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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공화국의 민낯

'오르락내리락' 강남은 울퉁불퉁하다
[강남공화국의 민낯21] 기술력 한계·자본력 제약으로 미비하게 진행된 평탄화 공사

17.12.02 20:20 | 글:전상봉쪽지보내기|편집:김도균쪽지보내기

강남은 폭 50~70m의 간선도로를 축으로 개발됐다. 논밭이 펼쳐진 허허벌판에 종과 횡으로 놓인 간선도로는 강남을 격자형으로 구획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강남의 이면도로와 골목길까지 바둑판과 같이 네모반듯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대로(간선도로)에서 안쪽으로 한 블록만 들어가 보면 전혀 딴판인 이면도로와 골목길을 만나게 된다.

"어느 날 약속이 있어 테헤란로의 어느 빌딩에 있는 친구의 사무실을 찾아가는 중이었다. … 내 앞에 펼쳐진 것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강북중의 강북, 성북구하고도 택시도 잘 안 가는 정릉동의 그 꼬불꼬불한 골목길을 그대로 재현한 듯한 미로형 도로였다. 이런 도로에서 몇 번의 좌우회전을 하다 보면,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 황두진, <당신의 서울은 어디입니까?>, 111~114쪽

▲ 강남은 구룡산, 대모산, 우면산이 뻗어 내린 구릉지대에 50~70m의 간선도로를 축으로 격자형으로 구획됐다. 다음 지도를 캡쳐했다. ⓒ 다음 지도

강남은 구룡산, 대모산, 우면산이 뻗어 내린 구릉 지대에 조성됐다. 영동토지구획사업이 추진된 1970년대 초반 기술력의 한계와 자본력의 제약으로 강남의 평탄화 공사는 미비하게 진행됐다. 그 결과 강남의 간선도로와 골목길을 걷다 보면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을 자주 만나게 된다.

강남의 울퉁불퉁한 지형은 마치 불평등한 대한민국의 현실을 보여주는 듯하다. 강남에는 부자도 많지만 가난한 사람도 적지 않다. 대로변에는 높고 번듯한 건물이 즐비하지만, 그 뒤편에는 술집이 번창하고, 유흥업소 종사자들이 즐겨 찾는 세탁소 또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대한민국 최고의 번화가, 테헤란로

테헤란로는 강남을 동서로 가로지른다. 강남역사거리에서 삼성교에 이르는 테헤란로는 약 4㎞의 왕복 10차선 도로다. 서울시는 1972년 11월 26일 한양 천도 578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국기원에서 삼성교에 이르는 구간을 삼릉로(三陵路)라 명명했다. 강남구 삼성동에 위치한 선릉과 정릉에 3개의 능침(陵寢)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삼릉로가 테헤란로로 이름이 바뀐 건 1977년 6월 17일 방한한 테헤란시장과 서울시장이 자매결연을 맺으면서다.

▲ 삼릉로라 불렸던 테헤란로는 1977년 6월 17일 방한한 골람 레자 닉페이 테헤란시장과 구자춘 서울시장이 자매 결연을 맺으면서 테헤란로로 이름이 바뀌었다. ⓒ 전상봉

198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테헤란로 주변은 오가는 사람도 적고, 건물도 드문 황량한 곳이었다. 테헤란로가 변화하기 시작한 건 1984년 지하철 2호선이 개통되면서다. 테헤란로 지하를 관통하는 지하철 2호선이 개통하자 강북 도심에 있던 기업들이 하나둘 강남으로 이전하기 시작했다. 1984년 의류 수출기업인 신성통상이 12층 건물을 지어 이전했고 한일시멘트는 18층 사옥을 신축했다.

서울올림픽을 유치하면서 테헤란로 주변 개발은 눈에 띄게 활발해졌다. 1988년 9월 7일 한국종합무역센터가 삼성동에 건설됐다. 무역센터의 부속 건물인 트레이드타워(55층)는 준공 당시 63빌딩 다음으로 높은 건물이었다. 남북고위급회담(1991)에 참석한 북한 대표단이 숙소로 사용한 그랜드인터콘티넨탈호텔이 개관한 것도 이 무렵이다.

