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7년이 지났지만 진상규명은 여전히 진행중입니다. 이런 가운데 참사 현장에서 살아남은 이들과 이들을 지키려는 가족들조차 아직도 매일 악몽을 꾸며 고통 속에 살고 있습니다. 세월호 생존자 중 '파란바지 의인'으로 알려진 김동수씨 가족 인터뷰를 통해 세월호 생존자와 그 가족이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생생히 전해드립니다. 이번 글은 작은딸 김예나씨의 이야기입니다.[편집자말]
세월호 사고가 나던 해에 저는 신성여자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지만 오현고등학교에 다니는 친구들이 많았어요. 그 친구들이 단원고 아이들이 타고 온 세월호 배를 타고 육지로 수학여행 가기로 되어 있었나 봐요. 사고가 나고 나서 수학여행 취소됐다고 엄청 투덜거리더라고요. 물론 친구들은 우리 아빠가 세월호에서 살아 나왔는지는 모르고, 수학여행 취소됐다고 하면서 저에게 하소연을 많이 했죠.
제가 친구들에게 뭐라고 하겠어요. 그저 가만히 친구들의 하소연을 듣고만 있었죠. 그렇게 하소연하는 친구들에게 수학여행 못 가서 어떻게 하느냐며 맞장구치며 위로해 주는 것이 전부였어요. 나중에 친구들이 아빠가 세월호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알고는 미안해하며 사과했어요. 그 친구들이 사과할 일은 아닌데 너무 미안해하더라고요. 고맙게도 그 친구들 역시 세월호 1주기 플래시몹 캠페인 때 열심히 도와줬어요.
TV 보며 엄마랑 언니랑 울었어요
세월호 사고를 알게 된 건 당일 점심시간 때였어요. 점심시간에 일찍 밥 먹으려고 종 치자마자 식당으로 막 뛰어갔어요. 한참 뛰어가던 저를 친구가 딱 잡더니 배가 침몰했다고 하더라고요. 제주로 수학여행 오던 배가 침몰했다는 거예요. 제가 친구에게 "다 살안?(살았니)" 하고 물었더니 "다 살았댄(살았대)" 하고 대답하더라고요. 다행이다 하고는 다시 식당으로 밥 먹으러 달려갔죠.
그렇게 다시 오후 수업 시작해서 선생님이 들어오시는데 얼굴이 이상해요. 왜 막 울다가 눈물 급하게 닦고 들어온 얼굴 있잖아요. 진짜 막 울다가 금방 교실에 들어온 얼굴. 그런 얼굴로 들어오셔서는 "지금 제주도에 오려던 친구들 배가 침몰했단다"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때 아차 싶었죠. 설마 우리 아빠가 그 배를 타지는 않았겠지 했죠. 그때부터 조금씩 걱정이 되기 시작했어요. 선생님께 말씀드리고 언니, 아빠한테 전화를 하는데 전화를 안 받아요. 그때부터 걱정을 했죠.
쉬는 시간이 돼서 전화기를 열어보니 큰 아빠에게 전화가 왔더라고요. 바로 큰아빠에게 전화를 했더니 무슨 일 없냐며 전화를 받으시는 거예요. 저는 아무 소식이 없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어요. 그때부터 손발이 떨리더라고요. 엄마, 아빠, 언니 다 전화를 안 받으니 무슨 일이 생겼나 하는 걱정만 들더라고요.
그때 친구가 저에게 자기 핸드폰으로 생존자 명단이라며 보여줬어요. 아빠 이름을 가지고 '투명 동수'(어디에나 있는 흔한 이름이라는 뜻)라며 장난치고 그래서 친구들은 아빠 이름을 다 알고 있었어요. 핸드폰을 보여준 그 친구는 자기 아빠하고 우리 아빠하고 생년월일이 같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세월호 생존자 명단에 '김동수'라는 이름과 생년월일이 올라오자 단번에 알아챈 거죠.
생존자 명단에 아빠 이름하고 생년월일이 뜨니까 정말 무슨 일이 났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계속 전화를 했는데 아무도 전화가 안 되더라고요. 진짜 무슨 일이 났다고 생각했죠.
