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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광장 토론] 박근혜 퇴진, 그 후 우리는?

레드콤플렉스 괴물이 블랙리스트 작성
[박근혜 퇴진, 그후 우리는36] 재벌의 추억 <노동자연쇄살인극⑤>

17.02.17 09:46 | 천명관 기자쪽지보내기

박근혜 대통령이 퇴진 후, 우리는 어떤 공동체를 만들까요? 광화문 광장의 '퇴진 캠핑촌'은 촛불 시민과 시민단체들의 대안 토론 광장을 엽니다. 이 기획은 <오마이뉴스>와 <광화문 퇴진 캠핑촌 광장토론위원회>가 공동기획했습니다. [편집자말]
▲ ‘박근혜 즉각퇴진과 조기탄핵을 촉구하는 13차 범국민행동의 날’인 21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항의하며 문화예술인들이 만든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과 조윤선 장관의 모형이 세워져 있다. 김 전 비서실장과 조 장관은 이날 오전 구속되어 서울구치소에 수감된 상태이다. ⓒ 권우성

1940년대, 미국에선 J.R 매카시 상원의원이 주창한 빨갱이 척결운동이 한창이었다. 2차 대전과 미소 냉전의 기류가 몰고 온, 소위 매카시즘이라는 광풍이었다. 요지는 할리우드와 연예계에 공산주의자들이 활동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반미활동조사위원회를 조직, 수많은 작가와 배우 등을 리스트에 올려 일자리를 빼앗고 국외로 추방하고 감옥으로 보낸, 미국 민주주의 역사에 큰 오점을 남긴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로부터 반세기도 한참 더 지난 뒤, 대한민국에서 그 치욕의 역사가 반복되었다. 박근혜 정권은 그들의 정치적 라이벌을 지지했거나 그들이 그토록 은폐하고 싶었던 세월호의 진상규명을 촉구했다는 이유만으로 무려 1만여 명에 이르는 문화예술인의 명단을 작성, 정부지원 사업에서 철저히 배제했으며 그것은 청와대와 문체부 등 정부기관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

나는 블랙리스트를 떠올리면 절로 모골이 송연해진다. 왜냐하면 현재까지 그들이 한 일은 블랙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문화예술인들을 단지 정부 지원사업에서 배제하는 정도에 그쳤지만 상황에 따라 블랙리스트는 훨씬 더 위험한 살생부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과거 이승만 정권에서 블랙리스트는 곧 죽음을 의미했다. 보도연맹학살사건이 대표적이었다. 당시 보도연맹원은 대부분 전향자들로 구성되었지만 정부 주도하에 의무가입대상을 광범위하게 적용하다보니 리스트엔 좌익과 관련 없는 민간인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정부는 보도연맹원들의 신분을 보장해주겠다고 약속했고 반공선전을 위해 보도연맹원을 각종 활동에 적극 동원했다.

하지만 전쟁이 발발하자 리스트는 곧 살생부가 되었고 보도연맹원들은 아무런 적법한 근거와 절차도 없이 깊은 산, 낯선 골짜기에서 끔찍한 죽음을 맞았다. 그 숫자가 무려 20만 명이었다. 이후, 박정희 정권에서 블랙리스트는 연좌제라는 이름으로 많은 국민에게 절망과 고통을 안겨주었다. 좌익과 관련된 가족이 있으면 취직도 할 수 없고, 출세도 할 수 없고, 자신의 꿈을 펼칠 수도 없는 굴레로 작용했다. 그리고 한동안 사라졌던 블랙리스트는 한 시대를 건너 뛰어 그 딸에 의해 다시 작성되었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언제나 그렇듯이 좌익척결이 목적이다. 지난 15년간 문화계를 종북 좌파들이 장악하고 있다고도 했다. 그 망상이 도대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들은 문화가 보수이념을 전 사회에 전파하는 도구라는 기이한 신념을 갖고 있다. 권력과 예술은 긴장관계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자연스럽고 건강한 것이다. 권력에 대해 저항하고 비판하는 것은 예술의 당위이며 권력자의 편이 아니라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의 편에 서는 것이 예술가의 윤리라고 믿고 있다.

그러다 보니 내가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는 문화예술인들은 당연하게도 거의 다 블랙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그들 중 누구도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걸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정치적 올바름을 밝힐 수 있는 떳떳한 증거이기도 하다. 실제로 내가 아는 한 그들은 저들이 주장하듯 위험한 종북론자가 아니라 날카로운 지성과 건강한 현실인식을 가진 예술가이자, 부조리와 독재에 맞서 싸우는 용기 있는 시민일 뿐이다. 그들을 모두 블랙리스트로 분류하고 배제한다면 문화예술계에 도대체 누가 남을 것인가!

▲ '문화·예술 블랙리스트' 작성을 주도한 혐의로 구속된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25일 오후 서울 강남구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 사건 규명을 위한 수사를 하고 있는 박영수 특별검사팀 사무실로 조사를 받기 위해 재소환되고 있다. ⓒ 유성호

개인의 영달을 위해 정권에 아부하고 줄서는 사이비 예술가들만 남을 게 자명하다. 거기서 어떤 창작물이 나올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반공이 국시였던 군사독재정권이 온전히 과거의 존재라고 생각했던 건 큰 오해였다. 세상에 대한 인식과 현실의 차이는 크다. 그 차이가 너무 커서 놀랄 때가 많고 절망할 때가 많다.

지금이 도대체 어떤 시대인지 헷갈린다. 역사의 시계가 종종 거꾸로 간다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조금씩이나마 세상이 좋은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믿고 싶다. 블랙리스트를 작성한 자들은 대중의 무지와 무관심 속에서 레드 콤플렉스를 먹고 자라나는 괴물이다. 이제 먹잇감이 떨어질 때도 됐는데 싶지만 거리엔 아직도 '빨갱이는 죽여도 돼'란 슬로건이 버젓이 등장한다.

레드 콤플렉스의 망령은 좀비처럼 죽지 않고 끈질기게 살아나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그 괴물이 세상을 집어삼키기 전에 우리는 깨어나야 한다. 깨어나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서야 한다. 그래서 이젠 정말로 이 미친 시대를 끝장내야 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광장신문> 4호에도 게재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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