테헤란로는 1990년대 들어 경제·금융가로 탈바꿈했다. 경제·금융 중심지로 테헤란로를 육성한다는 정부의 방침에 따라 포스코센터가 건설됐고, 한양금고 등 금융사가 둥지를 틀었다. 1997년 발생한 외환위기는 테헤란로를 벤처기업과 IT(정보통신)산업의 요람으로 변모하게 만들었다. 김대중 정부하에서 벤처기업특별법이 제정되어 벤처기업과 IT기업에 대한 지원 정책이 시행되자 관련 업체가 테헤란로로 몰려들었다. 한글과컴퓨터(한컴)와 안철수연구소(안랩) 등 '닷컴신화'를 쓴 기업들이 2000년을 전후하여 테헤란로 주변에 자리를 잡았다.

2000년대 들어 테헤란로의 풍경은 다시 한번 바뀐다. 스타타워(강남파이낸스센터)를 필두로 GS강남타워, 동부금융센터, 현대산업개발 사옥, 메리츠타워, 현대모비스빌딩 등이 2000년대 들어 신축됐다. 고층 빌딩이 들어서자 대기업, 금융기업, 외국계 회사가 테헤란로로 몰려들었다. 이런 가운데 탓컴버블이 붕괴하자 IT업체들은 구로디지털단지와 판교테크노밸리 등지로 떠났다.

1980년대만 하더라도 공터를 쉽게 찾아볼 수 있었던 테헤란로는 1990년대 이래 한국 최고의 번화가로 변모했다. 테헤란로는 금융가에서 IT산업의 요람으로, 한국 경제를 상징하는 오피스타운으로 거듭났다. 테헤란로의 서쪽 끝인 강남역 인근의 삼성타운으로부터 테헤란로의 동쪽 끝에 위치한 삼성역 부근의 한전 부지를 현대자동차그룹이 매입한 사실이 테헤란로의 경제적 상징성을 보여준다.

그뿐만 아니라 테헤란로는 여성 혐오 살인 사건의 현장이다. 2016년 5월 17일 오전 1시 7분께 강남역 근처 노래방 화장실에서 23세의 여성이 살해됐다. 범인 김아무개씨는 단순히 여성이라는 이유로 피해자를 식칼로 수차례 찔러 살해했다. 여성을 상대로 자행한 묻지마 살인 사건은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우리 사회의 혐오와 폭력성을 여과 없이 드러내 보였다. 사건이 발생하자 분노한 시민들은 강남역 10번 출구에 피해자를 추모하는 글을 남기고, 여성 혐오를 질타하는 집회를 열었다.

▲ 서울여성재단 2층 성평등도서관 '여기' 기억의 존에는 강남역 10번 출구에 시민들이 붙였던 추모의 포스트잇이 전시되고 있다. ⓒ 전상봉

강남과 세대

강남은 부동산 투기의 진원지이다. 강남개발이 시작된 1960년대 말 이후 부동산 투기붐은 10년 주기로 일어났다. 영동개발이 시작될 무렵 일어난 말죽거리 신화(1968)는 부동산 투기붐의 서막이었다. 그 뒤 1978년 오일쇼크에 이은 부동산 투기붐, 1980년대 말 3저 호황과 함께 불어 닥친 부동산 투기붐, 그리고 2000년대 초중반의 부동산 투기붐에 이르기까지 부동산값 폭등은 10년 주기로 일어났다.

대규모 아파트 단지의 건설 또한 부동산 투기붐과 동전의 양면처럼 10년 단위로 계획됐다. 1970년대 중후반 강남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지어졌고, 1980년대 경기도 과천과 양천구 목동, 노원구 상계동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건설됐다. 1990년대가 되자 분당, 일산 등 수도권에 신도시가 새롭게 조성됐다.

대규모 아파트 단지들이 건설되면서 부동산 투기의 양상이 변화했다. 강남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건설되자 부동산 투기의 대상이 땅에서 아파트로 옮겨갔다. 신축 아파트를 중심으로 일었던 부동산 투기붐은 2000년대가 되자 아파트 재개발 투기로 그 양상이 바뀌었다.

말죽거리 신화 이후 10년 주기로 일어난 투기붐과 대규모 아파트 단지 건설은 신분 상승을 위한 욕망의 통로였다. <아파트 게임>의 저자 박해천은 이 같은 강남발 욕망의 순환구조를 '배제와 선택의 분배 시스템'이었다고 진단한다.

