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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일주, 지역이 희망이다

선감도의 비극, 소년들은 암매장 됐다
[선감도의 비밀, 감춰진 아이들 ① - 르포] 소년 강제 수용소, 선감도에 가다

18.05.10 08:01 | 정대희 기자쪽지보내기

▲ 1970년대 군사독재 정권 시절에도 선감학원은 소년 강제 수용소였다. ⓒ 경기도

선감도엔 비밀이 있다. 감춰진 소년들의 이야기다. 일제가 어린아이들을 강제로 끌어가 노역에 동원했던 기록이다. 군사독재 정권 시절에도 똑같았다. 이곳저곳에서 애들을 잡아다가 모진 육체노동을 시켰다. 여기선 40년 동안 어린 소년들을 몽둥이로 다스리고 숨을 거두면 아무렇게나 땅에 묻었다. 그래서다. 이 섬은 인권유린의 땅이자 지옥 섬이었다.

이런 생지옥의 흔적을 되짚고자 카메라와 취재 수첩을 챙겼다. 지난 4월 24일, 경기도 안산시에 있는 선감도로 향했다. 혼자 간 건, 아니다. 정진각 안산지역사연구소장과 함께 갔다. 그는 지난 20년간 선감도의 진실을 끈질기게 추적하고 세상에 알린 사람이다.

소년 강제 수용소, 선감도에 가다

▲ 선감도엔 죽음의 흔적이 있다. 어린아이들이 아무렇게나 땅에 묻힌 자국이다. 정진각 안산지역사연구소장은 풀이 푸성하게 자란 여기가 소년들의 무덤이라고 했다. ⓒ 정대희

선감도는 섬이 아니었다. 한때 바닷물이 흐르던 곳에 콘크리트 길이 뻗어 있었다. 방조제는 육지와 섬, 섬과 섬을 연결했다. 자동차가 '지방도 301'을 따라 쉬지 않고 달렸다. 불도방조제 삼거리를 지나자 '경기창작센터'를 알리는 도로 표지판이 나타났다. 비밀을 안고 있는 장소다. '소년 강제 수용소' 선감학원의 현재 이름이다.

네 바퀴의 속도가 줄었다. 선감학원 터로 향하던 차가 방향을 틀었다. 안산시 단원구 선감동 산 37-1번지에서 엔진이 멈췄다. 정진각 소장은 "보여줄 게 있다"라고 했다. 산기슭에 있는 풀이 웃자란 땅으로 이끌었다. 

그가 손짓했다. 손끝을 따라 눈을 돌렸다. 나무와 나무 사이에 현수막에 '이름도 없는 어린 원혼이여 천년을 두고 울어주리라'라고 적혀 있다. 그제야 풀밭이라 여겼던 땅덩어리에 뭔가 볼록하게 올라와 있는 게 보였다. 봉분이었다.

"여기가 아이들이 묻혔던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다. 작게라도 무덤이 있는 건, 무연고 분묘다. 어린 소년들의 무덤은 흔적도 없다. 강제로 끌어와 노역을 시키고, 그러다가 죽으면 대충 묻은 거다."

죽음은 흔적을 남긴다. 흙으로 덮여 있는 진실을 찾기 위해 장비가 동원됐다. 이 지역을 지표투과레이더(GPR, Ground Penetrating Radar)로 탐사한 거다. '선감학원 사건희생자 유해발굴을 위한 사전 조사 계획 수립 용역 최종 보고서'에 실린 내용은 이랬다.

"6개 블록에서는 45곳 정도의 이상대가 확인되었으며, 조사한 영역이 전체 조사지역의 1/3 정도인 점을 감안할 때, 조사지역 전체에는 150구 정도의 유해가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풀이 무성히 자란 무덤 터를 카메라에 담았다. 취재 수첩엔 "죽음, 왜?"라고 썼다. 운동화에 묻은 흙을 털지 않고 그대로 차에 올라탔다. 유해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소년들의 죽음을 파헤치기 위해 섬 안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컨테이너에 진실을 추적한 자료가 쌓여 있었다. 선감역사박물관은 컨테이너 3동을 연결한 시설이었다. 여기에 의문의 죽음을 풀어줄 단서와 실마리가 있었다. 앳된 아이들이 겪어야 했던 끔찍한 이야기다. 벽에 걸린 팻말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선감학원은 1942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부랑아 감화시설로 설립되었다. 그러나 부랑아들을 보호 육성하여 사회에 복귀시키려는 데 목적이 있다기보다는 태평양 전쟁을 위한 인적자원으로 충원하기 위한 훈육기관으로 운용되었다.

