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만인 리포트

전국 일주, 지역이 희망이다

일제의 만행 폭로한 일본인
그가 기억하는 지옥섬의 진실
선감도의 비극 알린 이하라 히로미츠씨

18.06.04 08:07 | 글:정대희쪽지보내기|편집:장지혜쪽지보내기

▲ 선감도의 비극을 알린 이하라 히로미츠(84) 씨. 그는 일제가 저지른 만행을 처음 세상에 알린 일본인이다. ⓒ 정대희

여든넷의 일본인이 무릎을 꿇었다. 한국의 전통 제례복 차림이었다. 그가 내디디고 있는 땅에서 어린 소년의 꽃신이 발견됐다. 암매장된 아이의 것이었다. 백발의 그가 제사상에 술잔을 올리고 절을 했다. 고개 숙인 머리 앞에 봉분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대한해협을 건너온 그는 이렇게 어린아이들의 넋을 기렸다.

그의 이름은 이하라 히로미츠(84)다. 어린 소년들이 묻힌 땅은 경기도에 있는 선감도다. 지난달 26일, 안산시 단원구 선감동 산 37-1번지에서 선감학원 희생자 추모 위령제가 열렸다. 선감도의 비밀, 감춰진 소년들의 이야기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마련한 자리였다.

이날 옛 선감학원 터에서 이하라 히로미츠씨를 만났다. '선감학원'은 일제가 1942년, 선감도에 세운 소년 강제수용소다. 수많은 아이가 여기로 끌려와 노역을 살고, 굶주림에 시달리다가 아무렇게나 땅에 묻혔다. 그는 일제가 저지른 만행을 처음 세상에 알린 일본인이다.

선감학원은 지금 경기창작센터로 변했다. 전시사무동 옆 나무 밑, 야외테이블 위에 노트북을 폈다. 그가 기억하는 선감학원의 진실을 기록하기 위해서다. 일제가 어린아이들에게 가한 서슬 퍼런 폭력의 역사이기도 하다. 진실규명을 위해 그가 입을 열었다. 통역은 신혜란 한양대학교 국제관광대학원 겸임교수가 맡았다.

"선감도... 내겐 천국, 아이들에겐 지옥"

▲ 선감도의 비극을 알린 이하라 히로미츠(84) 씨. 그는 일제가 저지른 만행을 처음 세상에 알린 일본인이다. ⓒ 정대희

"고향에 돌아온 것처럼 편안한 느낌이다. 옛날이 그립다."

그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고향"이란 단어를 내뱉은 건, 선감도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서다. 그는 지난 1943년, 선감학원 부원장으로 발령이 난 아버지를 따라 여기로 왔다. 이후 10살까지 살다가 일본 요코하마로 건너갔다고 했다.

여기선 행복했으나 거기선 불행했단다. 고국으로 돌아간 그는 학교에서 "이지메(왕따)"를 당했다. 한국에서 살다 온 게 이유였다. 어린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 선감도에서 즐거웠던 추억이 떠올랐다. 괴로울 때마다 이런 기억을 꺼냈다. 그제야 생각났다. 선감학원에 갇혀 있던 또래 아이들의 얼굴이.

"학교에 다니면서 굉장히 부조리하게 왕따를 당했다. 이런 일을 겪다가 보니, 선감도에 있던 아이들도 어떻게 보면, 일본군에게 부조리하게 왕따를 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아이들의 마음에 동감하게 됐다. 내겐 천국이었던 곳이 어린아이들에겐 지옥이었다는 것을 느끼게 됐다."

그래서다. 지옥 섬에서 목격한 걸, 세상에 알리기로 했다. 책을 좋아하던 문학 소년은 트럭 운전을 하며, 작가를 꿈꿨다. 머릿속에 묵혀두었던 기억을 꺼내 글로 옮겼다. 생생한 현장을 담아내기 위해선 한국에, 선감도에 가야 했다. 뾰족한 수가 없어 발만 동동 굴렀다.

그건, 운명 같은 만남이었다.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단다. "아버지의 제자"라고 했다. 한국에 온다면, 취재를 도와준다고 했다. 선감도에 간다면, 따라 나서준다고 했다. 이렇게 다시 한국 땅을 밟았다.

"아버지가 선감학원에 발령받기 전, (북한) 원산에서 교사였다. 이때 가르쳤던 제자가 수소문 끝에 연락을 해왔다. 일본에 가는데 아버지를 만나고 싶다고. 이 편지를 어머니가 받았고, 나에게까지 전달됐다. 서울대 의대를 나온 '조 박사'라는 사람이었는데, 선감도를 취재하고 싶다니 한국에 온다면 얼마든지 도와준다고 했다.