"1940년대에 태어난 소위 '강남 1세대'들이 자산을 증식해나가는 과정을 들여다보면, 표준적인 모델이 있다. 그때는 자연스레 평형대를 늘려갈 수 있었다. 당시 강남에 아파트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지어진 게 아니라, 10년에 걸쳐서 지어졌다는 점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처음 강남에 진입해서 평당 가격이 30만 원대인 아파트를 샀다고 치자. 1년 정도 지나면 가격이 두 배로 오른다. 그런데 옆 동네에서 새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다. 평형대는 넓은데, 평당 분양가는 여전히 30만 원대다. 그러면 이전 아파트를 팔고 넓은 아파트로 이사한다." - 박해천 인터뷰, "아파트로 중산층 되던 시절 지났다", <미디어오늘> 2012년 7월 12일

강남 1세대인 1940년대생들은 이 같은 투자를 통해 강남에 안착했다. 50년대생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한 1980년대에는 강남을 비롯하여 양천구 목동과 노원구 상계동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지어졌다. 그리고 60년대생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할 무렵인 1990년대 초반에는 수도권에 1기 신도시가 건설됐다.

대규모 아파트 단지의 건설을 매개로 한 이 같은 시스템은 1990년대 중반까지 큰 문제 없이 굴러갔다. 그러나 외환위기가 발생하면서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는 시스템이 됐다. 노동 유연화에 따라 비정규직이 양산되고, 실업률이 가파르게 상승하면서 임금 소득으로 아파트를 장만하기 어려워진 현실에 직면한 것이다.

서민들의 '내 집 마련의 꿈'은 말 그대로 꿈같은 시대가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박근혜 정부는 경기 부양을 이유로 가계 대출을 남발하여 가계부채 총액이 1439조 원(2017년 6월 말 기준)에 이르는 부채 공화국을 만들어 놓았다. 눈여겨볼 것은 가계부채 총액의 65.2%(938조 원)가 주택담보 대출이라는 사실이다.

테남과 테북

테헤란로는 강남의 동서를 가로지르는 동시에 남북을 나눈다. 흔히 테헤란로의 북쪽은 '테북', 테헤란론의 남쪽은 '테남'이라 불린다. 압구정동, 청담동, 신사동 등이 위치한 테북에는 대를 잇는 부자들이 많이 살고, 대치동, 역삼동, 도곡동, 개포동 등이 자리 잡은 테남에는 전문직 종사자들이 많다.

테북을 대표하는 압구정 현대아파트와 테남에 위치한 대치동 은마아파트는 첫 입주민의 계층부터 달랐다. 1976년 입주를 시작한 압구정 현대아파트는 상류층을 겨냥한 40~60평형대 아파트가 다수였다. 당시 대형 아파트를 분양받을 수 있던 사람들은 사업가, 고위 관료, 국회의원 등 상류층이었다. 반면 1979년 입주를 시작한 대치동 은마아파트는 무주택 서민을 위한 30평형대가 대부분이었다.

▲ 1976년 입주를 시작한 압구정 현대아파트는 상류층을 겨냥한 40~60평형대 아파트가 다수였다. ⓒ 전상봉

▲ 1979년 입주를 시작한 대치동 은마아파트는 무주택 서민을 위한 30평형대가 대부분이었다. ⓒ 전상봉

테헤란로를 경계로 형성된 강남의 신분 지형은 사교육 시장과 소비문화에도 그대로 투영된다. 아파트와 고급빌라가 위치한 테북에서는 과외를 선호하는 경향이 강하고, 아파트 단지가 밀집한 테남에는 학원가가 번창한다.

테북에 비해 테남은 교육열이 높다. 부자들이 많은 테북의 부모들은 자식이 공부를 못하면 사업을 가르친다. 반면 상대적으로 물려줄 재산이 많지 않은 테남의 부모들은 자식을 명문대학에 보내기 위해 열중한다. 테남과 테북의 소비형태 또한 차이가 있다. 명품의 주된 소비층은 주로 테북에 거주한다. 명품 백화점으로 유명한 현대백화점 압구정점과 무역센터점, 그리고 갤러리아백화점 압구정점이 모두 테북에 있는 현실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전상봉 시민기자는 서울시민연대 대표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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