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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일주, 지역이 희망이다

반복되는 구타와 기합... 아내는 읽는 것을 포기했다
[선감도의 비극⑫-1] 바다에 빠져서, 병에 걸려, 맞아 죽은 소년이 부지기수

18.06.27 07:45 | 이민선 기자쪽지보내기

선감학원은 소년 감화원이란 이름의 강제 수용소였다. 이 수용소는 일제가 '소년 감화'를 목적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수용소는 해방 이후에도 계속 운영 됐다. 수용소 안에서는 문을 닫던 해인 82년도까지 강제노동과 폭력 등 온갖 인권유린이 자행됐다. 그 사이 수많은 수용자들이 고통 속에 죽어갔다. 살아남은 일부 수용자들은 아직도 그때의 기억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최근 경기도의회가 진상조사에 나서면서, 과거 이 수용소가 존재했다는 사실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오마이뉴스>가 선감학원이라는 이름의 강제 수용소에서 일어났던 일들, 그 비극을 낱낱이 밝힌다. [편집자말]
▲ 선감도 나루터는 한때 무덤이었다. 어린아이들은 섬을 탈출하기 위해 바다를 건너다 실패하면 여기서 사체로 발견됐다. ⓒ 정대희

"50년 전 이야기지만 지금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식사는 목에 걸려 잘 넘어가지도 않는 강냉이 보리밥에 곤쟁이 젓 하나, (그나마 양이 적어) 너무 배가 고파 식당에서 나온 쓰레기더미를 헤치며 먹을 것을 찾던 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반복되는 구타와 기합, 고문. 손가락 사이에 연필을 끼워 넣고 빙빙 돌리기, 원산폭격, 한강철교... 검정 고무신 한 켤레로 뼛속까지 스며드는 추위를... 동상에 걸려 썩어가는 손가락 발가락."

김영배 '선감학원 아동 국가폭력 피해 대책협의회' 회장이 몇 년 전 고백하듯 쓴 글의 일부다. 장성한 그의 아들과 딸은 이 글을 읽으며 눈시울을 적셨고, 아내는 눈물이 앞을 가려 읽는 것을 중간에 포기했다.

이 글을 그의 가족이 읽은 그 시간이 그에게는 무척 후련한 순간이었다. 수십 년 살 부비며 산 아내에게조차 차마 털어놓지 못하고 가슴에 꽁꽁 묻어 둔 이야기여서다. '어째서?'라는 질문은 필요가 없었다. 누구에게나 밝히고 싶지 않을 만큼 아픈 과거가 한 가지씩은 있는 법. 선감학원이, 그에게는 바로 그런 과거였으리라.

그의 글은 탄원서가 되어 선감학원 운영기관이었던 경기도에 지난 2015년 전해졌다. 선감학원은 일제가 1942년 안산 대부도 옆 선감도에 세운 소년 강제 수용소다. 일제가 물러난 뒤에는 경기도가 맡아 1982년까지 운영했다.

그는 탄원서에서, 선감학원에서 자행한 인권침해 사실을 밝혀주고 국가가 저지른 잘못을 인정하며, 진심을 담아 사죄하라고 요구했다. 미처 피지도 못하고 떠난 어린 넋들의 원한을 달래 달라는 내용도 담았다.

"10살도 안 된 어린이를 깨끗한 옷을 입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부랑아로 취급하여 강제로 수용소에 보내 강제노동과 구타로 폐인을 만든 잘못을 인정하고 이에 대한 사과를 바랍니다. 수백 명의 어린 생명을 죽음으로 내몰아 야산에 팽개치듯 파묻었습니다. 무덤을 지금이라도 정비하여 어린 영령들의 원한을 달래주십시오. 고통을 안고 사는 선감학원 출신들이 조금이나마 편한 여생을 보낼 수 있도록 방법을 찾아줄 것을 우리 모두의 마음을 모아 요청합니다." - 탄원서 내용 중 -

"무단이탈자 중 상당수가 사망했을 가능성 커"

▲ 김영배 회장 ⓒ 이민선

▲ 포크레인을 능숙하게 다루는 김영배 회장. ⓒ 이민선

이 탄원서는 지난 2015년 '선감학원 생존자 협의회'라는 단체 명의로 보낸 것이다. 김 회장은 이와 비슷한 내용의 탄원서를 2013년부터 끈질기게 경기도에 보냈다.

그런데 어째서 단체 이름이 '생존자협의회'일까? 그것은 그만큼 죽은 아이가 많기 때문이다. 도망치다 바다에 빠져 죽거나 병에 걸려 죽고, 맞아 죽은 소년이 부지기수라는 게 피해자들의 일관된 증언이다.

이를 뒷받침할 자료도 있다. 지난 2월 경기도가 진선미 더불어민주당 의원에게 제출한 '선감학원사건 희생자 유해발굴을 위한 사전조사 계획 수립 용역 최종보고서'에 따르면, 경기도 기록관은 모두 4691명의 퇴원아대장(1955년~1982년)을 보관하고 있다. 퇴원사유는 집으로 돌려보냈다는 '귀가'가 1178명, 다른 고아원으로 보냈다는 '전원'이 1011명, 고용위탁(취업)이 413명, 사망 24명, 무단이탈이 833명, 기타가 1232명 등이었다.

