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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호진의 역사 독립군 임종국

민족문제연구소와 작가회의, 엇갈린 친일문제 행보
[역사 독립군 임종국 9화] 베트남 역사에서 자주독립을 배워야 한다

16.10.31 16:53 | 글:조호진쪽지보내기|편집:김대홍쪽지보내기

▲ 2001년 7월 22일 민족문제연구소 회원들이 미당문학상을 제정한 <중앙일보> 앞에서 미당문학상 반대시위를 전개했다. ⓒ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친독재로 민족사를 얼룩지게 한 미당문학상 절대 반대!"

2001년 8월 24일, 섬진강에 살던 저는 초등학교 6학년·3학년인 두 아들과 함께 상경해 '미당문학상'을 제정한 <중앙일보> 사옥 앞에서 1인 시위를 했습니다. 제가 어린 아들과 함께 서울까지 올라와서 시위를 하게 된 이유는 시인으로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분노 때문이었습니다. 미당(未堂) 서정주(1915~2000)가 어떤 인물인지 몰라서 문학상을 제정한단 말인가!

서정주는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가미가제(神風) 특공대의 자살놀음을 숭고한 애국행위로 예찬한 '오장 마쓰이 송가' 등의 시와 '징병 적령기의 아들을 둔 조선의 어머니에게' 등의 수필, 그리고 '최체부의 군속 지망'이란 소설 등의 작품으로 일본제국주의 침략전쟁을 찬양하고 선동하면서 조선의 청년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민족 반역자 아니던가.

그뿐 아니라 원조 독재자 이승만의 전기를 쓰고, 황군(皇軍) 출신 독재자 박정희의 베트남 파병을 부추기는 시를 쓰고, 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하며 광주시민을 학살한 전두환의 56회 생일을 탄생이라 운운하며 축시로 찬양하는 등 양지만을 쫓았던 권력의 시녀가 아니던가 말이다. 친일과 친독재에 대한 일체의 반성 없이 부귀영화를 누리다 생을 마친 문학인을 기리는 상을 만들다니….

임종국 선생이 1988년 <한국일보> 시론을 통해 역사를 두려워하기는커녕 역사를 농단까지 한 친일 반역자 서정주를 비판했지만,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홍진기(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 장인)가 회장을 지낸 <중앙일보>는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미당문학상'을 제정했고, 미당의 후예들은 역사의 구정물 통에 빠지는 것을 오히려 명성 획득의 기회로 여기며 역사 능멸에 동참했습니다. 저와 아들은 이런 부역행위를 눈 뜨고 볼 수 없어서 미당문학상 반대 시위에 나선 것입니다.

미당문학상 반대 1인 시위를 마친 저와 두 아들은 민족문제연구소를 방문해 친일청산 성금 2만4천원을 전달했습니다. 이 성금은 큰아들이 '제47회 전남과학전람회'에서 우수상을 수상하며 받은 상금 3만원 가운데 2만원과 작은아들의 용돈 4천원을 합친 돈입니다. 두 아들은 어느덧 스물여덟과 스물다섯 청년으로 성장했습니다. 선교사를 꿈꾸는 큰아들은 아프리카에서 6년째 생활 중이고 작은 아들은 대학생입니다. 그리고 저는 15년째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입니다.

친일문제는 살아있는 망령, 반드시 청산해야 할 역사적 과제

▲ 민족문제연구소 창립멤버. 좌측부터 김민철-김경희 부부, 김대기(임종국 선생 제자), 김봉우 초대소장, 조세열 사무국장(현재 사무총장), 남창균 연구원. ⓒ 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이라는 문제는 단지 과거의 죽은 사실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살아있는 망령으로, 반드시 청산해야 할 역사적 과제로 제기되는 것이다. 임종국 선생께서 일관되게 이 가증스러운 반민족적 범죄와 싸워 그 내용과 자취를 밝히는 데 평생을 바치신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이제 우리 연구소는 선생의 업적을 토대로 하여 민족사의 오점인 친일행위의 구조와 실체를 명백히 드러냄으로써 민족정통성의 회복에 조금이라도 기여하고자 한다." (민족문제연구소 창립선언문 중에서)

민족문제연구소(이하, 민문연)는 1949년 친일파에 의해 와해된 반민특위의 정신과 친일문제 연구에 평생을 바친 고(故) 임종국 선생의 유지를 이어 1991년에 설립된 단체입니다.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 골목집 2층 11평 남짓한 좁은 사무실에서 상근자 5명으로 출발한 민문연이 올해 창립 25주년을 맞으면서 40명이 상근하는 국내 최고의 역사 시민단체로 성장했습니다.

