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새소식 [리포트] 조물주 위에 건물주, 이 공식이 성립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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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호진 시인의 삶이 아름다운 당신

"문화운동을 도구로 여긴 민노총
노동현장 떠난 것은 바로 그 때문"
[조호진 시인의 삶이 아름다운 당신] 풍물공동체 '터울림' 홍성민 대표

17.03.20 15:38 | 글:조호진쪽지보내기|편집:김대홍쪽지보내기

▲ 시민풍물부대가 깃발을 앞세우고 행진하고 있다 ⓒ 홍성민

"덩더궁 덩더궁 덩기덩기 덩더궁~"
"박근혜는 퇴진하라! 박근혜를 구속하라!"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다. 나라엔 국정농단이 벌어졌고 광화문 광장과 청와대 방면 등 거리에선 난리 굿판이 벌어졌다. 싸움은 무대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거리에서 하는 것, 공연이 끝난 뒤 행진에 나선 촛불 시민들은 풍물패의 자진모리 휘모리장단에 "얼쑤, 잘한다!" 추임새를 넣어도 보고 풍물패가 이끈 대동놀이에 달떠서 원을 그리며 한참 놀았다, 아주 잘들 놀면서 새로운 나라로 이끄는 길굿의 뜨거움을 맛봤다. 아, 싸움이든 놀이든 이런 뜨거운 소리가 필요했다. 그런데, 각자 흩어지고 패배하면서 소리도 놀이도 잊어버리고 살았던 것이다.

풍물공동체 '터울림'의 홍성민(50) 대표는 전국의 풍물패들과 함께 광화문 광장을 달궜다. '새로운 나라로 가는 길굿'을 벌이고, '자진뱃노래', '쾌지나 칭칭 나네', '아리랑' 등을 부르며 우리들의 핏속에서 숨죽였던 뜨거운 피들이 광장에 콸콸 쏟아져 흘렀다. 수백, 수천만의 피가 거꾸로 솟구쳐 파도를 탔고, 함성을 질렀고, 춤을 추면서 한바탕 놀았다. 그냥 논 것은 아니다. 오만한 권력을 끌어내리고 부패한 자본가들을 구속시켰다. 검찰이 수사하고 헌법재판소가 심판했지만 이런 결과를 가져온 주역은 촛불 광장의 시민들이다. 시민이 권력이고 헌법인 것을 입증했다. 

우리들은 패배하고, 흩어지고, 좌절하던 시민이었다. 그런데 촛불 광장에서 우리는 우리를 만났다. 우리들은 여전히 뜨거웠고, 우리들의 희망은 푸르렀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는 열망은 식지 않았다. 그 힘은 무엇일까. 권력에 주눅 들고 자본에 우롱 당하던 우리가 이들을 무릎 꿇게 할 수 있었던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 그 힘은 신명이다. 한 줌의 모래에 지나지 않았던 우리들이 거악을 삼킨 해일이 되게 한 힘은 신명이다. 풍물패의 신명과 함께 한바탕 잘 놀았더니 피가 제대로 돌기 시작했다.

시대의 현장을 지키면서 해원(解冤)의 북을 쳤던 홍성민!
문화운동 판에선 '큰언니', 은평에선 '문화예술계의 대모'


▲ 풍물공동체 '터울림' 홍성민 대표 ⓒ 이지상

▲ 판화가 오윤의 '북춤' ⓒ 터울림

지난 7일 홍성민 대표를 만났다. 그가 건넨 터울림 명함엔 판화가 오윤의 북춤이 새겨졌다. 농민복 차림의 사내가 북을 내리치는 목판화, 목판이 아닌 심장에 칼을 댄 것 같은 오윤의 민중 판화가 아직 살아 있었구나.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살았는데, 민중의 한과 신명을 시장에 넘기고 말았는데 그녀는 창립된 지 32년이 된 터울림을 오롯이 지켰던 것이다. 터울림만 지킨 게 아니라 시대의 아픈 현장을 지키면서 해원(解冤)의 북을 쳤던 그녀는  문화운동 판에선 '큰언니', 터울림의 거점인 은평에선 '은평 문화예술계의 대모'로 불린다.