아버지는 생전에 선감학원에 대해서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일본으로 돌아오고 10년 후 돌아가셔서 아무것도 물어볼 수도 없었다. '조 박사'도 만나지 못했다. 하지만 이런 일을 겪으니, 아버지가 말은 안 했지만 나를 통해서 선감도에서 벌어진 비극을 세상에 알리려고 한 게 아닌가 싶다."   

44년만의 기록을 소설 형식으로 쓴 까닭

▲ 선감도의 비극을 알린 이하라 히로미츠(84) 씨. 그는 일제가 저지른 만행을 처음 세상에 알린 일본인이다. 그가 옛 선감학원 운동장에 섰다. 기억을 더듬어 자신이 목격한 소년 수용소의 이야기를 증언했다. ⓒ 정대희

지난 1980년 5월, 어렵게 찾은 한국은 예전과 달랐다. 계엄령이 발령된 상태였다. 험악하고 삼엄한 분위기에 그는 두려웠단다. 한 번은 간첩 누명을 쓰고 경찰에 붙잡혔다.

배에서 내리니 경찰이 다가왔다. 지난 1981년, 선감도 취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선감도에 사는 친구가 "여기서(선감도) 사진 찍으면 잡혀간다"라고 했는데, 빈말이 아니었다. 경찰에 체포돼 파출소로 끌려갔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사진을 찍으니 누군가 밀고를 한 거다. 간첩이라고. 배를 타고 섬을 빠져나오는데, 경찰이 대기하고 있었다. 붙잡혀 실랑이하다가 카메라 필름을 빼버리고 때마침 오는 버스에 올라타 도망갔다.

이번에는 경찰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 정거장에 도착했는데, 경찰차 두 대가 버스를 가로막았다. 다시 파출소로 끌려가 신체검사까지 받았다. 다행히 선감도에 사는 친구와 지인이 적극적으로 대변해줘서 풀려났다."

아찔한 경험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포기할 법도 한데, 그러지 않았다. 그는 선감도의 비극을 알리기 위한 취재를 멈추지 않았다. 이렇게 1989년까지 수차례 한국을 찾았고, 그해 12월 책 <아! 선감도>가 출판됐다. 선감도를 떠난 지 44년 만이었다.

"일본 사람들에게도 선감도에서 일어난 진실을 알리고 싶었다. 책에 담은 내용을 대자보로 만들어서 집 앞 담벼락에 걸었다. 하지만 일본 사람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가까운 형제, 친척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인터넷에 제 이름을 검색해보면 알 텐데, 저를 향한 나쁜 기사가 많다. 하지만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일본이나 한국이나, 어느 나라 사람이건 진실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나의 신념을 이해하고 도와준 건, 한국 사람들이다. 이런 일본인도 있다는 걸 알아줘서 굉장히 고맙다. 한국에 대한 사랑 잊지 않고 기억할 거다. 그리고 오랜 시간 트럭운전을 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무사고로 일을 할 수 있었던 건, 어린 영혼들이 날 지켜주고 있어서란 생각이 든다."

- 책 <아! 선감도>는 얼마나 현실을 반영했나?
"거의 논픽션으로 썼다. 소설이라고 이름 붙인 건, 최후의 보류 장치다. 일본이나, 한국에 민감한 사안이라 문제가 되면 도망치기 위해서 '소설'이라고 한 거다. 퍼센트로 따지면 70%가 진실이고, 30%가 픽션이다." 

70%의 진실

▲ 선감도의 비극을 알린 이하라 히로미츠(84) 씨. 그는 일제가 저지른 만행을 처음 세상에 알린 일본인이다. 그가 위령비 앞에 섰다. 이걸 세우려고 그는 대한해협을 수차례 오갔다. 어린 영혼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서다. ⓒ 정대희

70%의 진실은 무엇일까. 그가 목격한 선감도의 비극이 궁금했다. 그가 기억하는 지옥 섬에 사는 어린 소년은 이랬다.

"저기(경기창작센터 앞에 보이는 마을 근처)에 포도밭이 있었다. 거기에 '피병자 수용소'라고 병에 걸린 아이들이 있었는데, 열 살이나 열두 살 된 소년과 자주 마주쳤다. 눈만 크고 깡마른 아이였다. 쭈그려 앉아 있었는데, 나를 뚫어지게 쳐다봤던 눈빛을 잊을 수 없다."

