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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광장 토론] 박근혜 퇴진, 그 후 우리는?

적게 일하고 많이 노는 세상, 불가능하다고?
풍요와 빈곤은 제도의 한끗 차이

16.12.21 10:16 | 장흥배 기자쪽지보내기

이 기사는 <광화문 퇴진 캠핑촌>의 '광장신문발행위원회'에서 발행한 3호 신문글입니니다. 시민들의 꿈과 열망을 담아 가상으로 구성한 것이며, 동의를 얻어 게재합니다. [편집자말]
▲ 광장신문 3호 지면 갈무리 ⓒ 광장신문

특정한 인간의 뇌를 스캔해서 육체에 속박되지 않은 뇌를 전자작용만으로 기능하게 할 수 있는 인공지능(AI)을 개발하려는 시도가 소개되었다. 이게 가능해진다는 것은 인간의 '정신'과 인공지능의 구별이 불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철학과 제도를 훨씬 앞질러 가는 과학기술의 질주는 아찔하기까지 하다. 

다행스럽게도 이것은 아직 가까운 미래의 일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인공지능은 바로 지금 인간 노동의 일부를, 그리고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는 상당 부분을 대체할 것이다. 지난 3월 이세돌 대 알파고의 세기의 대국이 세계를 충격과 미래에 대한 무한 상상으로 몰아넣던 시점에, 한 철학자가 스치듯 들려준 이야기가 강렬하게 남아 있다.

"인공지능에 평등의 관념을 집어넣을 수 있을까?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그걸 집어넣는 순간 인공지능의 알고리즘은 깨져버릴 것이다."

평등, 서로 다르지만 동등한 무엇, 예를 들어 어른과 아이가, 여성과 남성이 서로 다른 역할을 하지만 인간으로서 동등한 인권을 갖는 것, 자본가와 노동자의 경제적 지배 종속을 법률적 대등과 구별하는 것. 논리적 모순으로 보이는 이 섬세한 정보를 인공지능은 처리하지 못할 것이란 얘기다. 인공지능이 평등을 처리할 수 없다는 것은, 정치가 여전히 인간만의 고유한 차원으로 남으리라는 것이다.

노동에서 해방된 다수의 인간들이 시간과 물질의 여유 속에서 공동체의 의사 결정에 참여하는 사회는 이미 고대 아테네 시민들이 수천 년 전에 발명한 것이다. 그러나 그 전성기에서 6만 아테네 시민들의 민주주의 구가는 36만5000 노예 노동 위에서만 가능했다. 1명의 자유가 6명의 노예를 소비한 것이다.

사실 그보다 훨씬 오래전 고대의 씨족사회는 노예 노동 없이도 지금 기준으로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직접 및 대의 민주주의를 구현하고 있었다. 참고로 그 사회에는 마초들도 없었다. 그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는 석기시대는, 인류학자 마셜 살린스에 따르면 '원초적 풍요로움의 시대'였다. 이 풍요가 부의 축적과 사회적 지위 사이에 어떤 관계도 들어서지 않도록 노력한 여러 '제도'의 결과였다는 사실. 미개인들이 풍요로움을 제도로서 관철했다니!

인간이 자신의 역사를 겨우 더듬더듬 추적할 수 있는 시기부터, 풍요와 빈곤은 언제나 자연과 생산력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와 제도의 문제였다. 인공지능이 노동을 대체하며 산업혁명 이후 다시 한번 생산력의 도약을 약속하는 시대가 카운트다운했다. 인공지능이 노예 노동 없는 고대적 민주주의에 기여하도록 할 것인가, 그저 인간의 일자리를 무자비하게 공격하도록 할 것인가? 선택은 어떤 제도를 설계할 것인가의 문제이고, 최종적으로 인간 고유의 영역, 정치를 통해 결정된다.

아주 오래 전부터 '기본소득'이라는 아이디어가 인류에게 제출되었다. 모든 개별 구성원한테 생활하기에 충분한 소득을 공동체가 보장한다는 것이다. 핀란드에서는 내년부터 이 실험이 시작된다. 기본소득의 사상은 세상의 부가 모든 인류의 것이라는 공산주의에 뿌리가 닿아 있다. 행여 핀란드가 공산주의 실험을 하는 것이라 생각하지 마시길.

산업자본주의 절정기였던 1970년대에도 기계화·자동화·정보화 추세는 뚜렷한 일자리 감소로 이어졌다. 더 적은 노동력으로 더 많은 것을 생산하고서도 그것이 인간의 자유와 풍요로 이어지지 않는, 오히려 인간의 복리를 위협하도록 만든 것이 신자유주의로 총칭되는 제도의 복합체였다. 그것이 이제 한계에 도달했다. 이 한계는 노동 소득의 원천인 일자리를 없애면서 노동 소득으로 살아가라고 강제하는 윤리적 한계이며, 소비할 돈이 없는 사람들에게 상품 구매를 강제하는 경제적 한계다. 기본소득은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싶은 급진파는 물론 그저 큰 탈 없이 기존 시스템을 유지하고 싶은 보수파에게도 매력적인 제도로 부상했다.

막대한 예산을 어떻게 마련할까, 일하지 않고 소득이 주어지면 누가 일하려 할까, 이런 걱정은 일단 건너뛰고 기본소득이 안내하는 유토피아로 곧바로 내달려보자. 이 유토피아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사회적 생산을 담당하는 엘리트들과 그로부터 소외된 다수의 인간들로 양분된다면? 이것은 인류가 도달한 평등 관념에 현저히 반한다. 다시 정치가 나설 차례다.

현명한 정치라면 노동시간을 골고루 단축하여 만인이 노동에 짧게라도 참여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인공지능과 기본소득이 여는 신세계가 눈앞에 어른거릴 때, 이제 이 문제가 민주주의의 핵심 이슈로 등장할 것이다. 물론 21세기 초입 한국사회에서 목도하는 현실은 '더 많은 비정규직, 더 쉬운 해고'다. 재벌 자본이 박근혜·최순실 일당에 제공한 뇌물의 중요한 용도가 바로 이것이었다. 인공지능과 기본소득이 탈노동 사회의 가능성을 활짝 열어젖혔음에도, 사회는 아직 불안정·저임금·장시간 노동체제에 완고하게 속박돼 있다. 풍요로운 삶은 이 속박을 벗어나는 일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장흥배 노동당 정책실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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