그녀는 고통스런 현장에 있었다. 용산참사 현장인 남일당 망루, 백남기 농민 장례식 영결식장,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 촉구 집회장, 유성기업 한광호 열사 영결식장 등지에서 터울림의 북소리는 어김없이 울려 퍼졌다. 권력과 자본에 의해 불에 타 죽고, 물 대포에 쓰러지고, 맹골수도에서 대참사를 당하고, 노조 파괴에 맞서 싸우다 목숨을 끊은 사람들의 한을 달래고 위로했다.

▲ 지난 4일 한광호 열사 장례식에 참여한 터울림. ⓒ 홍성민

"오늘은 죽은 이가 그토록 살고 싶었던 내일입니다. 오늘을 마음껏 누리세요!"

홍 대표의 좌우명에 해당되는 글이다. 이는 미국의 사상가이자 시인인 '랄프 왈도 에머슨'의 어록으로 알려졌는데 자칫 상투적으로 들릴 수 있는 말이다. 하도 좋은 말들이 떠돌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의 삶을 들어보면서 이 말이 얼마나 절절한지…. 그는 수많은 죽음의 현장에 있었다. 최류탄과 페포포그와 백골단의 곤봉과 경찰의 폭력 속에 죽어간 연세대 이한열, 백골단에 맞아죽은 명지대 강경대, 성균관대 김귀정… 그리고 노동자들의 분신과 투신 등의 참혹함 속에서 장례와 노제를 치렀다.

"80~90년대 수많은 죽음이 있었다. 수많은 장례를 치르면서 눈물이 말라버렸는지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런 내가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고민하는데 한 선배가 '너에게 문제가 있는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당시에는 슬퍼할 겨를조차 없었다. 개인의 슬픔보다는 싸움이 더 시급했다. 시신을 탈취하려는 경찰과 싸워야 했고 최류탄 속에서 노제를 치러야 했다. 죽음에 대한 슬픔조차 갖지 못하게 만든 비극의 시대였다."

가장 아쉽게 떠나보낸 이는 이소선 어머니라고 했다.

"이소선 어머니를 아름답게 보내드리고 싶어서 제대로 된 상여를 만들고 만가 소리꾼을 섭외하고, 풍물패를 모으고, 춤을 준비했다. 그런데 유족들이 종교 문제로 이를 반대해 풍물패만 참여한 가운데 청계천 전태일 다리에서 노제를 지냈다. 그런데 노제가 끝나고 어머니가 장지로 떠나는데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쏟아졌다. 그 눈물은 어머니를 떠나보내는 아쉬움과 미안함 그리고, 수많은 죽음에게 흘리지 못했던 눈물과 아픔이 주마등처럼 스치면서 한꺼번에 터진 눈물이었다."

30년 문화운동을 한 대가로 정부로부터 받은 것은 훈장이나 상 따위가 아니라 블랙리스트다. 그가 걸어온 길은 평평한 길이 아니다. 가시밭길이다. 그에게 블랙리스트는 훈장보다 값진 영예일지도 모른다. 그는 30년 외길을 걸어온 것은 이런 풍물 정신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자로 '풍물'은 바람 '풍'(風)에 물건 '물'(物)자다. 풍물의 정신은 억울하게 죽은 희생자들을 새로운 삶으로 살려내고, 액운들을 씻어내는 것이다. 삶과 운동의 관점에서 풍물의 중요한 함의는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면서 미래의 희망을 만드는 것이다. 광화문에서 풍물을 치면서 외친 것은 탄핵만이 아니다. 그것은 시민에 의한 직접 민주주의와 적폐 청산을 통해 새로운 세상으로 가는 것이다. 새로운 세상이란 일하는 사람들이 건강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이다. 그런 세상이 꼭 와야 한다."

민주노총의 패인은 이기주의 노선, 권력과 자본의 협공 때문만은 아니야!