지난 20일 김민철(53) 책임연구원을 민문연에서 만났습니다. 민문연 창립 멤버인 그에게 친일청산과 역사정의를 향한 25년의 험난했던 도정을 듣기 위해서입니다. 친일파가 득세하는 대한민국에서 진실과 정의를 밝히는 과업이란 얼마나 힘든 역사투쟁일까요. 민족사 정립이란 종착역을 향해 기관차처럼 쉬지 않고 달려가는 민문연의 뜨거운 기적 소리를 들려 드립니다.

[인터뷰] 신혼집 전세금을 내놓은 김민철 책임연구원

▲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 ⓒ 조호진

김민철 책임연구원은 자신이 살던 전세금 중 1천만원을 연구소에 내 놓으면서 연구소에 딸린 작은 방에 신혼방을 차렸던 부산 출신의 순정파 사나이입니다. 그에게 그 질문부터 했습니다.

- 1991년 창립 당시 전세금 1천만원을 연구소에 내 놓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연구소에 내놓았다는 이야기는 잘못 전해진 겁니다. 민문연 출발 당시 상근자는 김봉우 초대소장과 조세열 사무국장 그리고 저와 아내(김경희), 남창균 5명이었습니다. 사무실 전세자금은 조세열 사무국장이 어렵사리 마련했습니다만 운영비가 문제였습니다. 그때 제가 결혼해서 봉천동에 살고 있었는데, 그 전세금 1천만원을 빼 운영비로 사용한 겁니다. 그러면서 연구소 안에 작은 방이 있어 거기로 들어온 겁니다. 물론 아내도 동의했습니다.

문을 열고 나오면 사무실이고 문을 닫고 들어가면 침실이었죠. 저희 부부 입장에서 본다면 일종의 오피스텔이었다고나 할까.(웃음) 상당 기간 급여 없이 소액의 활동비만 받았기 때문에 생활비를 벌기 위해 입시학원 선생도 하고 출판사에서 일하기도 했습니다. 그땐 다들 그렇게 했으니까요. 저희 부부뿐 아니라 연구소 상근 연구자와 활동가 모두 열악한 환경 속에서 25년을 버티며 살았습니다."

▲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3권짜리 <친일파 99인> ⓒ 민족문제연구소

- 그때 당시 친일파 명단에서 재벌 창업주의 이름을 삭제해주면 거액을 후원하겠다는 제안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1993년 연구소가 출판을 준비 중인 <친일파 99인>에 박흥식, 김연수 등 친일 경제인이 포함된 사실을 알고 모 그룹 관계자가 찾아와 창업주를 빼주면 거액을 후원하겠다고 했습니다. 그 창업주는 노골적으로 친일행위를 했다기보다는 기업을 운영하기 위해 일제와 타협한 일종의 매판형 자본가라 할 수 있습니다. 제안한 금액이 거액인데다 친일 정도도 악질적이지 않아서 잠깐 흔들리긴 했지만 거절했습니다. 만일 그 거래에 응했다면 오늘의 민문연과 <친일인명사전> 편찬은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출판된 3권짜리 <친일파 99인>은 폭발적인 판매와 반응을 사면서 사회적인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 또 다른 유혹은 없었습니까.
"민문연 창립 초기였던 당시 실세 정치인이었던 국회의원이 넓은 사무실과 연구비를 지원하겠다고 제의했습니다만 자칫 정치인의 치적으로 오도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이 또한 거절했습니다. 지난 25년 동안 수많은 방해와 탄압을 견디며 친일청산과 역사정의 실현에 나설 수 있었던 가장 큰 배경은 친일파 청산에 나서는 행동파 회원과 회비로 묵묵히 후원하는 회원 그리고 응원해준 국민들이었습니다."

박정희 흉상 철거와 박정희 지지자들의 계란투척과 협박전화

▲ 문래공원에 세워졌던 박정희 흉상이 민족문제연구소 회원들에 의해 철거됐다. ⓒ 민족문제연구소

▲ 2009년 어버이연합 회원 등이 민족문제연구소 입구에서 ‘민족문제연구소 해체’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 민족문제연구소

- 친일문제연구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저항과 반발이 컸을 것 같습니다.
"친일문제연구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반응은 크게 세 가지인데 협박과 하소연 그리고 무시입니다. 가장 반발이 컸던 사안은 박정희기념관 저지와 군사쿠데타를 기념하기 위해 서울 영등포구 문래공원에 세워진 박정희 흉상을 철거할 때였습니다. 박정희 지지자인 노인들이 민문연에 몰려와 계란을 투척하고, 빨갱이라고 욕설하고, '밤길 조심하라'는 등의 협박전화를 했습니다. 협박전화에 시달리던 여성 상근자들은 울기도 했습니다."

