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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 기술자 이근안, 그를 파헤친 이 남자
국가폭력 민낯 기록한 변상철 시민기자

18.04.17 08:02 | 글:정대희쪽지보내기|편집:김도균쪽지보내기

'고문 기술자' 이근안이 카메라에 잡혔다. 아래 영상이 그거다. 지난 2017년 12월에 촬영한 거다. 헌팅캡을 눌러쓰고 뒷짐 진 채 걸어가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걸 찍은 사람이 있다. 이근안의 고문기술을 기억하는 자이다. 피해자는 아니다. '가짜 간첩' 사건을 파헤친 온 진실 추적자다. 지난 14년, 그는 이 땅에서 벌어진 '간첩 조작' 사건의 진실을 규명해왔다. 변상철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다.

여기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국가폭력의 민낯을 세상에 공개한 진실 추적자다. <오마이뉴스>에 '국가폭력 이야기-인권을 먹다'를 연재하고 있는 변상철 시민기자다. 다른 사람은 고문 기술자다. 세상은 그가 조작한 간첩 사건을 기억한다. 고문 경찰 이근안이다.

이 둘의 이야기를 지금부터 시작한다. 변상철 시민기자가 기록한 이근안과의 인연을 되짚는다. 국가폭력에 '가짜 간첩'이 돼야만 했던 피해자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사연은 이렇다.

고문 기술자 이근안을 만나다

▲ 2008년 이근안을 만난 용두동 소재 동아장 여관 ⓒ 변상철

때는 지난 2008년 2월, 변상철 시민기자는 이근안과 여관방에 마주 앉았다. 서울 동대문구 용두동에 있는 '동아장 여관'이었다. 두 사람이 여기서 만난 건, 이장형 어르신 때문이다. 그는 1984년, 간첩혐의로 체포돼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간첩 조작 사건의 진실을 추적한다. 예나 지금이나 변상철 시민기자가 하는 일이다. 이근안을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다. 변상철 시민기자는 '조사관' 신분으로 이런 일을 했다. 당시 그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원회)에 소속돼 있었다.

이장형 간첩 조작 의혹 사건. 이게 이근안과 얽힌 인연의 시작이었다. 지난 2007년, 이 사건이 변상철 시민기자의 손에 전달됐다. 진실화해위원회가 진실규명이 필요하다고 결정한 지 2년 만이었다. 

긴장하면 손에 땀이 난다. 가슴도 뛴다. 변상철 시민기자도 그랬단다. 이근안과의 첫 만남을 앞두고 초조했단다. 당시 기억을 떠올리며, 변상철 시민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근안에게 연락했다. 다리가 불편하다, 건강이 좋지 않다며, 조사를 거부했다. 출석요구서를 보냈다. 이미 검찰에서 이야기했고, 징역까지 살았던 일이라며, 출석을 거부했다. 이장형 간첩 조작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려면, 이근안을 만나야 했다. 그의 증언이 필요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먼저, 이장형 어르신이 고문을 받았다고 주장을 한다고 했다. 조사에 응하지 않으면, 이대로 피해자의 주장만 갖고 판단 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러면 나중에 불리할 수 있으니 나와서 당시 상황을 설명해달라고 했다. 쉽진 않았으나 그제야 집 근처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정하더라.

약속을 잡고 3일간 잠을 못 잤다. 이근안이 고문 기술자여서가 아니다. 당시 그는 대공수사의 베테랑이었다. 꼼꼼하게 조사를 준비해야 했다. 함께 조사를 맡았던 조사관과 시뮬레이션까지 하고 약속장소로 나갔다."

거긴, 이장형 어르신이 끌려간 곳이 아니었다.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현 경찰청 인권센터)에서 멀었다. 이근안은 자신의 집 근처를 약속장소로 정했다. 서울 지하철 2호선 용두역이었다. 두 사람은 여기서 만나 '동아장 여관'까지 걸었다. 이근안은 "예전에 수사할 때 가끔 빌려 쓰던 곳"이라고 했다. 여기서 있었던 일을 변상철 시민기자는 글로 풀어냈다. 아래 기사가 그거다.

[관련 기사] '멘탈잡' 이근안과 단둘이 식사... 그 기막힌 대화

이근안, 간첩 조작하고 격려금을 받았다?

▲ 1993년 2월 16일 이장형의 석방을 위한 기사 ⓒ 변상철

변상철 시민기자가 기록하지 않은 이야기도 있다. 난 그게 궁금했다.