▲ 1991년 터울림 공연 당시의 홍성민. ⓒ 홍성민

고등학생 때까지는 끼도 별로 없고 잘 노는 편도 아니었다. 집과 학교를 오가며 공부밖에 몰랐던 그가 돌변한 것은 시대의 광풍 때문이었다. 86년 대학에 입학해 탈춤반에 들어간 그는 동아리 세미나에서 광주학살의 참상이 담긴 자료집을 보면서 뒤집어졌다. 선생에게 혼날까봐 빵집도 한 번 가지 못할 정도로 소심했던 그는 가두시위에 참여해 스크럼을 짜고 전두환 정권타도를 외쳤다. 그는 학교가 아닌 거리에서 진실을 배웠고 강의실이 아닌 동아리 방에서 인간다운 삶을 고민했다. 그 시절 대학생의 고민은 스펙 쌓기와 취업이 아니었다.

1989년 대학 졸업을 앞두고 터울림과 인연을 맺은 그는 서울지역노동자문화예술위원회 소속으로 활동하면서 구로공단과 울산 등 전국의 노동 현장을 다녔다. 민주노조 지원활동을 하면서 집체극 노래판굿 꽃다지 제작에도 참여했다.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의 꽃은 문화선전대 즉, 풍물패였다. 풍물패들은 시위 현장과 파업 현장의 불꽃이었다. 하지만 풍물패의 역할은 거기까지였다. 노동해방의 시대가 지나고 노동운동이 제도권에 편입되면서 노조들은 풍물패를 크게 필요로 하지 않았다. 문화운동으로 노동운동과 연대했던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전노협과 민주노총을 건설하기까지 문화운동과 노동운동은 한 배였다. 문화운동의 역할은 단순히 선동만 하는 게 아니라 민중의 삶에 희망을 주고 비전을 주면서 운동에 생명력을 부어주는 것인데 민주노총은 이를 간과했다.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의 삶과 정신을 쥐락펴락하기 위해 문화예술사업에 아낌없이 투자하는데 노동운동권은 문화운동을 선전선동에 필요한 도구 정도로 여겼다. 배고픔을 참으면서 헌신하던 문화운동가들이 노동운동 현장을 떠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래서 민주노총은 자본가와의 싸움에서 졌다. 진보 성향의 시민들도 '민주노총, 너희들 졌어!'라고 판정하고 있다. 민주노총의 패인은 자본가와 권력의 협공 때문만은 아니다. 천민자본주의가 놓은 욕망의 덫에 걸려든 노조는 권력화 됐고, 고연봉 노동자들은 사회 정의와 약자와의 연대보다 자기 잇속부터 챙겼다. 민주노총 지도부였던 한 활동가는 기자에게 조합원들에게 성과금의 일부라도 비정규직과 나누고 해고자의 생활비를 챙겨주자고 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고 말했다. 동지애, 이 아름답고 뜨거운 단어가 사라진 비루한 시대의 노동자들은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민주노총 중심축인 대기업 노동자들은 여전히 선명한 투쟁 구호를 내세운다. 실은 제 밥그릇 지키거나 더 채우기 위해 그럴싸한 구호를 내세우는 경우가 적지 않다. 비정규직 등 사회적 약자를 외면한 채 자기들 배만 채우려는 노동자, 고난의 시기를 함께 헤쳐 온 문화운동을 선전도구로 여겼다는 비판을 사고 있는 민주노총, 그들의 패인은 아무리 곱씹어 봐도 자충수다. '자본가의 승리가 아니라 너희들의 이기주의 노선이 패배의 원인'이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도처에서 들린다.

은평누리축제 집행위원장 7년, 관주도 축제를 주민주도 축제로 바꾸다

▲ 2016년 은평누리축제 포스터 ⓒ 은평구

과거 운동을 경험했든 진보적 입장이든 할 것 없이 문화 소비형태는 대개 비슷하다. 정치적 입장과 삶의 방향이 보수층과 다를지라도 자본의 향락 문화에 함몰되긴 마찬가지다. 그래서 광장의 뜨거운 기억을 이내 잊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동운동이 문화운동을 선전선동의 도구로 여긴 것처럼 광장의 시민들도 광장의 싸움을 옛사랑의 그림자 정도로 여기지 않을까 싶어서 "풍물공동체의 전망이 밝지만은 않을 것 같다"고 물었다. 그러자 홍성민 대표는 이렇게 답했다. 