- 한국 사회에서 민문연의 존재는 어떤 의미일까요.
"세계적으로 민문연과 같은 민간연구소는 없습니다. 인권단체는 많지만 시민의 힘으로 운영되는 민간연구소는 민문연이 유일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친일파가 득세하는 한국 사회에서 민문연이 존재할 수 있었던 배경은 회원들의 헌신적인 활동과 국민들의 응원 그리고, 그들에게 꼬투리를 잡히지 않을 정도로 철두철미한 연구의 힘입니다."

- 민문연의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입니까.
"연구비 부족과 인력부족을 헌신과 희생으로 메우고 있습니다. 연구원들의 가장 큰 소원은 연구에 집중하는 것인데 닥치는 일들이 너무 많습니다. 박근혜 정부와 아베 정권이 국정교과서 등의 사고(?)를 치면 기존의 연구를 중단하고 현안에 대처할 수밖에 없습니다. 직원들의 대우도 열악합니다. 10년~20년 된 실장급(박사급 연구원)들의 경우 박봉(200만원가량)도 박봉이지만 자녀 교육비와 주택 등의 생활고에 대한 압박이 심한 편이죠."

- 어려움을 버티게 하는 힘은 무엇입니까.
"지난 25년 동안 민문연은 잡음이 없었습니다. 이돈명(1대), 조문기(2대), 김병상(3대), 함세웅(4대) 이사장을 비롯해 올곧은 어른들을 모신 것은 큰 복입니다. 김봉우(1대), 한상범(2대) 임헌영(3대) 소장 등의 강직한 선배 어른들이 연구소를 지켰는데 임 소장은 상근비를 전혀 받지 않고 헌신하십니다. 어른들은 상근자들을 격려하고 상근자들은 맡은 바 소임을 묵묵히 해내는 전통이 형성됐습니다."

- 민문연이 추진하는 핵심사업은 무엇입니까.
"민문연의 핵심 사업 세 가지를 꼽는다면 첫째 교육 사업을 통해 '친일문제'를 좀 더 쉽게 시민들에게 알리는 것이고 둘째는 친일 관련 자료를 비롯해서 근현대 민중들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과거청산운동의 허브 역할을 목표로 한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 셋째는 남북 공동의 강제동원 진상규명 사업 등을 하는 것입니다. 현재 가장 시급한 것은 식민지역사박물관 건립입니다. 저희가 소장하고 있는 4만여 점에 가까운 식민지 역사를 보여주는 자료들과 친일인명사전의 계속적인 개정 증보작, 징용, 징병, 야스쿠니 문제와 각종 한일 간 역사 관련 소송 자료 등 방대한 자료들을 전시할 박물관이 절실하게 필요한데 기금이 부족합니다."

작가회의 미당문학상 반대의지 어디로 갔나… 이사장마저 심사위원 활동

▲ 1995년 7차 친일인명사전 편찬기획회의 모습. 민족문제연구소는 비타협 역사투쟁을 힘겹게 하고 있는데 한국작가회의 전 이사장 등은 친일문학상에 가담했다. ⓒ 민족문제연구소

2001년 제정된 <미당문학상>은 상금 3000만 원으로 중앙일보와 문예중앙이 주최하고 LG그룹과 중앙m&b가 후원합니다. 상금이 파격적이어서 친일·친독재 문학상이란 오욕을 감수할 만할지도 모릅니다. 한국작가회의 회원 다수가 후보에 오르거나 수상자가 됐고 심지어 한국작가회의 이사장을 지낸 이시영(현재 고문) 시인과 노동해방을 시로 노래하던 김사인(현재 이사) 시인이 심사위원을 맡기도 했습니다. 반면 미당문학상 제1회 수상 후보에 오른 고(故) 오규원(1941~2007) 시인은 이 상을 고사한 바 있습니다.

한국작가회의(당시엔 민족문학작가회의)는 2001년 미당문학상 반대 성명서를 통해 "소속 문인들은 이 상이 시행되는 데 어떤 형태로든 참가하지 않을 것을 분명히 한다"면서 "우리는 심사위원으로도 참여하지 않을 것이며, 수상자로 선정되더라도 이 상을 거부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성명서는 헛된 맹서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불과 20년도 안 된 세월에 작가의 양심이 마비된 것일까요.

시인이자 문학평론가로 친일문제 연구에 평생을 바친 임종국 선생, <역사 독립군 임종국>으로 그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저 또한 시인으로 한국작가회의 회원입니다. 펜이 양심과 정의를 버릴 때 역사의 흉기가 될 수 있음을 미당 서정주를 비롯한 친일 문인들이 몸소 보여주었습니다.

한국작가회의 회원인 저는 역사정의와 시대정신을 소홀히 한 한국작가회의에 대한 항의 표시로 회비 납부를 거부하려고 합니다. 그럼에도 항의를 끝내 외면할 경우에는 탈퇴할 것입니다. 미당문학상 수상자는 다음과 같습니다.