-이근안이 수사할 때 빌려 썼다는 여관방은 어땠나?
"여관은 당시도 옛날 여관이었다. 아주 구식이었다. 3~4평짜리 방에 TV 한 대만 덩그러니 있었다. 화장실도 없었다. 볼일을 보려면, 방을 나와 복도 끝에 있는 화장실에 가야 했다."

-고문에 의한 간첩 조작을 인정했나?
"이근안은 불법 감금과 고문을 부정하진 않는다. 수사방식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거 같다. 그렇다고 간첩조작에 대해서 인정하는 건 아니다. 그는 이장형 어르신이 간첩이라고 믿고 있었다."

이근안의 믿음에 금이 갔다. 지난 2008년 진실화해위원회는 '이장형 간첩 조작 의혹 사건'에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의혹이 아니라는 거다. 이장형 어르신이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가 67일간 이근안에게 고문을 당한 게 사실이란 거다. 가족을 고문하겠다는 협박에 못 이겨 허위자백을 했다는 거다.

법원도 이근안의 믿음을 깼다. 이장형 어르신의 가족은 진실하해해위원회의 진실규명 결정이 나자 그 길로 법원에 재심을 신청했다. 같은 해 12월,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1부(재판장 이광만 부장판사)는 이장형 어르신의 반공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유신 정권 시절 무기징역 판결이 난 뒤 24년 만이었다.

하지만 이장형 어르신은 재심 법정에 서지 못했다. 그는 억울한 누명을 벗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지난 2006년 12월 췌장암으로 숨진 거다. 15년간의 감옥살이를 한 후였다. '간첩'이란 낙인에, 사람들의 차디찬 시선 속에 살다가 생을 마감한 거다. 

그래서다. 내가 기억하는 말이 있다. 엪에서 나온 [관련 기사]에 등장하는 변상철 시민기자와 이근안의 대화다. 2008년 2월, 여관방에서 있었던 일이다.

"사실 오늘 뵙자고 한 것은 1984년 제주도 이장형 사건 때문입니다."

"이장형, 이장형, 이장형이라...아, 제주도 이장형. 내가 그 사건 실황조사서 잘 썼다고 격려금도 30만 원 받았던 기억이 있어요
."

'멘탈 갑' 이근안을 기억하다

▲ 1999년 1월 구속이 결정된 이근안 전 경감이 성동구치소로 이송되기 전 수원지법 성남지원에서 자신의 심경을 밝히고 있다 ⓒ 연합뉴스

인연은 모르는 법이다. 변상철 시민기자도 이랬다. 이근안과의 재회는 기대도 안 했다. 아니,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해가 바뀌고 다시 만났다. 이번엔 이근안이 찾아왔다.

두 사람은 조사실서 얼굴을 마주했다. 지난 2009년 진실화해위원회의 출석요구에 이근안이 응한 거다. 1979년 일어난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 사건에도 '이근안'이란 이름 석 자가 등장했다. 유신체제에서 발생한 대표적인 공안사건이었다. 

변상철 시민기자는 심문을 맡았다. 이근안과 말을 섞는 거였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던 자리였다. 여기엔 기록하지 않은 뒷이야기가 있다.

"사실, 남민전은 내가 맡은 사건이 아니었다. 이근안을 한 차례 조사했던 덕분(?)에 심문을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고 한 일이었다. 서로 눈에 익은 사람이 만났으니 부드러운 분위기에서 조사가 이뤄졌다.

한 번은 이근안에게 농담 삼아 이런 이야기를 했다. (진실화해)위원회에 오면, 교통비 등 여비를 주니, 앞으로도 출석해달라고. 그랬더니 이근안이 농담을 받아치는 거다. 노는데 밥값이라도 벌어야지 하면서. 그는 요샛말로 '멘탈 갑'인 사람이었다."

'멘탈 갑' 이근안. 이런 소리가 나오자 변상철 시민기자는 기억을 떠올렸다. 이근안과 함께 일한 수사관이 들려준 이야기다.

"한 번은 물고문하는데, 비위가 상해 죽겠더라. 구역질하다가 구토까지 했다. 조사실 문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선배수사관이 따라 나오기에 '형님 나 도저히 비위 상해서 못하겠다'라고 했다. 그런데 이근안이 뛰쳐나와서 '개XX 이런 것도 못 참아'라며 발로 밟았다."

고문 경찰도 '비위가 상하는 고문'. 이런 끔찍한 고문으로 이근안과 남영동 수사관들은 한 사람의 삶을, 한 가족의 인생을, 역사를 조작했다.