"시대의 변화에 의해 풍물의 운동성과 투쟁 현장성이 줄면서 예전보다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풍물은 운동과 투쟁 현장보다 우리 삶의 현장에서 더 오래 향유됐다. 희로애락과 생로병사의 우리 인생 옆에 늘 있었기 때문에 풍물은 특별히 배우지 않아도 누릴 수 있는 문화였다. 풍물은 공동체를 회복하는데 매우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잠재됐던 신명들을 광화문에서 되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풍물의 역할은 여전히 유효하다. 특히, 마을공동체를 복원하는데 크게 기여할 것이다. 나는 은평에서 그 가능성을 확인하고 있다."

대다수 관주도 축제는 공무원을 위시해서 지역 정치인과 토호들이 헤게모니를 틀어쥔다. 축제를 하청 받은 기획사들이 연예인을 데려와서 무대를 꾸미면 정치인은 그곳을 선전의 도구로 삼고 완장을 찬 토호들은 거들먹거린다. 주민들은 들러리 혹은 구경꾼에 불과하다. 그런데 주민주도형 축제인 '은평누리축제'는 지역의 문화예술 전문가와 주민들로 구성된 추진위원회가 기획하고 추진한다. 은평구는 예산을 대고 행정에 대한 협조를 한다. 지역 주민이 주도하는 동네 축제는 은평구가 유일하다고 한다.

초기에는 공무원과 구의원들의 방해로 어려움이 많았다. 그 어려움은 민주당 소속 구청장(김우영)이 선출되면서 해소되기 시작했다. 구청장의 협치 의지와 지역 문화활동가, 시민사회의 헌신 그리고, 주민들의 참여 등이 삼위일체가 되면서 관주도 축제는 주민주도 축제로 탈바꿈했다. 축제 예산은 고스란히 주민들의 몫이 됐고, 지역의 문화 역량은 한껏 성장했고, 모두들 참여의 기쁨과 감동을 맛보았다. 은평누리축제는 서울시 문화예술축제 평가에서 2013년과 2014년 연속 최우수 축제로 평가받았다.

▲ 홍성민 대표는 "문화가 지역을 바꾸고 세상을 바꿀 것"이라고 믿는다. ⓒ 이지상

동네 문화권력이 교체되는 사건이 그냥 벌어졌겠는가. 동네 사람들의 신명이 되살아나는 축제가 그냥 만들어졌겠는가. 홍성민 대표는 2010년부터 7년 동안 무보수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지역 문화공동체를 세우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기획사와 기득권 세력은 문화 권력을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그 싸움에서 그는 문화운동가의 도덕성과 정당성을 보여주기 위해 한 푼도 받지 않고 몸을 던졌다. 미련하고 미친 짓이었다. 하지만 그의 희생 덕분에 지역의 문화판이 재편됐다. 하지만 끝난 것은 아니다. 그는 은평누리축제의 과제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주민주도 축제가 관주도 축제로 역행하는 일은 쉽게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건 주민 스스로 주인공이 되어 축제를 만들면서 감동을 맛보고 자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은평누리축제가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선 지역문화 생태계를 선순환 구조로 바꿔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문화정책과 사업에 예산을 투입해야하는데 여전히 행사성 예산에 치중하고 있다. 문화민주주의를 성장시키기 위해선 문화정책 사업에 대한 투자를 더 늘려야 한다. 그래야 토대를 단단하게 구축할 수 있다."

그는 한우물만 팠다. 동지들도 환호하던 대중들도 떠났다. 아무리 파고 파도 물이 나오지 않자 삽을 버리고 떠났다. 척박한 땅인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는 떠나지도 않았고 삽을 버리지도 않았다. 그는 "내가 선택한 길을 패배라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가난하고 고달팠을 것인데도 30년 문화운동가의 외길 인생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녀는 문화가 지역을 바꾸고 세상을 바꿀 것이라고 굳세게 믿는다. 그의 믿음을 나 또한 믿는다.

덧붙이는 글 | <은평시민신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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