그러다 언니하고 통화가 됐어요. 언니가 집에 있다고 하기에 선생님께 사정을 말씀드렸어요. 아빠가 세월호에 타고 있었던 것 같다 하니까 선생님께서 그럼 얼른 가보라 해서 짐을 챙겨서 집으로 왔어요.
집에 들어갈 때가 지금도 또렷이 기억이 나요. 평소 같으면 제가 집에 문을 열고 들어가면 언니가 왔니 하며 저를 반겨주었을 텐데 그날은 영 분위기가 달랐죠. 집에 가니 안방에 텔레비전이 켜져 있는데 아빠가 배 옮겨 타기 전에 아기를 들고 있는 장면과 배로 넘어가는 모습이 계속 나왔고, 언니는 울고 있었어요.
텔레비전에 나오는 장면과 언니를 번갈아가며 보다가 결국 저도 같이 울었죠. 그때까지 아빠가 사람 구했다는 걸 전혀 몰랐어요. 단지 아빠가 무사했으면 하는 걱정과 배에서 실종된 친구들 어떻게 하지 하는 이 두 가지 생각밖에 없었어요. 그렇게 엄마가 집에 올 때까지 언니와 울다가 엄마 오고 나서는 세 명이 같이 울었어요.
언니는 좀 놀란 것 같았어요. 처음엔 아빠가 살았다고 생각 못했던 거 같아요. 그러다 아빠와 전화가 된 거죠. 아빠는 '우선 알았으니까 나중에 전화할게' 하고 전화를 끊었다고 해요. 엄마하고 몇 번 더 연락했는지는 모르지만 제 기억에 그 정도 전화가 끝이었어요. 아빠는 그 다음 날 배 타고 제주도 오신다고 했어요.
다음날 아빠를 만나러 갔는데 기자들이 너무 많이 있었어요. 갑자기 기자회견 한다고 하면서 아빠가 기자회견을 했어요. 세월호 가족이라고 인터뷰 하자며 우리도 한 명씩 잡혔어요. 지금도 그때 그 사진이 친구들 사이에 '예나 주부도박단 짤'(도박하다 잡힌 사람들처럼 당황한 상태로 찍힌 사진이라서...)이라면서 돌아다녀요. 생일날이면 어김없이 그 사진이 돌아다니더라고요.
세월호 알리려고 애쓴 친구들
저는 지금도 고등학교 친구들한테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신성여고 친구들 중에 전부터 사회문제에 적극적인 아이들이 많았어요.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 관련해서 배지를 나눠주는 활동을 꾸준히 하던 친구들이었거든요.
세월호 사고 나고 1년이 지나 제가 고등학교 3학년 반장이 되었을 때 뭔가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학생들에게 세월호 리본이라도 나눠주자고 생각했어요.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워 제가 반장 회의 때 제안을 했어요. "세월호를 기념하는 리본을 나눠주고 싶다. 억지로 나눠줄 생각은 없다. 자발적으로 리본을 달고 싶다는 친구들에게만 나눠주겠다"라고요. 그랬더니 반장들이 모두 좋다고 했어요.
그래서 쉬는 시간마다 반을 찾아다니며 세월호 리본을 나눠줬는데 그때부터 친구들이 자기들도 뭔가 하고 싶다며 '서명 같은 것을 받아보자', '플래시몹을 해보자', '춤을 같이 추겠다' 이렇게 자발적으로 모임을 먼저 제안했어요. 학교에서 그런 캠페인을 하자며 직접 교장실로 찾아가 교장 선생님께 허락을 받은 친구도 있었어요. 그리고 그 활동을 모두 영상으로 담아 유튜브에 올려주겠다는 친구들도 있었고요.
뒤돌아 생각해보면 제가 한 건 별로 없어요. 친구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죠. 그 친구들이 대단했어요.
* 세월호 생존자들에게 힘이 되어주세요. 여러분이 주시는 '좋은기사원고료'는 전액 피해생존자와 그 가족들의 구술 채록 작업에 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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