지난 2006년 3월,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는 남민전 사건에 연루된 29명을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인정했다. 간첩 행위를 한 게 아니라 유신체제의 권위주의적 통치에 항거했다는 거다. 진실화해위원도 마찬가지다. 이 사건에 대해 국가 사과와 재심을 권고했다.

고문 기술자 이근안의 고백

▲ 덕적도에서 인천으로 나오는 배 안에서 김흥수. 아픈 다리를 이끌고 덕적도를 헤매고 걸었던 그는 여객선의 객실에서 지쳐 누웠다. 그는 배를 타고 세계여행을 다니고 싶어한다. ⓒ 변상철

두 사람의 인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간첩 조작 사건으로 또다시 얽히게 됐다. 세 번째 만남은 다방에서였다. 이번엔 변상철 시민기자가 찾아갔다. 이근안의 자서전 '고문 기술자 이근안의 고백'을 들고서다.

'간첩 김흥수' 어르신은 이근안 패밀리의 작품(?)이었다. 이근안의 고문이 허위자백을 받아낸 거다. 그와 함께한 수사관들은 김흥수 어르신의 부인을 속여 자신의 남편을 '간첩'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조작된 간첩혐의로 김흥수 어르신은 12년간 감옥살이를 했다.

변상철 시민기자는 진실을 추적했다. 이런 기막힌 이야기를 기록하고 세상에 알렸다. 김흥수 어르신의 재심도 도왔다. 이게 납북어부 김흥수 어르신의 사연을 담은 그의 기사다.

[관련 기사] 이근안 '예술'에 절단 난 다리... 늙은 어부의 마지막 소원

난 궁금했다. 변상철 시민기자가 기억하는 이근안을 알고 싶었다. 그래서 물었다.

-직접 만난 이근안 어떤 사람이었나?
"그런 사람이 있다. 소위 스타성이 있는 사람들. 이근안이 그랬다. 그는 '고문 경찰계'의 스타였다. 수많은 고문 수사관들 틈에서도 눈에 띄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다른 수사관들도 그렇게 말했다. 그래서일까? 다른 수사관들은 이근안을 질투했다. 공은 그가 다 가져갔다고 말했다.

이근안은 반대였다. 고문은 함께해놓고 죄는 자신에게만 덮어씌웠다고 했다. 김근태 고문 사건도 다른 수사관은 10여 일 지나도 해결 못 하는 걸, 자신은 이틀 만에 풀어냈다고 했다. 하지만 박처원은 감옥에 안 들어가고 자신만 (감옥에) 들어갔다며 억울한 듯 말했다. 다른 수사관을 욕했다."

-이근안이 고문도 증언했나?
"그와 일한 수사관들은 이렇게 증언했다. 알려 진대로 이근안의 고문기술이 뛰어났다. 듣고 싶은 말만 간결하게 듣는 방법을 알았다. 여기저기 그의 고문기술이 필요한 데가 많아서인지 시간을 끌지 않았다. 그래서 고문할 때, 손가락 하나 정도는 묵지 않았다. 고문을 받다가 용기 있게 고백하고 싶으면 손가락을 움직여 신호를 보낼 수 있게 했다. 질문도 O/X로 선택할 수 있게 물어봤다.

이근안은 이런 말을 했다. 박종철 치사 사건은 고문의 '고'자도 모르는 애들이 한 거라고. 물고문해본 사람은 안다고. 흉부를 압박한 상태서 물고문하면 질식한다고. 그래서 앉아 있는 사람의 목을 꺾어서 물고문하는 게 아니라고. 질식해 숨을 못 쉬게 될 수 있으니. 몸 전체를 거꾸로 매달아야 한다고.

고문 기술을 설명하는 게 다른 수사관과 달랐다. 이러니 고문은 예술이란 소리를 한 게 아닌가 싶다."

여기까지다. 내가 글로 옮길 수 있는 고문 이야기는. 변상철 시민기자는 더 입을 열지 않았다. 나도 묻지 않았다.

서울 한복판에서 이근안을 만나다

▲ 변상철 시민기자는 서울 한복판에서 이근안을 만났다. 그리고 그가 남영동에서 일했던 고문 수사관들과 만나는 것을 목격했다. 그에겐 충격이었다. ⓒ 변상철

지난 6일, 서울 마포구 성산동에서 변상철 시민기자를 만났다. 그가 일하는 시민단체 '지금 여기에'로 찾아갔다. 미리 인터넷 지도 찾기 서비스를 이용하지 않았다면, 헤맬 뻔했다. 반지하 집에서 그는 '간첩 조작 사건'의 진실을 추적하고 있었다.