해방 이후에도 이 시설은 계속 존치되었다. 특히 한국전쟁 발발 후 미군 주둔지로 41개 동의 건물이 신축되었는데, 미군이 철수하자 더 큰 규모의 부랑아 수용시설로 복귀되었다. 1960년부터 1970년대 내내 정부에 의해 강도 높게 진행된 부랑아 단속은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는데,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혹은 성과경쟁에서 앞서기 위해 거리를 돌아다니는 소년들을 부랑아로 무차별 연행하고 선감학원 등으로 보냈던 것이다.

선감학원에 수용된 소년들은 혹독한 강제노동에 동원되었다. 그 과정에서 노동력 착취, 심한 폭력 등 인권유린을 당하였고 많은 소년들이 생명을 잃었는데, 수용소 당국은 사망한 소년들을 적합한 절차 없이 암매장하였다."


때론 진실이 더 잔혹하다. 선감도의 숨겨진 이야기는 소년들의 비극이다. 선감학원은 물 위에 떠 있는 소년 강제 수용소였다. 이런 걸 짓느라 일제는 땅을 사들이고 주민들을 섬 밖으로 쫓아냈다. 군사독재 정권 시절에는 시청 공무원과 경찰이 소년들을 납치하다시피 잡아다가 선감학원에 보냈다.

선감도의 비밀, 소년의 비극

▲ 일제 강점기 선감학원 ⓒ 홍석민

섬 한가운데 비극의 현장이 있었다. 선감역사박물관을 빠져나오자 정 소장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경기창작센터에서 온 연락이었다. 이날 열리는 선감학원 피해자 위령제를 위한 회의에 참석해달라는 전화였다. 선감학원 터에 지금은 경기창작센터가 들어서 있었다.

기억의 발자국을 찾아 나섰다. 경기창작센터에 남은 선감학원의 흔적을 훑어봤다. 흑백사진에서 봤던 목조건물은 콘크리트 구조물로 바뀌어 있었다. 먼지가 날리던 운동장엔 천연잔디가 깔렸었다.

두 발로 비극을 기록하고자 길을 나섰다. 운동화 끈을 고쳐 매고 경기창작센터에서 나루터까지 이어진 '선감이야기길'을 걷기로 했다. 정 소장과는 잠시 헤어졌다. 나 홀로 취재 장비를 챙겨 탐방을 시작했다. 

포도밭 옆에 비극의 자국이 남아있었다. 소년들이 머물던 막사였다. 빛바랜 사진 속에 있던 '원생 숙소'와 다르지 않았다. 가방에서 정 소장이 준 선감학원 자료집을 꺼냈다. 일제 강점기에 얼마나 많은 아이가 '원생 숙소'에 끌려왔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1942년 6월 2일, <매일신보>에 게재된 '자취 감춘 부랑아 선감도에 200명 수용'이란 제목의 기사가 눈에 띄었다. 거기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경기도에서는 29일 오전 4시 부내 각 경찰서를 총동원시켜 일제히 관내에 산재해 있는 부랑 소년 300여 명을 영등포역전에 모이게 하여 그중 7세로부터 14세까지 200여 명을 버스 6대에 분승시켜 오전 11시경 인천으로 보내 동일 오후에 선감도로 승선시켰는데..."

1942년 3월, 일제는 조선소년령을 제정했다. 같은 해 5월 29일, 선감학원은 설립기념일을 가졌다. 법을 만들고, 수용소의 문을 열고, 아이들을 끌어오기까지 약 3개월이 걸린 거다. 아귀가 '딱딱' 맞는 흐름이다. 

