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새소식 [리포트] 이끼 낀 돌부리가 조선인의 묘? 참담했다

10만인 리포트

전국 일주, 지역이 희망이다

"내가 본 군함도, 그곳은 지옥의 섬이었다"
[강제징용 노동자상을 세우자③] 구연철 할아버지가 겪은 군함도

18.02.05 14:47 | 정민규 기자쪽지보내기

오마이뉴스 10만인클럽과 적폐청산 사회대개혁 부산운동본부 강제징용노동자상 건립 특별위원회가 일제 강제징용 사실을 널리 알리고 피해자들의 넋을 기리고자 집중 취재합니다. 기획 <강제징용 노동자상을 세우자>에 애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강제징용 노동자상 건립에 참여하고자 하시는 애독자 여러분은 부산소녀상 옆 노동자상(https://www.facebook.com/iljenodong/)을 클릭해 주세요. [편집자말]
식민지 조선인의 한 많은 삶이 서려 있는 작은 섬 '군함도'를 일본은 산업혁명의 유산이라며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올렸다. 반면 조선인 강제징용과 노동은 애써 부인하는 데 급급하다. 이 기사는 군함도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구연철(88)씨와의 30일 인터뷰를 구씨 1인칭 시점으로 재구성한 글이다. <기자 주>

▲ 군함도. ⓒ 위키커먼스

여든여덟인 내가 소학교 다니는 때니까 벌써 80년 전 이야기다. 하지만 그곳에서의 기억은 세월이 흘렀어도 또렷하다. 도저히 잊어버릴 수 없는 기억, 그 출발은 내가 소학교 1학년생이었던 9살에서 시작한다. 이 이야기는 내가 겪은 군함도 6년의 기록이다. 

아버지는 내가 훨씬 어릴 때부터 홀로 일본에서 탄광 노동자로 일했다. 그 사이 일제의 공출은 더욱 심해졌다. 할머니와 어머니, 동생을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오라는 연락을 받고 나가사키행 배에 몸을 실었다.

어렸지만 그나마 소학교에서 일본어를 배운 내가 가족을 이끌었다. 주소 하나 들고 찾은 섬 '하시마'(端島). 망망대해에 마치 군함처럼 떠 있는 바위섬을 우리말로 '군함도'라 불렀다. 높은 방파제가 성벽처럼 섬을 휘어 감고 있었다. 이상한 섬이었다. 오직 하나의 문으로만 드나들 수 있는 섬은 요새 같았다. 섬 안으로 들어가는 문에 '영광의 문'이란 문구가 써 있었다.

섬 밑으로는 개미굴 같은 탄광이 빼곡했다. 개미처럼 굴로 기어 들어가 탄을 캐내는 일이 아버지의 일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버지가 강제징용이 이루어지기 전 자발적으로 섬에 들어 왔다는 거였다. 우리 가족은 사택도 받았다. 나는 섬 안에 있는 소학교를 이어서 다녔다. 우리 가족의 삶은 그래도 비교적 괜찮은 편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지 않다는 걸 나는 뒤늦게 알았다.

콩깻묵으로 버티며 매질 견뎌낸 조선인들

▲ 어린시절 가족과 함께 군함도에서 6년을 생활한 구연철(88)씨가 30일 <오마이뉴스>와 만났다. 구씨는 부산 일본영사관 앞에 일제강제징용노동자상이 만들어져야한다고 강조했다. ⓒ 정민규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시작하면서 섬은 점차 '지옥의 섬'으로 바뀌어 갔다. 어디선가 끌려온 사람들이 지하의 좁은 방에서 살았다. 돼지우리 같은 곳이었다. 콩기름을 짜고 남은 콩깻묵을 먹고 고된 노동에 시달렸다.

그나마 괜찮았던 우리 가족의 삶도 나빠졌다. 식량이 부족하자 콩깻묵을 배급받았다. 만주에서 열차로 실어 왔다는 콩깻묵은 운반 과정 중 이미 상당 부분이 썩어 있었다. 그나마 먹을 만한 걸 덜어내 먹어도 설사를 하기 일쑤였다. 그걸 먹고 고된 노동을 버티기는 힘들어 보였다.