여기서 들었다. 변상철 시민기자가 아직 기록하지 않은 이근안의 이야기. 지난 2017년 12월. 카메라에 이근안을 담은 이야기를. 그날은 <오마이뉴스>에 납북어부 김흥수 어르신의 간첩 조작 사건을 기사로 풀어낸 뒤였단다. 이근안과의 인연을 기록하고 세상에 알리기 위해 찾았던 현장에서 그를 발견했단다.

"오래전 이근안을 만났던 서울 동대문구 용두동에 갔다. 기사를 쓰다 보니 현장 사진이 필요했다. 놀랍게도 '동아장 여관'이 그대로 있었다. 이근안이 살던 집도, 같이 밥을 먹었던 식당도 그랬다. 그리고 동네를 한 바퀴 돌다가 그를 발견했다.

멀리서 한 노인이 걸어왔다. 낯이 익었다. 내 옆을 스쳐 지나가는데, 이근안이었다. 다시 뛰어가 얼굴을 확인했다. 이근안이 맞았다. 이름을 부를까 말까 고민하다가 사진만 찍었다. 그런데 순간, 궁금했다. 그가 어딜 그렇게 바삐 가는지. 그의 뒤를 따라가 봤다."

이근안의 발길이 도착한 곳은 갈비탕집이었단다. 여기서 변상철 시민기자는 이근안이 누군가를 만나는 걸 목격했다. 아는 얼굴들이었다. 이근안과 함께 남영동에서 일했던 고문 수사관들이었다.

"충격이었다. 그들이 여전히 끼리끼리 뭉치고 있었다.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하겠나. 남들처럼 옛 추억을 나누며, 과거를 회상하겠지. 그런 상상을 하니 끔찍했다. 아직도 간첩 조작 사건으로 고통을 당하는 생존자들이 살아있는데.

한편으론 무섭기도 했다. 역사를 망각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봤으니. 고문 기술자 이근안이 거리를 걸어가는데, 누구 하나 알아보는 사람이 없더라. 악인을 처벌하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악이 왜 일어났는지. 그런 사회가 어떤 구조이고 어떤 시민의식이 있어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됐다."

국가폭력 민낯 파헤치는 진실 추적자

▲ 이근안의 '간첩 조작 사건'을 파헤쳐 진실을 규명한 변상철 시민기자 ⓒ 정대희

난 뜨끔했다. 이 말이 목에 걸렸다.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변상철 시민기자처럼 우연히(?) 길거리에서 이근안을 만난다면, 알아보지 못할 것 같았다. 유신정권 시절 빈번했던 '간첩 조작 사건'도 그랬다. 국가폭력이 횡행했던 시절의 역사를 몰랐다. 지금도 고통을 당하는 피해자들을 기억하지 못했다.

변상철 시민기자는 달랐다. 그는 진실을 추적한다. 간첩 조작 사건을 파헤친다. 국가폭력 피해자를 돕고 재심을 지원한다. 억울한 누명을 벗겨주는 일을 업으로 삼았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다. 그는 이 길을 선택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활동을 종료하면서 국가보안법 위반 신청 건수를 세어보니 6000건이었다. 이 중 150건에 대해서만 진실규명 결정이 났다. 내가 끝마치지 못한 것도 4건이나 됐다. 이대로 손을 털 수 없었다.

진실을 규명해야 했다.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고통을 당하는 이들이 많았다.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이런저런 고민 끝에 <지금 여기에>를 창립했다. 국가폭력 피해자들을 돕고, 재심을 지원하기 위해서다.

시작할 때 4건이었던 사건이 3년 만에 40건으로 불어났다. 고구마 줄기 올라오듯이 늘었다. 알음알음 알아서 연락이 닿은 게 이 정도다. 숨어있는 피해자들이 더 많다. 밖으로 나오지 못하거나 안 하고 있을 뿐이다. 이게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이들을 돕고 싶다."

여기 진실 추적자가 있다. 국가폭력 피해자를 위해 카메라와 취재 수첩을 든 사람이다. 변상철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다. 그가 지치지 않도록 연재기사 '국가폭력-인권을 먹다'에 독자들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린다.

▲ 지난 6일, 서울 마포구 성산동에 있는 변상철 시민기자의 사무실을 찾았다. 반지하 집에서 그는 '간접 조작 사건'의 진실을 추적하고 있었다. ? ⓒ 정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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