선감학원이 '소년 창고'였다는 기록도 있다. 군사독재 정권 시절에 만든 문서다. 국가기록원에 남아있는 자료다. '선감학원 운영대책' 중 '별첨자료'인 '수용아동현황(1982년 7월 15일 기준)'에 수치가 기록돼 있다. '입원 누계 5775명, 퇴원 누계 5694명, 현원 65명'이라 쓰여 있다. '원생 숙소'에서 수많은 아이들이 칠흑 같은 어둠을 보내고 아침을 맞았다는 거다.

▲ 선감학원 터에 들어선 경기창작센터 ⓒ 정대희

한때 소년들의 숙소를 지나 언덕에 오르자 쉼터가 나타났다. 드넓은 평가가 눈앞에 펼쳐졌다. 고사리손으로 풀을 베고, 밭을 갈았던 터다. 이걸 생생하게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 국가폭력의 희생자들이다. 군사정권 시절, 8살 나이에 선감학원에 끌려갔던 곽은수, 혜법 스님의 증언이다.

"뽕잎 따기 풀 뽑기, 산을 논으로 개간하는 일을 했는데 작업량을 채우지 못하면 식당에 들여보내질 않는 거예요. 어떤 날은 새벽에 일하러 나가기도 했는데 작업량을 못 채우면 아침을 거르게 되는 거죠. 간신히 작업량을 채우고 식당에 갔는데 밥이 없으면 정말 피눈물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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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곤(62)씨도 10살 즈음에 강제노역에 동원됐다. 그가 입을 연 국가폭력의 민낯은 이렇다.

"정말 힘든 게 노동이었어요. 그 어린아이들한테 성인도 하기 힘든 하역 작업을 시켰어요. 배에서 연탄이나 40킬로(그램)나 되는 시멘트 부대 같은 것을 내리는 일이었는데, 그때 시멘트 부대를 진 채로 배에서 떨어져서 허리를 다쳤습니다. 그게 지금도 저를 괴롭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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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일제 강점기에 기록을 찾고자 구술기록을 뒤졌다. 농사일 말고도 황민화 교육을 받고 군사훈련에 참여했다는 증언이 있다. 책 <아! 선감도>를 펴낸 일본인 이하라 히로미츠(84)씨의 말이다. 그는 선감도의 비극을 처음 세상에 알린 장본인이다.

"(소년들은)오전에 6시 기상, 7시 넘어까지 공부했습니다. 공부는 일본어와 천황폐하의 칙어를 반복적으로 따라 하게 했습니다. 7시 반이나 8시쯤 아침을 먹었고... 중식 후에는 농사일을 하거나 운동장에 모여서 교련을 했습니다.

식사가 부족했기 때문에 영향실조에 걸리거나, 고픈 배를 달리기 위해 개구리, 쥐, 뱀을 잡아 먹은 아이도 있었습니다. 뭐든지 먹었기 때문에 위에 탈이 나서 쓰러지곤 했습니다... 피병사(避病舍)에 있는 어린이를 몇 명 봤습니다. 상처 난 곳에 파리가 잔뜩 꼬여서 커다란 검은 점같이 보였습니다. 아이들은 파리를 쫓아낼 힘도 없어 보였습니다."


자료집을 덮었다. 더는 읽기 힘들었다. 여기서 시간을 지체할 틈도 없었다. 가야할 길이, 기록해야 할 게 아직 남았다. 언덕길을 내려와 나루터로 가는 길에 접어들었다. 벚꽃이 땅 위를 하얗게 수놓았다. 발밑이 꽃길이다. 하지만 그때 그 시절, 어린 소년들에겐 생지옥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아이들이 끌려와 처음 발을 내디뎠던 나루터에 도착했다. 대부도가 보였다.

섬 밖으로 새어나가면 안 되는 이야기. 나루터에도 있다. 뒷산에서 봤던 죽음의 흔적은 지옥 섬을 탈출하다가 실패한 어린아이들이었다. 일제 강점기에 있었던 일이다. 이하라 히로미츠는 이렇게 증언했다.

"해변에서, 물에 빠져서 죽은 아이를 본 건 2, 3명 정도였습니다. 도망갔지만 주변이 바다이기 때문에 어린아이들은 헤엄쳐서 건너갈 수가 없었습니다... 도망친 아이들은 대부도로 갔습니다. 대부도에서 민가로 가는데 모두 배가 고프니까 밥을 훔쳐 먹습니다. 그러다가 잡혀서 대부도 사람-당시는 조선인이라고 했는데-들이 선감도로 데려왔습니다. 잡혀 온 아이들은 매를 맡았고, 묶여 있었습니다."