퇴원사유 중 주목해야 할 것은 무단이탈 833명이다. 다수의 피해자들 증언에 따르면 무단이탈로 표기된 인원은 바다를 헤엄쳐 도망치다 익사한 원생일 가능성이 크다.

진선미 의원실 관계자도 "무단이탈자 중 상당수가 사망했을 가능성이 크다"며 "무단이탈로 표기된 833명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한 전면적인 조사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끔찍한 폭력을 견디고 살아남은 아이들은 나름대로 제 몫의 인생을 살며 성인이 되었다. 범죄에 휘말려 반평생 감옥에서 보낸 이도 있고, 가정을 일구고 지극히 평범하게 산 이도 있는데, 공통점은 대부분 선감학원 출신이란 사실을 숨겼다는 것이다.

이들은 김영배 회장이 지난 2013년 탄원서를 내기 시작하면서 자신이 선감학원 출신이라는 것을 고백하듯 밝히기 시작했다. 그 덕에 처음 탄원서를 낼 때 11명이던 회원이 5년여 만에 50여 명으로 불었다. 단체 이름도, '생존자협의회'에서 '선감학원 아동 국가폭력 피해 대책협의회(아래 피해자 협의회)'로 바꿨다. 깊은 상처를 안고 숨죽이며 살던 피해자들이 하나둘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진선미 국회의원처럼 도와주는 이도 생겼다. 경기도의회에서는 더불어민주당 원미정, 김달수, 정대운 의원이 적극적으로 돕고 있다. 언론도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김영배 피해자 협의회 회장을 만난 것은 지난 18일 늦은 오후다. 그의 일터인 인천 가정동 도로에 있는 건설현장에서 그와 악수를 나눴다.

그는 포크레인 기사다. 작달막한 키에 예순넷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였지만, 집채만한 포크레인 운전석에 앉아 있는 모습은 30-40대 젊은이 못지않게 활기차 보였다.   

하지만 선감도 기억을 끄집어내면서부터는 초로의 고단함이 그의 얼굴에 고스란히 묻어났다. '어이구~'하는 탄식과 함께 터지는 깊은 한숨에서 그가 입은 상처가 얼마나 지독한지를 느낄 수 있었다. 그 기억을 후벼파듯 자꾸 물어야 하는 내 입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깊은 심호흡으로 아랫배에 힘을 넣어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고 질문을 이어가야 했다.

그곳이 섬인 줄 모르고 도망치는 아이들

▲ 1970년대 군사독재 정권 시절에도 선감학원은 소년 강제 수용소였다. ⓒ 경기도

▲ 선감도에 강제로 끌려온 어린아이들이 생활했던 '원생 숙소' ⓒ 정대희

그는 1962년 가을께 서울역 앞에서 경찰에게 붙잡혀 서울시립아동보호소에 머물다 그 이듬해인 1963년 8월 무렵 사방이 바다로 가로막힌 섬 선감도에 끌려갔다. 경찰한테 붙잡힌 이유는 알 수 없다. 부모가 갑작스레 돌아가셔서 사는 게 고생스럽긴 했지만, 나이차 큰 누님과 고모가 보살피고 있었으니 보호자가 없는 처지도 아니었다.

"그 경찰을 만날 수 있다면 '8살 어린 내 덜미를 어째서 잡아챘느냐?'고 지금이라도 묻고 싶어요. 흰 고무신을 신고 있었으니, 그렇게 남루한 옷차림도 아니었을텐데. 직장 다니는 누님을 기다리며 밖에서 놀고 있다가 잡혔거든요. 경찰 옷(제복)만 봐도 무서울 때라 반항도 못했어요."

서울시립아동 보호소는 8살짜리 순둥이가 견디기에는 너무나 힘겨운 공포스러운 분위기였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툭하면 주먹이 날아 왔다. 꽃병에 있는 물을 탁자에 엎질렀다는 이유로 정신을 잃을 정도로 심하게 맞은 일, 그 분함과 공포는 5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이때 생긴, 다른 사람 눈을 똑바로 보지 못하는 버릇은 지금도 지병처럼 그의 몸에 남아 있다. 

계절이 두 번 바뀌자 아동보호소 측은 '고향배차'를 한다며 어린 김영배를 군용 트럭에 태웠다. '고행배차'란 말을 듣고 그는 어머니 아버지와의 추억이 있는 고향 파주로 가는 줄 알고 뛸 듯이 기뻤다. 하지만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에 조리돌림 당하며 끌려간 곳은 고향이 아닌 마산포라는 작은 부두였다. 마산포에서 배를 타고 선감도로 가는 길은 철썩거리는 파도를 보는 것만으로도 공포 그 자체였다. 배에서 내리자 지독한 폭력이 그를 기다렸다.

"저보다 좀 큰 애들이 배에서 내리자마자 막 도망치는 거예요. 그곳이 섬이라는 것을 몰랐던 거죠. 저는 너무 어려서 도망칠 꿈도 못 꿨고요. 그러니 뛰어봤자 벼룩이지요. 붙잡히는 대로 다리 걸어서 넘어뜨리고 지근지근 밟아버리는데, 어휴~ 생지옥이 따로 없어요. 그 다음에는 돌밭에서 원산폭격 같은 것 시키면서 막 굴리고. 어휴~ 아동 보호소는 거기에 비하면 천국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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