등교하기 위해 그 앞을 지날 때면 매일같이 매 맞는 사람을 봤다. 콘크리트 바닥에 엎드린 사람에게 마구 매질을 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니 힘을 내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래서 맞는 거라고 했다. 그들에 대한 처우가 동물보다도 못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학교를 다녀올 때면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우리 집에 모여 있었다. 그나마 가족과 함께 살고 있는 우리 집에 먹을 걸 얻으러 왔다고 했다. 매 맞는 모습을 봤던 아저씨들도 그 무리에 섞여 있었다. 익숙한 말, 그들이 나와 같은 조선인임을 알았다.

연령은 다양했다. 20~40대쯤으로 보였다. 어떤 아저씨는 자신의 고향이 충청도라고 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끌려와 보니 여기였다고 또 어떤 아저씨가 이야기했다. 전쟁이 끝나가자 하루가 멀다고 공습 사이렌이 울렸다. 아버지는 나에게 가족을 데리고 섬을 빠져나가라고 일러줬다. 며칠 뒤 나가사키에서 큰일이 벌어졌다고 했다. 원폭 투하였다.

그렇게 전쟁은 갑작스럽게 끝났다. 그곳에 있던 많은 사람이 어디로 갔는지는 소문만 돌았다. 원자폭탄이 떨구어진 곳을 복구하는데 조선인들을 투입했다는 소문도 돌았다. 나는 가족과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다른 이들도 그럴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이게 내가 직접 본 지옥의 섬에 대한 기억이다.

강제징용과 강제노동 없었다고?

▲ 부산 일본총영사관 앞 일제 강제징용노동자상 건립이 추진된다. 지난해 9월 18일 부산 일본총영사관 앞에서 열린 건립 계획 발표 기자회견에 참석한 구연철(88)씨가 강제징용노동자상 모형을 만지고 있다. 구씨는 일제강점기 군함도로 불린 하시마섬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 정민규

누군가는 군함도에서 조선인에 대한 강제 징용과 강제 노동은 없었다고 말한다. 80년의 세월이 흘러도 또렷하게 기억나는 그곳의 그들은 누구란 말인가. 돼지우리 같은 곳에서 짐승처럼 취급받으며 일하던 그 조선인들은 그럼 뭐란 말인가.

동시에 어떤 이들은 우리에게 망각을 강요한다. 내가 사라지면 먼 훗날 그런 일은 없었다고 말할지 모른다. 아흔이 가까운 내가 사람들은 만나 그곳에서의 일을 증언하고 언론에 알리는 것은 그들의 그런 시도를 조금이라도 막기 위함이다.

지난해 나는 직접 군함도를 찾았다. 군함도에서 살았던 조선인이 온다는 소식에 모인 일본의 언론인도 만났다. 나는 내가 겪은 군함도를 이야기하며 이 섬을 세계문화유산이라고 말하는 일본의 주장을 '국제 사기극'이라고 맞받았쳤다. 일본 언론인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망각을 바라는 이들에 대한 복수는 기억이다. 내가 사는 부산에서 일제 강제징용노동자상을 세우는 것도 역사를 부정하는 집단에 대한 경고이다. 일본영사관 앞에 당당히 강제징용노동자상이 세워지기를 나는 바란다. 나 역시 후원에 동참했다. 내가 없어진 세상에서도 동상이 후대에게 내가 겪은 역사가 진실이란 걸 알려주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5월 1일 부산 일본영사관 앞에 강제징용노동자상을 세울 것이다. 그날을 나는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강제징용 노동자상 세우자' 모금운동 참여하기
오마이뉴스 10만인클럽과 적폐청산 사회대개혁 부산운동본부 강제징용노동자상 건립 특별위원회가 강제징용 노동자상 건립 운동을 합니다. 모금에 참여하고픈 시민들은 부산소녀상 옆 노동자상을 클릭해주세요. 1만 원 이상 모금에 참여하시는 시민은 인명판에 이름을 새겨드립니다. 단체는 10만 원 이상인 경우 인명판에 이름을 새겨드립니다. 애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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