작사'에는 임자도 사람들과 서울조직과의 연결은 최영도 씨의 조카인 김수상(김송무)의 연결로 1964년 3월 김종태 통혁당 서울시위원장과 임자도에서 접선하고 월북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이미 이들은 1950년 김구, 조소앙 씨가 이끌었던 학생운동 조직에서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정태묵 씨와 자주 어울렸다는 김모 씨(남·67세)는 술을 즐기고 낭만적이었던 최영도 씨와 달리 정 씨가 술을 한잔도 마시지 않았으며 말없이 과묵한 데다 논리적이고 냉철했으며 대중에 대한 흡인력이 상당히 높았다고 말한다.

이후 정태묵 씨는 비합법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전남의 도당에 해당하는 조직을 만들려는 전망 하에서 과거 같이 활동했던 남로당 전향자들 및 농민운동 쪽을 중심으로 조직사업을 전개했으며 지금의 무안동 국제서점 자리에 '동성서점'을 운영하면서 지역 청년운동과의 결합을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통혁당 사건이 세상에 드러난 것은 어떤 계기를 통해서였을까?

3년 간의 치밀한 수사를 거친 끝에 '일망타진'했다는 중앙정보부의 주장은 자신들의 공적을 세우기 위해 조작된 것으로 1968년 6월 정태묵 씨의 동생 정모 씨가 중앙정보부에 자수하면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정모 씨는 '무안 정부대여양곡 횡령사건'으로 관계자 7명과 함께 서울에 도피 중에 있었으며 임자도 시절부터 아편에 중독돼 있었다고 한다.

정모 씨가 자수하던 날 마지막 도피자금을 전달했던 이선진 씨(가명)에 따르면 "정 씨가 씀씀이가 너무 커 고향에서 더 이상 도피자금을 마련해 줄 수 없는 상황이었고 돈이 떨어지자 아편을 더 이상 구할 수 없게 돼 금단현상으로 상당히 괴로워했었다"고 전한다.

정 씨는 그날 대포집에서 소주 5병을 안주 없이 비우고 이 씨에게 "오늘이 널 보는 마지막 날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남산으로 전화를 건다.

미국 방문 길에서 귀국한 김형욱은 정보원들을 엿장수로 위장해 임자도와 목포 일대에서 대거 투입했으며 7월2일 목포에서 정태묵 씨와 최영도 씨를 연행하게 된다.

중앙정보부는 정모 씨가 자수의 전제조건으로 내걸었던 형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정태묵 씨는 1972년 7월28일 53세의 나이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된다.

이후 정모 씨는 중앙정보부 안국동 을지로 분소에서 근무하다가 귀향했으나 아편을 끝내 끊지 못하고 당시 기관장들에게 매달리며 임자보건소에 비치된 '마약'에 의지해 괴로움을 달랬다고 전해진다.

44살 나이의 정태묵 씨와 결혼했던 부인은 당시 유달 초등학교 교사였으며 간첩의 가족이라는 냉대와 돌팔매질을 견디지 못하고 정 씨 일가와 인연을 끊고 목포를 떠났으며, 최영도 씨의 아들은 당시 고문 후유증으로 외부와 관계를 끊고 홀로 농사를 지으며 술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고 한다.

조봉암이 이끄는 진보당이 붕괴된 이후 남한사회에서 진보적 성격의 전위조직이 합법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은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60년대 이후 변혁운동은 '비합법'의 형태로 진행되게 된다.

소위 '임자도 간첩단 사건'으로 촉발된 통혁당 사건은 6·25 한국전쟁과 박정희의 폭압 통치로 씨가 말린 남한 좌익운동의 공식적 부활이라는 측면에서, 저항세력이 아닌 친일파를 등에 업고 출발했던 이승만 정권과 일본군 장교에서 출발해 4·19혁명을 짓밟고 등장한 박정희 정권의 정통성에 중대한 타격을 가했다는 점에서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기사의 등장인물들의 실명을 밝히지 않는다. 당사자들이나 후손들이 원치 않기 때문이다. 많은 이야기들을 싣지 못했다. 아직도 고통받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기사의 전개과정과 관점에 대한 비판이 있을 것으로 본다. 달게 받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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