군사독재 정권 시절에도 다르지 않다. 소년 임용남은 12살에 선감학원에 끌려왔다. 3년 동안 7번 탈출을 시도한 끝에 나루터를 벗어나 육지로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의 증언은 취재 수첩에 적어둔 궁금증도 풀어줬다.


"7번이나 탈출을 시도하면서 무턱대고 바다로 뛰어들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고요. 그곳에 있는 3년 동안 10번 정도 죽음을 목격했는데, 대부분 도망치다 바다에 빠져 죽은 경우였어요. 정말 끔찍합니다. 몸은 퉁퉁 불어 있고, 조그마한 조개가 덕지덕지 붙어 있고, 시체를 건지면 가마니에 둘둘 말아 묻으면 그만이에요. 개죽음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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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증언을 읽고 고개를 들자 방범대 건물이 보였다. 그 앞에는 태극기가 세차게 펄럭이고 있었다. 소년 임용남이 아른거렸다. 그에게 국가는 없었다. 아니, 키 작은 아이에게 폭력을 가한 건, 국가였다.

끝나지 않은 선감도의 비극

▲ 선감도에 강제로 끌려온 어린아이들이 생활했던 '원생 숙소' ⓒ 정대희

"나루터 옆 포장마차에서 칼국수 한 그릇 합시다."

지난 4월 24일 낮 12시 30분, 다시 정 소장을 만났다. 선감학원 피해자 위령제 회의가 뜻대로 안 됐는지 하소연을 늘어놓는다. 칼국수 집으로 향하는 내내 얼굴이 상기됐다. 선감도가 한눈에 보이는 포장마차에 갔다. 주인장이 정 소장을 아는 체한다.

"선감학원 피해자들이랑 종종 이 집을 찾아와요. 그러다가 알게 됐는데. 여기 주인이 말하길, 이따금 혼자서 칼국수에 소주 한잔하면서 우는 사람이 있다는 거예요. 나도 모르는 선감학원 피해자들이죠.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먹먹합니다."

여기서도 어린 소녀를 향했던 서슬 퍼런 폭력의 기억을 들을 수 있었다. 머리와 가슴을 할퀸 상처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선감도를 떠나기 전, 선감학원 피해자 위령비를 찾았다. 경기창작센터 한 귀퉁이에 있었다. 혼자서 훑어볼 땐, 못 봤던 거다. 지난 2014년 정 소장과 뜻 있는 시민들의 힘으로 세운 거였다. 위령비에는 이런 설명문이 달려 있었다.

"본 조형물은 유년시절 놀이기구의 하나인 방패연 이미지를 사용하여 구상한 작품으로 방패연, 얼레, 꽃잎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방패연은 자유를 갈망하는 마음, 얼레는 연이 날 수 있도록 바람을 일으킴과 동시에 연을 묶어두는 양면적 상황으로서의 상징성을 부여하였고 꽃잎은 어린아이의 고귀함과 순수를 은유한다. 이는 자유롭지 못한 시간과 공간을 넘어 영속적인 자유를 염원하는 굳은 의지를 표현한다."

위령비의 방패연 문양 구멍 사이로 뒷산이 보였다. 선감도에 끌려왔다가 죽은 어린 소년들이 묻힌 장소다. 이날 처음 찾은 비극의 현장이기도 하다. 

선감도의 비극, 끝나지 않았다. 이 글을 시작으로 선감도의 비밀을 추적한다. 감춰진 아이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공개한다. 일제가, 군사독재 정권이 소년들에게 가한 강제노역과 폭력, 인권유린을 피해자들의 입을 통해 낱낱이 공개한다.

진실은 아직 땅속에 묻혀있다. 이제는 바로 잡아야 한다. 진실이 규명되는 그날을 위해 카메라와 취재 수첩을 놓지 않겠다. 끝까지 취재하는 게 기자다.

▲ 선감도 나루터는 한때 무덤이었다. 어린아디들은 섬을 탈출하기 위해 바다를 건너다 실패하면 여기서 사체로 발견됐다. ⓒ 정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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