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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광장 토론] 박근혜 퇴진, 그 후 우리는?

열린 광장의 불안... '우리'는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박근혜 퇴진, 그후 우리는④] 광장의 정치는 이미 시작됐다

16.12.07 14:43 | 정원옥 기자쪽지보내기

▲ 지난 3일 오후 서울 광화문일대에서 열린 '촛불의 선전포고-박근혜 즉각 퇴진의 날 6차 범국민행동'에서 수많은 시민들이 박근혜 퇴진을 촉구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불온하지 않은 해방구

광장이 열렸다. 광화문 광장에서만 13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모여 대통령 퇴진을 외치고, 청와대 앞 2백 미터까지 행진할 수 있게 되리라고는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다.

법원이 "범죄자 혐의를 받는 대통령에 대한 항의와 책임 촉구"가 정당하다는 이유로 청와대 앞 행진을 허용한 것도 이례적이고, 물대포를 쏘아 백남기 농민을 살해했던 경찰이 갑자기 선량해진 얼굴로 집회 참가자들의 안전과 편의를 돕는 일도 낯설다. 물론 광장을 연 것은 전적으로 시민들의 힘이다. 매주 집회 참가 인원이 갱신되면서 광화문 광장은 촛불집회의 역사를 새롭게 쓰고 있는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벽이 물러나고, 청와대 코앞까지 열린 해방구를 행진하는 일에서 해방감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왜일까? 마치 누군가 짜놓은 시나리오에서 '분노한 민심'과 '성숙한 시민의식'을 보여줄 엑스트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도록 독려 받고 있는 듯한 허탈함마저 드는 것은 피해의식 탓일까.

더 이상 위험하지도, 불온하지도 않은 해방구를 배회하는 동안 의구심과 불안함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우리는 이 추운 겨울밤, 왜 걷고 있는 것일까. 평화롭고 질서 있게 국민의 목소리를 전달만 하는 것으로 대통령이 과연 물러날까. 대통령이 물러난다고 해서 좀 더 살만한 세상이 올까. "박근혜 퇴진!"을 한목소리로 외치고 있는 우리는 정말로 세상이 바뀌기를 바라는 '우리'일까. 우리는 누구일까.

우리의 구성은 어떻게 가능한가 

▲ 서울 광화문 광장 박근혜 퇴진 캠핑촌의 모습 ⓒ 노순택

백만 명이 넘는 군중이 광장에 모이기 시작했을 때부터 우리를 위험하게 하는 것은 공권력이 아니라, 낯선 몸들과의 원치 않는 접촉이다. 깃발을 찾아, 약속 장소를 찾아, 지인들을 찾아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인파 속에서는 다른 몸들과의 접촉을 피할 수 없고, 압사의 두려움마저 느끼는 순간들과 맞닥뜨리지 않을 수 없다.

광장의 한 편에서 다른 편으로 이동한다는 것은 내가 다칠 수도 있고, 다른 누군가를 다치게 할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순간들을 다른 몸들을 신뢰하며 내 몸을 맡겨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일상생활에서라면 불쾌감과 두려움을 느꼈을 상황을 기꺼이 견뎌내게 하는 인내심은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우리'일 것이라는 동질감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박근혜의 퇴진을 함께 외치는 순간,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우리'로 구성되는 것이다.

하지만, 촛불집회의 목표는 단순히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시위하는 데 있는 것은 아니다. 열린 광장을 축제처럼 즐기고 어제와 다를 것 없는 일상으로 돌아가는 데 있지도 않다. 박근혜 정권을 퇴진시키고 보다 살만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우리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 촛불집회의 목표가 있다고 할 때, 그것은 한시적으로 열린 광장에서 '떼 다중'으로 유동하고 있는 우리를 우리 스스로가 어떻게 새로운 정치적 주체로 구성해내는가에 달려 있다. 그것은 광장에 모인 우리 자신에게 어떤 정체성과 역할을 부여할 것인가의 문제와 직접적으로 결부되어 있는 것이다. 

다른 몸들과의 접속과 연대    

▲ 촛불집회 시위 현장의 모습 ⓒ 노순택

5차 촛불집회에서는 30여 개의 여성단체, 여성주의 모인, 성소수자 단체, 장애인 단체들이 모여 박근혜 대통령 하야를 촉구하며, 만연한 여성 비하와 가부장적 체제에 기댄 권력의 카르텔을 비판하는 '페미니스트 시국선언'이 나왔다.

대통령의 국정 파탄에 대한 책임을 묻는 한편 여성 비하와 성차별, 성폭력, 혐오문제에 맞서겠다는 뜻을 밝혔고, 시국 선언 이후에는 "세상을 바꾸는 페미들, 호모들, 퀴어들, 가난뱅이들, 개돼지들..."이라는 스티커가 배포되었다. 이 스티커는 적어도 내 주변에 앉아 있던 사람들 사이에 작은 술렁임을 불러일으켰다. 사람들은 흔쾌히 손을 내밀지는 못했지만, 스티커를 붙이는 것을 거부하지도 않았다. 이 장면이야말로 열린 광장에서만 목격할 수 있는, 광장의 정치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신호였다고 할 수 있다.

주디스 버틀러의 '우리 인민-집회의 자유에 관한 생각들'이라는 글은 광장의 정치에서 우리가 어떻게 '우리'로 구성되고, 다양하고 복수적인 다른 몸들과 연대할 수 있게 되는지를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설명해주었다.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노출되는 것임에 동시에 저항하는 것이다. 우리는 바로 그 접속의 순간에 만들어진다는 뜻이다. 그렇게 만들어지는 순간에 우리는 우리의 요구에 필요한 몸을 노출하게 된다. 우리는 서로를 위해 서로와 더불어 그렇게 한다. 서로 사랑하거나 반드시 조화를 전제하지 않고서도 그렇게 한다. 그것이야말로 새로운 정치조직을 만드는 한 방식이다."

세상을 바꾸는 일은 광장에 몸을 드러내는 일, 다른 몸들과 접속하고 연대하는 일로부터 시작될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정원옥씨는<문화/과학> 편집위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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