정현종(1회), 황동규(2회), 최승호(3회), 김기택(4회), 문태준(5회), 김혜순(6회), 문인수(7회), 송찬호(8회), 김언(9회), 장석남(10회), 이영광(11회), 권혁웅(12회), 황병승(13회), 나희덕(14회), 최정례(15회), 김행숙(16회)

자주독립과 제국주의 해방투쟁, 베트남에서 배워야 한다!

▲ 지난 2009년 11월 8일 '친일인명사전 발간 국민보고대회'가 서울 효창동 백범 김구 선생 묘소에서 열렸을 당시 참석자들이 '친일청산','친일타도'가 적힌 종이를 들어보이고 있는 모습. ⓒ 오마이뉴스

▲ 2009년 6월 9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국작가회의 사무실에서 열린 '이명박 정부의 독재 회귀를 우려하는 문학인 시국선언' 기자회견에서 문학평론가 염무웅씨(가운데)가 시국선언문을 낭독하고 있다. ⓒ 유성호

한 입으론 역사정의와 시대정신을 말하고 또 다른 한 입으론 처세와 명성을 위해 친일문학상인 미당문학상을 합리화하면서 가담하는 그야말로 한 입으로 두 말하는 비루한 이 시대에 베트남의 자주독립과 해방투쟁 역사를 우러러보면서 가슴에 새깁니다.

중국에 지배당했던 베트남은 천년에 걸친 끈질긴 저항운동으로 독립왕국을 이루었습니다. 13세기 들어 세계를 정복한 몽고의 침략을 세 차례나 막아내며 베트남 민족의 저항정신을 보여주었으나 19세기 제국주의의 아시아 침략에 의해 프랑스 식민지가 되고 맙니다.

제국주의 프랑스는 베트남 민족의식을 없애기 위해 코친차이나(남부) 안남(중부) 통킹(북부)으로 분리시키고 언어사용은 금지했으며 학교보다 많은 감옥을 짓는 등 독립운동을 가혹하게 탄압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면서 일본은 프랑스군을 굴복시키고 베트남을 지배합니다. 1941년 망명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호치민(胡志明·1890∼1968)은 '베트남독립동맹'을 결성해 대항하면서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한 1945년 '베트남민주공화국'으로 독립합니다.

1946년 프랑스는 통치 지배권을 주장하며 다시 침략합니다. 호치민을 중심으로 한 항불 독립운동세력은 54년 '디엔 비엔 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무릎 꿇리며 자주적인 독립을 쟁취합니다. 그러나 제국주의 미국의 집요한 방해와 제네바 휴전협정에 따라 남북 분단에 의한 두 개의 나라가 만들어집니다. 우리처럼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으로 갈라진 것입니다.

▲ 응우옌 트린 티 감독이 카메라를 들고 베트남전 당시 '호치민 루트'로 알려진 공산주의 게릴라들의 이동로를 따라 여행하며 찍은 영화인 '호치민 루트'(2011) ⓒ 호치민루트(2011)

1959년 호치민은 남베트남 양심세력을 돕기 위해 라오스와 캄보디아 국경을 따라 남베트남에 이르는 '호치민 루트' 건설에 착수하는 등 민족통일운동을 전개합니다. 1961년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이 비군사 전투요원을 파견하며 간접적으로 정권을 조종했으나 존슨 대통령으로 바뀐 64년 '통킹만' 사건을 일으키면서 베트남 전쟁에 직접 개입합니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 연인원 260만 명의 병력과 제2차 세계대전보다 많은 폭탄을 사용하고 제1차 세계대전보다 많은 전쟁비용을 투입했지만 1973년 베트남에서 완전 철수합니다. 1975년 총공세를 펼친 북베트남군은 사이공을 함락시키면서 1975년 4월 30일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을 선포합니다. 백년간의 길고 긴 전쟁이 끝나면서 자주독립 국가를 선포한 베트남을 통해 친일과 친미로 얼룩진 대한민국 역사를 생각합니다.

친일청산과 역사정의를 세우는 일은 당대에 끝날 가능성이 희박합니다. 친일과 친미로 이어진 반역의 뿌리가 그만큼 깊고 질기기 때문입니다. 이명박과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뒤 수구언론과 극우세력의 역사왜곡이 역사변란 수준으로 치달으면서 근현대사가 백척간두에 서 있습니다.

이런 나라에서 친일과 친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면 베트남처럼 끈질기게 싸워야 하지 않을까요. 싸움이 자자손손 이어져야 외세로부터의 자주독립과 남북통일의 그날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아, 시인이란 이름이 부끄럽고 참혹한 시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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