그는 기억을 더듬었다.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리저리 팔을 흔들며, 손가락질했다. 그의 머릿속에 있는 과거의 선감도 풍경을 불러오느라 온몸을 썼다. 이런 손가락 끝에, 온몸으로 표현한 장소에 봉분이 있던 야산이 있었다.

"어린아이들을 관에 넣어서 산으로 올라가는 것을 봤다. 어떻게 죽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어머니가 말하길 어린아이들이 물에 빠져서 죽고, 병이 나서 죽었다고 했다."

여기선, 정진각 안산지역소장의 도움을 받았다. 그는 지난 20여 년간 선감학원의 진실을 파헤친 사람이다. 이하라 히로미츠의 증언을 기록하고 그와 함께 감춰진 소년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렸다.

강제노역과 굶주림. 정 소장이 추정하는 소년들의 죽음이다. 강제노역에 시달리던 아이들이 섬을 탈출하려고 바다를 건너다가 물에 빠져 숨을 거뒀다는 거다. 굶주림에 허덕이다가 잠들어 그대로 깨지 못했다는 거다. 박정희 정부 때도 이런 일이 반복됐다고 한다.

[관련 기사] 선감도의 비극... 바다로 뛰어든 고아들

이게 다가 아니다. 이하라 히로미츠씨가 죽도를 든 자세를 취했다. 주먹을 위아래로 쌓고 손목을 앞뒤로 흔들며, 죽도를 내리치는 시늉을 했다.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알아들을 수 있었다. 무슨 소리를 하려는지.

"죽도로 어린아이가 맞는 거를 봤다. 선감학원 원장선생님 집에서다. 그 앞이 대부도 소학교 선감분교였다. 공부하고 있으면, 매 맞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이 소리를 듣고 상상이 됐다. 강제노역에 지친 뼈만 앙상한 아이가 매타작을 당하는 게. 반대로 머리로는 그릴 수 없는 게 있었다. 아이들이 겪은 고통이다.

- 어린 소년들의 강제노역을 목격한 적은 없나?
"여기(경기창작센터 앞터)서 아이들이 농사를 지었다. 논에서 모내기를 한다거나 밭에서 일을 했다. 운동장을 만든다고 흙을 잔뜩 퍼나르는 것도 봤다. 바다에서 고기도 잡았다. 갯벌에 쳐놓은 그물에서 생선을 빼서 가는 걸 봤다. 바지락이랑 맛도 캤다. 그땐 그게 강제노역인 줄 몰랐다."

- 황민화 교육을 받는 걸 본 기억은 없나?
"나무를 총 모양으로 깎아서 훈련했다. 소리도 내지르고 그랬다. 지금 생각해보면 군인으로 키우려고 그랬던 것 같다. 그때가 전쟁이 끝날 무렵이었으니 인적자원이 필요했을 거다. 군인 양성하려고 훈련을 한 거다. 하지만 행동을 보면, 강제노역에 지치고 못 먹어서 체력이 말이 아니었다."

풀리지 않은 비밀, 진실 규명해야

▲ 일제 강점기 선감학원 ⓒ 홍석민

여기까지다. 지난달 26일 이하라 히로미츠씨가 들려준 선감학원의 비극은. 그는 "내년에 다시 만나자"라는 인사말을 남기고 옛 선감학원을 떠났다. "일본에서 살 때 선생님께(이하라 히로미츠) 신세를 많이졌다"는 부산에서 온 중년 남성의 자동차를 타고 경기창작센터를 빠져나갔다.

그 시각, 군사독재 정권 시절 선감학원에 강제로 끌려왔던 소년들은 경기창작센터 전시사무동에서 선감학원 피해자 총회를 했다. 국가폭력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스스로 나선 거다.

선감도의 비밀은 아직 풀리지 않았다. 일제와 군사독재 정권은 40년 동안 어린 소년들을 강제로 끌어가 노역에 동원했다. 어린아이들을 몽둥이로 다스리고 숨을 거두면 아무렇게나 땅에 묻었다. 인권유린의 땅이자 생지옥 섬에서 벌어진 일이다. 이젠 국가가 나서서 진실을 밝혀야 하는 일만 남았다.

끝으로 여기, 한 장의 사진이 있다. 선감도에 강제로 끌려온 첫 번째 아이들이다. '부랑아'로 취급돼 길거리에서 붙잡혀온 소년들이다.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아이들은 몰랐을 것이다.
그들 앞에 펼쳐질 일들을.

▲ 선감도에 1942년 소년 강제 수용소 선감학원이 문을 열었다. 사진은 첫 번째 원생들이 대부도 진두포구에 도착한 모습 ⓒ 이하라 히로미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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